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33) 동경 3년 - 순회강연

순회강연

 

나는 혼자서 순회강연을 떠났다. 겨울철이라 무슨 전쟁판 같았다. 경흥읍, 고읍, 웅상, 웅기 등 여러 교회를 역방하며 우리 또래 친구들과 사귀고 같이 기도하고 격려했다.

경흥읍교회[1]에서는 장장 세 시간 강연(?) 했는데 아마도 자기도 모르는 소리였을 것이다. 나를 극진히 사랑하시던 김태훈 장로님이 그렇게 오래 하는 거 아니야하고 끝나자 충고해 주셨다.

고 김영구 군 묘 앞에 낙엽송 심은 것은 이때였다.

고읍교회[2]에서는 청년회 주최로 강연회가 있었고 밤에는 다들 모여 밤을 샜.

두만강 가 이십 리에 뻗힌 버드나무 밀림 속 늑대 떼의 흉칙[3]스런 합창독창소리 때문에 잘래 잘 수도 없었다. 늑대의 언어는 아주 다양하다고 느꼈다.

웅상교회[4]에서도 집회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똑똑치 않다.

웅기교회[5]에서는 김창준 씨가 청년회장으로 때마침 금주 금연 대 데모를 한다고 나더러 금주 강연을 하라는 것이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 강연을 했다.[6] 나는 그때에도 금주 금연 같은 건 신자의 말단윤리여서 그렇게 떠들썩할 게 못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웅기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설교까지 나더러 하라고 한다. 설교는 큰 고역이었다. 나는 웅기 뒷산 송림 속에서 온종일 금식하고 기도했다. 그랬는데도 설교 후의 뒷맛은 개운치가 않았다.


[각주]

  1. 경흥읍교회 - 1910년 함북 경흥에 설립된 장로교회. 김계언(金桂彦)이 이주하여 전도한 결과 흥명(興明)학교 교장 김태훈(金泰勳)과 교사 김문협(金文協) 17인이 믿게 되어 흥명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1915년 선교사 스코트(W. Scott ; 徐高道), 목사 이두섭(李斗燮)ㆍ이정화(李正華)가 와서 사경회를 개최하였고, 1918년 채필근 목사가 부임하면서 부흥하였다. 그후 김관식(金觀植; 1921년 부임), 김유직(金有稷; 1922년 부임), 정기헌(鄭耆憲; 1923년 부임) 목사 등이 시무하였고 22년에는 포은동(浦恩洞) 교회를 개척하였다. 1940년 현재 장로로 안기진(安基珍; 1924년 장립), 김천현(金薦鉉; 1929년 장립), 김기정(金基楨; 1933년 장립), 김하진(金河珍; 1933년 장립) 등이 시무하였다. 이후 미상.
  2. 고읍교회 : 1907년 함북 경성(鏡城)에 설립된 장로교회. 이 교회는 본래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 소속으로 안순영(安順永)의 전도로 개인집에서 시작되었으나 장로교로 가입된 후 채필근 목사의 열심있는 전도로 교인수가 늘고 8간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기엔 선교사 박걸(朴傑), (A. F. Robb; 鄴亞力)을 비롯하여 채필근ㆍ김관식ㆍ정기헌 목사가 시무하였다. 깡패 최치수(崔致秀)가 회개하고 열심히 전도하여 교인이 더욱 증가하기도 하였다. 이후 미상.
  3. 흉칙 몹시 흉악함. 규범 표기는 흉측이다.
  4. 웅상교회(雄尙敎會) - 1909년 함북 경흥군 웅상동에 설립된 장로교회. 1921년 동사목사 정기현(鄭耆鉉)과 선교사 베시(F.G. Vesey ; 芮詩)가 시무하였고 1940년 당시에는 목사 이재면(李載冕)과 장로 송원규(宋元奎, 1928년 장립), 안영진(安榮鎭, 1938년 장립) 등이 시무하였다.
  5. 웅기중앙교회(雄基中央敎會) - 1915년 함북 경흥군 웅기읍 상본정에 설립된 장로교회. 웅기읍교회로도 불렸다. 1918년 동사목사 채필근과 선교사 맥도널드(D. A. McDonald ; 梅道捺), 1921년 동사목사 김관식과 선교사 베시(F.G. Vesey ; 芮詩), 1922년 동사목사 이성국(李成國)과 선교사 베시가 각각 시무하였다. 1922년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며 1923년 당시에는 개인전도에 힘써 장로 문병호(文秉浩)가 여전도인의 봉급을 부담하였다. 그후 1940년 당시에 목사 조승제(趙昇濟)와 장로 홍재우(洪在祐, 1919년 장립), 문병호(1922년 장립), 김도연(金道淵, 1926년 장립), 박봉항(朴鳳恒, 1926년 장립), 이경준(李景俊, 1931년 장립) 등이 시무하였다.
  6. 기독신보888(1932127) 기사를 보면, 웅기면려회 소식으로 禁酒宣傳大行進”(금주선전대행진)이라는 제목으로 “1120일부터 22일까지 리호빈 목사와 김재준 선생의 금주설교에 청중들은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기사를 고려하면 아오야마 유학 시절이 아니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직후에 있었던 강연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범용기가 장공의 기억에 의존한 기억이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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