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7) 서울 3년 - 중앙YMCA

중앙YMCA

 

만세이후 31운동 33인과 주요 관계자들이 감옥에 가고 그 뒤에 남아 학생들과 민중과 청년들에게 이 운동을 의식화시킨 본산이 서울 중앙 YMCA였다고 하겠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민족의식을 키우고 민족문화를 발굴하고 종교의 사회참여를 실천했던 것이다.

이상재, 윤치호 그리고 총무 신흥우 세 분이 어울려 네 일, 내 일 없이 날마다 뭔가 하고 계셨다. 간혹 미국서 명사가 오면 강연 한번 안 할 수 없었고 그 통역은 신흥우 씨 아니면 윤치호 선생이 담당하였다. 매 주일 오후 두시에는 빠짐없이 일요강좌가 있었다. 종교적 민족적 교양 강좌였다.

이상재 영감은 무던히 익살이셨던 모양이어서 많은 일화를 남기셨다. 한번은 일본 국회의원들이 민정을 살핀다고 한국에 왔었단다. 그들은 민간 원로 이상재 영감을 만나잖을 수 없었다. 그 일행의 대변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중 하나가 이상재 영감 앞에서 내선일체를 논하고 일본과 조선은 결혼한 한 가정이라고 했단다. 이상재 영감은 당장에 그게 강간이지 결혼인가?했다고 한다. 31운동 때, 이상재 영감은 그 축에 들지 않았지만 뭔가 몰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경찰은 늘 불안해했다.

한번은 종로 경찰서장이 영감을 모셔다 놓고 영감 누구하고 독립운동을 하는 거요?했단다. 이상재 영감은 독립이란 혼자 선단 말인데 혼자서 하는 거지 누구는 무슨 누구야했단다. 성급한 일인이라 손이 뺨에 날라올려는 순간 영감은 너희 왜놈들은 아비도 하래비도 없단 말이냐? 후레자식 같은 놈!하고 호통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때 시인 변영노 씨는 한창 청년이라 Y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상재 영감은 그를 극진히 사랑하셨단다.

하루는 변영노 씨가 무심코 종로를 거니는데 뒤에서 이상재 선생이 변영로 씨 부친 함자를 부르며 ○○씨 야!하더라는 것이다. 그래 돌아서면서 왜 저더러 부친 함짜를 부르십니까?했다.

이놈 너 변○○ 「아니야?하고 깔깔 웃으시더라는 것이다. 종자니까 아들에 해당한단 말이다.

송창근 형이 첨 서울 왔을 때 아니 이십이 되나 마나였는데 YMCA에서 이상재 영감을 처음 뵜단다. 영감께서 바나나한 가닭 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시더란다. 송 형은 처음 보는 과일이 뭔지도, 어떻게 먹는지도 몰라 어리둥절했다. 영감은 자기 손에 바나나를 껍질 채 한입 뜯어 자시는 체 했다. 송 형도 그렇게 했다. 영감은 깔깔 웃으시며 저 촌놈 바나나 먹는 꼴 봐라!하고 놀리더라는 것이다.

 

어느 땐가 일요강좌에서 강연을 하시면서 여러분도 정치를 할 줄 알아야 돼! 민족이니 나라니, 하면서 정치를 모르면 뭐가 되나. 정치라는 것은 저쪽에서 장훈하면 이쪽에서 멍훈할 줄 알아야 한단 말이지……』[1] 하시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종로경찰서 고등계에는 영감을 전담한 형사가 있었다. 그는 일본인이지만 영감을 존경하고 아버지같이 모시고 싶어도 했다. 영감께서 임종하실 때 그는 진정 마감 큰절이라도 드리고 싶어 달려갔다. 영감께서는 조선 놈은 죽을 때에도 일경 입회 아래서 죽어야 하나?하시더란다.

그는 너무 억울해서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Y는 겨울에 스팀이 돌아, 들어만 서면 훈훈한 것이 좋았다. 추운 방랑 소년인 나는 거의 매일 잡지실에 앉는다. 개조중앙공론이니, 그 밖에도 많은 일본 잡지들이 있어서 심심찮게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소년부나 청년부 회원도 아니고 사실 아무 닿는 데가 없었지만 누구냐 묻는 사람도 없고, 나가라 들어가라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다.

아다찌가와(芥川龍之介)의 자살 직전 작품에 아찔한 깊이를 느낀 일이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자살했다는 기사가 났다. 역시 그랬었구나!하고 나는 슬픈 독백을 뇌까리기도 했다.

나는 YMCA 영어 전수과 삼학년에 한 일년 다녔다. 정경옥[2] 군도 같은 반이었고 홍병덕 씨가 교무 책임자였다. 졸업시험도 다 같이 쳤는데 발표가 없었다. 홍병덕 씨에게 따져 봤다. 성적은 첫째지만 일년내내 수업료를 안냈으니 학생이랄 수 없잖느냐는 것이었다.

Y에는 강당 입구 옆에 김은호 화백의 승천하는 예수가 걸려 섬세한 아름다움을 품기고 있었다.

어쨌든, YMCA는 무일푼의 젊은 낭인을 괄시하지 않는다.


[각주]

  1. 장기 용어로 북측에서는 장군장훈이라고 하고, ‘멍군멍훈이라고 함
  2. 정경옥(鄭景玉, 1903~1945) - 감리교 목사, 조직신학자. 1903524일 전남 진도군 진도면 교동리에서 출생했다. 진도소학교를 거쳐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YMCA영어반을 수료하고 일본유학에 올랐다. 도시샤(同志社)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하다가 1923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게 되자 귀국하였고 곧 서울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73월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에 미국유학에 올라 일리노이주 에반스턴에 있는 개럿(Garrett)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곳에서 당시 미국계에 대표적 신학자였던 롤(F. H. Roll)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리스도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에 심취하였다. 그는 그의 스승인 롤 박사의 미국적 경험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또 현대신학의 시조인 독일의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경험을 일단 긍정하고 리츨(A. Ritchle)의 기독교 도덕성을 함께 수용하였다.
    19299월에 그는 다시 노오드웨스턴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하고 2년 후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계속 박사과정을 밟으려고 하였으나 그의 모교가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귀국하여 1931년부터 1937년까지 감리교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신학세계>의 주간도 맡으면서 재직기간 중 무려 60여편의 무게있는 신학논문을 발표하였고 저서로는 한국감리교의 교리적 선언을 신학적으로 해설한 <<기독교의 원리>>(1934년 간행)를 저술하였다. 특히 그는 1932년에 <위기의 신학>을 발표하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바르트(Karl Barth)을 소개하였고 신학 이후로 계속 현대신학의 안테나 역할을 하여 젊은이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어 유능한 청년들을 신학도로 불러 훈련시켰다.
    이런 그의 정력적인 교수생활과 저술활동은 그의 건강을 해치게 되어 19373월부터 19393월까지 2년간 그는 그의 고향 진도로 내려가서 요양생활을 하였다. 19394월부터 그는 1년간 만주로 건너가 사평가(四平街)신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1941년에 다시 고향 진도로 내려와 요양하던 중 일본의 태평양전쟁 도발 이후 친미파 인물로 지목되어 예비검속에 걸려 약 8개월간 재판도 받지 못하고 진도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는 석방되면서 19432월부터 2년간 전남 광주교회(현 광주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에 전념하면서도 청년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토일요일 제외) 새벽 4-6시에 자기 방에서 10명 남짓한 남녀 청년들을 거의 3년간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쳤다.
    그는 19453월부터 복막염 수술을 두 차례나 했으나 별효과가 없었다.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의 총 3,500g에 달하는 수혈도 보람없이 조국 광복 4개월을 앞두고 194541곧 날이 밝는다라는 확신에 찬 말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의 천재적 소질을 마음껏 발휘하지도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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