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1) 회령에서 3년 - 회령간이 농업학교(13~16세)

 회령간이 농업학교

13~16

 

한 달쯤 집에 있었을까, 외사촌 형님이 회령 간이농업학교에 입학시킨다고 또 데리러 왔다. 나는 따라 나섰다. 삼월이라 눈이 녹으며 얼며 한다. 입학시험 날 시간에 닿기 위해 사흘 전에 떠났다. 하루에 오십 리 정도 밖에 걷지 못했다. 첫날에는 종성 남오룡재[1] 선생 손부[2]된 우리 외사촌 누님 집에서 자고 다음날 회령, 세곡 강부령 영감 댁에서 잤다. 그리고 다음 날 회령읍에 가서 여관에서 잤다. 그 때에는 고무신이 없을 때여서 솜버선에 초신을 신고 간다. 녹지도 않은 눈얼음 반죽 길을 풍덩거리며 간다. 처음에는 시렸으나 나중에는 무감각이다. 그래도 발이 아주 얼지는 않았었다.

나와 관석 두 소년을 회령읍까지 데리고 가신 분은 물론 우리 작은 외사촌 형님이시다. 그는 관석 군의 아버님이다.

이튿날 학교에 갔다. 회령읍 동문 성밑에 있는 기전 군청 객사가 우리 들어갈 학교 집이었다. 입학시험 시간보다 한 오분 늦었다. 그래도 관대하게 시험장에 들여 주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합격자 발표에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외사촌 형은 하숙을 정해주고 학비를 다 치루고 한 달 하숙비도 주고 가셨다. 이 학교 전임 선생은 두 분이었다. 교장은 회령 공립보통학교 교장이 겸임하고 시간 강사도 보통학교 선생님이 대신해 주었다.

교두(敎頭)[3]는 일본 분으로서 세도사다기찌란 고추같이 작고 매운 진짜 일본식 인간이었다. 가장자리를 얄미울 정도로 다듬은 새까만 콧수염을 붙이고 있었다. 애기도 없고 화분 가꾸기가 유일한 취미였다. 또 한 분 전임 교사로서 수원농전 졸업한 한국 분이 있었다. 일본 선생은 농업고등학교 출신이고 이 양반은 수원농전 출신이니 학력으로는 월등하게 위인데도 실제로는 일본 선생 조수격으로 자족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에게서 아무 인상도 감화도 받은 것이 없다. 그의 이름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보통학교 교사로서 최 선생이란 분이 한 주일에 두 시간씩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치셨다. 그때 소위 고등한문 독본이란 것은 제법 어려운 글이어서 퇴계, 율곡 문집에서 뽑은 것도 있고 경서와 사서에서 전재한 것도 있었다. 최 선생은 정규사범 출신으로서 아직 젊으셨지만 한학에 조예가 있고 민족과 민족 문화를 사랑하는 분이었다. 한문시간에 조선 역사 이야기도 하고 퇴계, 율곡, 이 충무공 등의 글을 읽어주기도 했다. 하루는 손필대(孫必大)[4]의 글을 읽으면서 우선 손필대에 대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였다. 손필대가 장원급제하고 아주 양반 자세가 심한 양반 고을에 성주로 임명되어 갔다. 지금까지 이 양반 세도가들 등살에 견디어난 성주가 없었다. 각가지[5]로 망신시켜 쫓는 것이 그들의 취미었다. 그 세도가는 한() 씨와 노() 씨 가문이었다. 손필대는 첫 시장(試揚)에서 한 노를 몰아 저는 토끼를 쫓는다(驅韓盧而迫鶱兎)하는 방(시험제목)을 내걸었다. 이것은 통감에 있는 구절이다. 한로(韓盧)는 유명한 사냥개 이름이다. 말하자면 노 씨와 한 씨를 사냥개로 몬 것이었다. 그런데 멋도 모르는 샌님들은 명문을 짓노라고 끙끙댄다. 그 중에 한 장 글이 들어왔다. 한도 큰 성이요, 노도 큰 성이니 두 큰 성이 합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아들이 반드시 클 것이요 손자를 낳았으니 손자도 반드시 클 것이다(韓亦大姓 盧亦大姓 兩大姓合生子 子必大 孫必大). 말하자면 손필대를 자기네 손자로 몬 것이다. 그런데 손필대는 그 글에 장원급제를 주면서 큰대자() 옆에 주필(朱筆)로 점(글이 좋았을 때 시관이 붉은 붓으로 찍어 주는 감격의 표) 하나씩 찍어서 내걸었다. 말하자면 큰대자()가 모두 개견()자로 돼 버리게 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한이란 성도 개성이고 노란 성도 개성이니 두 개성이 합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아들도 개일 것이고 손자도 개일 것이다로 된다. 그래서 그 고을 세도 양반이라는 한 씨와 노 씨가 손을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야사에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우리는 무척 재미있어했다. 최 선생의 의젓하고 어른다운 모습에 눈에 선하다.

 

어쨌든 거기서도 졸업 때 첫째라나 해서 우등상을 탔고, 함북도지사상도 탔다. 우등생이면 큰 사람 된다는 확률은 없다. 얌전한 샌님으로 끝나는 우등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도 후자의 하나일지 모른다.


[각주]

  1. 남명학(南溟學, 1731~1798) -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성원(聖源), 호는 오룡재(五龍齋). 종성(鍾成) 출신. 한몽린(韓夢麟)의 문인이다.
  2. 손부 손자의 아내
  3. 교두(敎頭) - 일제강점기, 소학교나 중학교의 수석 교사를 이르던 말
  4. 손필대(孫必大, 1599~?) -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이원(而遠), 호는 세한재(歲寒齋). 할아버지는 손원(孫轅)이며, 아버지는 진사 손몽열(孫夢說)이다.
  5. 각가지 - 각각 다른 여러 가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