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38) 동경 3년 - 한국 학생들

한국 학생들

 

박원혁 씨는 이미 언급한대로 연통제 사건에 걸려 육개월 징역한 분으로서 언행이 청백(淸白) 그것이었으나 몸은 완강한 축이 아니었고 졸업 후에 함흥 영생 여학교[1]에서 교사 겸 교목으로 있다가 T.B.[2]40대에 세상을 떠났.

 

시인 김동명[3] 씨와 나와는 동기 동창이어서 삼년을 같이 있었다. 그는 신학에는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학비는 31운동 때, 학생대표로 주동자였던 덕원의 강기덕[4] 씨가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신학공부에 국한돼 있었기에 억지춘향을 연출한 것뿐이다.

그는 야간부 일본대학 철학과에 등록하고 거기에는 열심이었다. 구변이 좋아서 변론에는 한정이 없었고 시인이라 자기를 속이지는 못하는 성정이었다.

그 때에도 시인으로서는 이미 알려져 있었고 시가 창작되면 내 앞에서 낭송하고 평을 청하곤 했다. 은근히 칭찬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졸업까지 하고 얼마 전도사일도 봤지만 함흥 영생중학교 교사로 오래 있었다. 일제 말에는 붓을 꺾고 시작(詩作)을 폐했다. 해방이 되자 막혔던 폭포같이 시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새 시집이 꼬리 물고 나온다. 동아일보에 정치 사회평론이 연재되어 장안의 종이 값을 올렸다. 서울서 참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마감역에는 이화대학 교수로 있다가 작고했다. 약한 몸에 술이 과했던 것이.

그는 이북에서 단신으로 어렵게 탈출했다. 시고(詩稿)는 후에 월남한 부인이 몰래 몸에 갖고 나와서 햇빛을 본 것이다. 월남해서는 우리 집 객실에 유숙하면서 한국신학에서 한국문학 강의도 했다.

 

최석주 씨는 일본 자유감리교신학에서 공부하다가 내 2학년 때 청산학원 3학년에 전입 일년 만에 졸업했다. 서울 태생의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어느 학생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청산의 자유를 감사한다. 역시 학원은 자유여야 한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자유에서 창조작업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졸업하고 그 당시 학장대리였던 아이글하트박사 댁에서 Fare well Party가 있었다. 졸업 후 포부를 피력할 때 나는 어쩌면 금년 내로 태평양을 건널지 모르겠다고 했다. 계획된 것도 진행된 것도 아닌 엉터리 예언이었지만 그게 그대로 됐다는 게 내게는 기적같은 선물이었다.


[각주]

  1. 영생학교(永生學校) - 1903년 함남 함흥에 설립된 장로교계 영생여학교와 1907년 역시 동() 지역에 설립된 남자 영생학교의 통칭. 이들 학교는 관북지방 최초의 신교육기관으로 창설자는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사 맥레(D. M. MacRae)의 부인인 서더랜드(E. F. Sutherland ; 馬義大)와 여선교사 매컬리(L. H. McCully) 등이다. 두 학교는 같은 캐나다 출신 두 사람의 여선교사에 의해 비롯되어 여학교는 191012, 남학교는 1910813일 각각 대한제국 학부대신 명의의 정식인가를 취득하였다. 이를 학교는 처음에 한 학교 남녀공학으로 개교하려 하였으나 당시의 인습상 많은 어려움이 수반되므로 각기 별개의 학교가 되었다.
  2. 결핵(Tuberculosis)
  3. 김동명(金東鳴, 1900~1968) - 기독교인. 시인. 정치평론가.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에서 출생. 9세때 일가가 원산으로 이주하여 원산에서 소학교를 마쳤다. 이어 1920년 함흥 영생중학을 졸업하고 흥남과 강서 등지에서 소학교 교원을 지냈다. 1922년부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고 개벽지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 <나는 보고 섰노라>, <애닮은 기억> 등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1925년 유학차 일본에 건너갔고 이듬해 지정덕(池貞德)과 결혼하였다. 또한 어릴 때부터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으며 1928년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졸업했다. 1930년에 처녀시집 <<나의 거문고>>, 1938년에 제2시집 <<파초>>(芭蕉)를 출간했ek. 1937년에 아내를 잃었고, 1940년부터 상업계로 나서 미곡ㆍ목재ㆍ시탄(柴炭) 등의 장사에 손을 대었다. 1942년 이복순(李福順)과 재혼한 그는 해방될 때까지 절필했으며 해방 후에는 흥남시 자치위원회 위원장, 흥남중학교장 등을 역임했고 정치에 관여하여 조선민주당 함남도당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공산치하를 피해 1947년 월남하여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하는 한편 1960년 참의원을 지냈다. 월남 이후 그의 시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현실적 관심을 진하게 반영하였고 이에 따라 순수문학 작품보다는 비평이나 평론쪽에 집중적인 저술활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625사변 당시 부산 피난시절에는 김도연 등과 함께 소()평론지 <자유평론>을 발간하였고 이때부터 주로 정치 평론에 주력하여 예리한 평론가로 알려졌으며, 그후 그의 시사적 평론은 대부분 동아일보를 통해 발표되었다. 한편 기독교에의 관심과 교회활동도 계속하여 해방 후에는 경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특히 김재준 박사와 교분이 두터워 경동교회에 처남 지갑섭(池甲燮)과 함께 출석했다. 그는 신학을 수학했으며, 남다른 신앙의 내면을 통해 그의 문학과 사회적 윤리 가치관이 형성되고 유지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4. 강기덕(康基德, 1886~?) - 독립운동가, 함남 덕원(德源)출신. 31운동 당시 보성전문학교 학생으로 보성전문학생 대표 김문진(金文珍)을 통하여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문 1,500장을 받아 각 학교에 배부하고 만세 시위 군중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16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1919128일에 YMCA 간사 박희도(朴熙度),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金元壁) 등과 경성 대관원(大觀園)에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을 모의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월남하여 초대 함경남도지사 건국대학교 초대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때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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