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26) 소학교 교사 3년 - 교사 3년생(신아산 학교에서)

교사 3년생

- 신아산 학교에서 -

 

나는 어느 날, 학생 학부형 청년 원로들 모두 한 자리에 초청해 놓고 일종의 데모를 해 볼 생각이 났다. 그래서 교사회를 열고 의논했다. 하기방학 무렵에 방학식이란 이름으로 학예회를 열기로 했다. 아이들 중에서 노래, 웅변, 암송, 그림, 글씨 등등 특기대로 발표 또는 전시하게 하고 학사보고도 하고 신문화에 대한 소개도 할 작정이었다.

 

그날이 왔다.

원로 분들이 먼 동네에서까지 많이 오셨다. 아버님도 오셨다. 청년들도 모여서 학교가 배꾹 차고 문밖에 둘러서기까지 했다.

선생들은 각기 맡은 대로 보고도 하고 자기 반 학습에 대한 고안과 자랑도 했다. 그때 나는 연설을 했다.

그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희망이 무엇입니까? 국토? 정치? 경제? 권력? 아무 것도 가졌달 수 없지 않습니까? 과거를 자랑할 것입니까? 잃어버린 것을 자랑할 것입니까? 모두 부끄럽고 슬프고 못난 것뿐이 아닙니까? 그러나 한 가지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이들을 주셨습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의 백지(白紙)입니다. 우리가 그리는 대로 됩니다.

여러분이 또 이 아이들에게 아무렇게나 먹칠할 작정이십니까?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아이들 가운데서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 날지 누가 압니까? 이 아이들은 여러분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여러분 집안 아들 손자로만도 아닙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 민족의 생명이고 꽃망우리고 희망입니다. 그래서 나는 돈 한 푼 받는 것 없이 벌써 3년째 이 어린이들을 가꾸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일이 이 밖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등등

나는 서울서 제일 웅변가라는 박일병 씨 김창제 씨 등 선배들의 연설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고 웅변조로 흥분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버님을 뵜더니 네가 그렇게 말 잘하는 줄 몰랐다. 나는 네가 말재주 없는 줄 알았는데 말 잘하더구나!하며 기뻐하셨다. 아버님은 내가 늘상 입안에서 모기소리 만큼씩 말을 씹어 넘기는 게 언짢으셨던 것이다. 말 좀 들리게 똑똑히 해라하는 나무람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걱정이 풀리신 모양이었다.

학교는 다시 좀 활기를 띠게 됐다. 생전 안내던 월사금도 가져오고 학부형회에서 거마비라고 돈도 얼마씩 선생들께 주는 것이었다.

만세이후 사이또오총독은 교육에서 공사립을 평등하게 대우한다고 했다. 그 댓가로 사립학교, 밋슌스쿨[1]에서도 모두 문교부 자격증을 가진 교사를 채용해야 한다는 지시가 내렸다. 그래서 숭실학교의 강봉우[2], 채필근[3], 두 분이 나이 사십인데도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는 중이었고 송창근 형도 그이들과 함께 있었다. 두 분 학비로 세 분이 공부한다고 들었다.

이 세 분은 나를 무척 아끼셨는데, 오래간만에 편지가 왔다. 그만큼 촌에서 일했으니 이제부터는 네 공부를 해야 하지 않느냐하는 내용이었다. 여비가 마련되는 대로 덮어 놓고 동경에 오라는 것이다. 다들 고학하는데 넌들 못하겠나했다.

여비를 만들려면 월급 주는 학교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마침 한 삽십리 떨어진 두만강 가 요색지인, 신아산 소학교에서 청빙이 왔다. 나는 당장 가기로 하고 그 뜻을 학부형들에게 알렸다. 학부형들 긴급회의가 소집되어 예산을 세운다. 월급을 얼막씩 드린다 하고 야단이다. 제발 번의하라고 졸른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나는 저쪽에 부임 날짜까지 통고했기에 어쩔 수 없다고 번의를 거부했다. 이제 한 육 개월만 더 가르치면 졸업될 학생 오륙 명은 내가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신아산 학교는 인가 맡은 사년제 소학교인데 사학년까지는 약 백명되는 학생을 교사 셋이서 복식으로 가르치게 돼 있었다. 내가 최고 학년을 맡았다. 설립자도 교장도 동네 노인 어른으로서 명예뿐이었다. 그래서 교장, 교사, 설립자 할 것 없이 실무는 내가 하고 늘상 그이들 댁에 들러 보고하고 의논도 하고 했다. 무조건 내 말 대로였다.

신아산서 여섯 달 있었다. 월급도 제대로고 부수입도 얼마 있었다. 거기는 요색지요 국경 보루니만큼 경찰서, 헌병대, 그리고 군대도 한 소대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간부, 헌병장교, 육군 장교들 중에서 조선어 학습 이 일어났다. 성적이 좋으면 수당금도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내게 조선어 강사 겸 시험관이 되어 달라고 했다. 거기서 적잖은 사례금이 나왔다.

신아산 여섯 달 동안 한의 겸 신의 대행하는 김용학 씨와 금융조합 서기로 있는 김낙현 씨를 가까운 친구로 사귀었다.

집에서는 아내를 신아산으로 보내왔다. 할 수 없이 김낙현 부부와 둘이서 두 살림 할 집을 세내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그 동안에 아내가 임신했다.

 

어떤 매서인(성경 행상) 노인이 신아산에서 주일 예배를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나는 학교 숙직실에서 내가 데리고 온 귀낙학교 졸업반 학생 오륙 명과 함께 예배를 봐오던 터였지만 학교에서 또 문제 될까봐 비밀에 부쳤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공개 예배소가 생겼으면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예배를 인도할만한 소양도 능력도 없었다. 몇 주일 후에 아주 사그러지고 말았다.

 

동경 갈 여비쯤은 됐다. 마침 히로시마중학교 사학년생인 김예근 군이 겨울방학에 웅기 어머니 집에 왔다가 나 있는 데까지 찾아왔다.

그는 나더러 일본에 동행하자고 권한다. 나는 신아산 살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학교에도, 공부를 이유로 사표를 냈다. 공부간다는 데 만류할 도리는 없었다. 나는 창꼴집에는 안들리기로 했다.

거치장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래면 신아산 떠나는 날 신아산 친구들이 송별회랍시고 하루밤 술잔치가 융성했다. 나는 끝없는 권주(勸酒)에 곤드러졌다. 새벽녘에사 집에 와 토하고 누웠다. 다음날 밤, 나는 아내에게 많은 말을 했다. 그 무렵에 나는 이광수의 무정, 유정등 소설을 읽었기에 거기 나오는 달콤한 용어들을 섞어가며 아내를 설득했다. 말주변 없는 나로서는 모름지기 걸작인 것 같기도 했다.

다음 날 아내는 뚱뚱해진 배를 안고 보따리를 꾸려 이고 둘이서 신아산을 떠났다. 아오지까지 같이 걸었다. 아오지 조금 지나 웅깃 길과 회암 길과의 갈림목에서, 나는 웅기로, 아내는 회암동 본가로 갈라졌다. 우리 서로 돌아보지도 말고 가자고 했다.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울상이 되어 아내는 걸었다.

얼마 안가서 길이 산모색이를 돌아, 서로 볼 수도 없다. 삼 년 만에 집에 와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여기까지라도 데리고 와서 마끼고 가도 갈게지 배부른 애게 짐을 이워 혼자 보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장모가 노발대발했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청산학원 졸업반 때 여름방학에 귀국하였는데 장모는 삼년 전 노여움을 터뜨리려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처남들이 가로막는 바람에 장모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머니는 뭘 그런 말씀 하시려는 거요? 매부께서 그런 것쯤 몰라서 그러셨겠소? 큰 일 앞에 두고 그래야 했길래 그랬을 텐데 어머님이 뭘 아신다고 그러세요? 아무 말씀 마시고 매부님 대접이나 기껏하세요!한다. 장모는 그래 내가 뭘 아니?하고 화제를 돌리셨다.

어쨌든, 나는 웅기에 갔다. 그날 밤부터 폭풍우 - 물결이 태산같고 배도 드나들지 못한다. 날마다 비만 퍼붓는다.

나는 여관집 골방에 혼자 앉아 서울서 발간하는 잡지들을 읽으며 우울했다.


[각주]

  1. 미션스쿨’(Mission School)을 말함
  2. 강봉우(姜鳳羽, 1888~1969) - 독립운동가, 교육자. 함남 함흥 출생. 1910년 항일합병이 되자 한만(韓滿) 국경을 수시로 드나들며 독립운동을 시작, 105인 사건으로 191210개월간 복역했다. 석방된 뒤 191310월에 동지들과 함께 간도 용정 영신학교를 설립, 19192월에는 국민회(國民會)의 파송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31독립선언서를 받아 가지고 원산ㆍ함흥에 들려 동지들에게 전하고, 용정에 귀환하여 313일 독립선언식을 주도했다. 이 독립선언식은 천주교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개최되었는데, 그 식을 주도한 국민회 회장은 구춘선(具春先, 장로), 대회부회장은 배형식(裵亨湜, 감리교 감리사), 선언문 낭독은 김영학(金永學)이 했다. 당시 독립선언서의 인쇄 책임을 맡은 강봉우는 명동마을에 잠복했다가 45일 일경에 피검, 함흥형무소로 이송,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이상 옥고를 치루었다. 석방된 뒤 일본에 건너가 1925년 토오쿄오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역사과를 졸업, 귀국하여 서울 배재중학교 교사(1925), 평양 숭실고보 교감(1925-37), 함흥 영생고보 교무주임(1937-39)이 되었고, 815 해방 뒤에는 전남 광주 서중고교 교장, 숭일중고교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청소년의 기독교교육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 교회직분은 장로. 1977년에는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추대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3. 채필근(蔡弼近, 1885~1973) - 장로교 목사, 신학자, 교육가. 1885916일 평남 중화군 동두면 설매리에서 채옹빈의 독자로 출생. 그의 부친은 유학자였으나 1898년 같은 설매리의 채정민이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고 그가 다시 채씨 문중에 전도하게 될 때 믿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소장하고 있던 역술서를 태우고 가족 전체를 이끌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고 어느 정도 유학에 미련을 두었던 채필근은 부친의 결정에 따라 마지못해 교회에 출석하다가 1899년 평양에서 길선주가 인도하는 사경회에 참석한 후 적극적인 교인이 되었고 그해 세례를 받았다. 그는 북장로회 리(G. Lee) 선교사에게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아 설매동교회에서 설립한 용산리교회 설교를 맡아 7년간 봉사하였다.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졸업(6)하였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이듬해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곳곳에서 결사대가 조직될 때 그는 여기에 참여하여 서울까지 올라와 전덕기 목사가 주도한 소위 대한문사건에 참가하기도 했다. 평양으로 돌아와 대성학교장 안창호의 지도를 받으며 숭실내에 청년학우회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민족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안창호가 해외로 망명하게 되자 결국 그도 학업을 중단한 채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가던 중 회령에 들러 그곳에 있던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 바커(朴傑) 및 김영제 목사의 호의에 의해 캐나다장로회 선교구역의 조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맡은 구역은 함북 경흥ㆍ경원ㆍ온성ㆍ종성ㆍ회령ㆍ부령 등지와 두만강 건너 시베리아 우수리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으로 함북에 13, 만주에 20처 교회를 순회하며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10년 동안 시무하면서 20여 곳에 교회를 세웠고 성경야학교도 설립, 운영하였다. 1913년부터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6년에는 경흥읍교회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1918년에 신학교를 졸업(11)하였다. 그해 함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경흥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2년간 시무하였다. 1920년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의 길이 열려 도일, 메이지학원 고등학부 문과(1923) 및 토오쿄오제국대학 문과(1925)를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토오쿄오 한국 YMCA 이사장을 역임했고 토오쿄오한인교회에서 설교했다. 졸업후 토오쿄오제국대학의 교수로 수차 초빙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귀국, 1년간 숭실중학교 강사로 있다가 1926년부터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문과 과장직도 겸임하게 되었다. 1934년 숭실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난관에 부딪치게 되고 마침 교회 내분으로 혼란에 빠진 장대현교회가 그를 초빙하게 되자 학교를 사임하고 목회 일선으로 복귀하였다. 장대현교회의 문제를 수습해 나가며 4년간 목회한 후 서울로 이주, 1938년 이화여자전문대학교 교수로 초빙받아 2년간 다시 강단에 섰다. 그동안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고 외국선교사들이 돌아가게 되면서 신학교육의 문이 닫히게 되자 그는 서울의 김영주, 차재명, 김대현, 함태영 등과 함께 조선신학원(현 한신대학) 설립운동을 벌여 19393월 조선신학원설립기성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그해 가을 승동교회에 최초의 한국인 설립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학교가 이듬해 4월 정식 개교하기 직전, 평양에서 평양신학교를 재건하고 그를 초청하게 되자 평양으로 가 19402월 평양 장로회신학교(후 평양신학교라고도 함)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해방되기까지 일제 말기 혼란중에 신학교를 지켜나갔으며 1943년에 종래의 장로교 총회가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재조직될 때 그는 초대 통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해방후 그는 신학교를 떠나 1946년부터 평양 창동교회 목사로 부임, 4년간 시무하였고 625사변 중 월남하여 제주도 서귀포의 피난민교회에서 목회하였고 1952년 부산 동광교회(현 서북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면서 동아대학 및 부산대학교 교수로도 봉직하였다. 1955년 부산장로회 신학교 교장에 취임, 6년간 봉직하였고 1962년 서울 동숭교회의 청빙을 받아 시무하면서 장로회신학대학, 서울여자대학 강사로도 나갔다. 대통령촉탁 고등고시위원(1952-60) 및 고등공무원교육원 강사(1963-66), 대한기독교서회 이사(1962-65), 숭실대학교 재단이사(1962-66)를 역임했으며 1966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는 산돌교회(예장 통합, 서울 소재)를 개척하여 계속 시무하였고 1973317일 별세하였다.
    그의 사상적 입장은 지나친 보수주의도 아니고 지나친 자유주의도 아닌 중도적 입장이었다. 1920년대 일본 및 한국에 사회주의 풍조가 거세게 일 때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론을 깊이있게 연구하여 기독교적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는 강의와 강연을 하였고 1935년 송창근ㆍ김재준ㆍ한경직 등과 함께 집필자로 참여한 신생사의 <<단권성경주석>>의 신학적 입장이 장로교 총회에서 문제되었을 때 그는 즉시 사과문을 낸 일도 있었다. 유족으로 부인(朴德惠)과의 사이에 2(義順, 義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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