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일 화요일

[범용기 제1권] (5) 어릴 때 추억 - 몇 가지 토막 이야기

몇 가지 토막 이야기

 

力士(역사)이야기

 

아버님 소년 시절에 친히 뵙고 따르시던 분이라니까 아마 조부님 시절에 사신 분이었을 것이다. 김선달로 불리우는 힘센 분이 우리 집안에 계셨다고 한다. 가히 역발산(力拔山)이랄 수 있는 분이었다고 아버님은 말씀하신다.

그는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무렵에는 호랑이가 득실거렸는데 그는 호랑이 목덜미를 잡아 거꾸로 물항아리에 박아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몹시 가난했다. 그런데 동네에 소위 흉가라고 딱지 붙은 큰 기와집이 헐값에 팔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는 당장 샀다. 흉가였나 하였더니 부뚜막 안에 뱀 굴이 있어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그는 뱀 구멍 가에 뱀 먹이를 소담지게 차려놓고 뱀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닌 게 아니라 꼬마 뱀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두들겨 잡는다. 차츰 큰 놈들이 나온다. 그 놈들도 도끼로 대가리를 까면 죽는다. 왕초가 나온다. 어미 뱀인 모양인데 길이가 두 발이나 되고 둘레가 서까래만한 놈이다. 그는 도끼로 머리를 때리고 밧줄로 올가미질해서 잡아 당겼지만 몹시 힘들여서야 빼냈다. 맨 나중에는 아비 뱀이 머리를 내민다. 대가리에 소고삐 올개미각주1)를 걸어 당겼지만 움직도 않는다. 올개미 밧줄을 우차에 비끌어 매고 소를 메워 끌었다. 빠져나온 놈을 두들겨 잡았다. 큰 뱀, 작은 뱀, 한 짐 가득 우차에 실어 키들이 웅덩이에 묻고 뱀무덤이란 비석을 세워 주었다. 그래서 그 집 뱀이 소탕되고 살기 좋은 열간 기와집이 헐값에 생겼다는 것이다. 그는 새벽같이 김매러 간다. 부인이 아침 점심을 날라다 드린다. 보통 식기 두 곱쯤 되는 분량을 단번에 훌떡 삼켜버린다. 하루는 부인이 한 말 밥을 나무 함박에 담아다 드렸다. 앉은 자리에서 다 자시고 한잠 낮잠 자다 일어났다. 난생 처음 배불리 먹었소하며 부인에게 치사했다. 그 전에 것은 십 분지 일도 못 되는 분량이었는데 얼마나 시장하셨을까하고 부인이 눈물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 아이 때에도 우리 집안에 무갑이라는 이름의 역사(力士)가 있었는데 단오철이면 강가 여섯 고을 씨름판을 찾아다니며 간 데마다 소를 타다가 한 밑천 번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도 자주 들리곤 했는데 몸이 장대하고 어깨가 짝 벌어지고 허리는 가늘고 엉덩이는 떡판 같이 크고 두 다리는 기둥처럼 굵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김선달무갑따위가 아니었다고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다섯 살 때 토막 기억

 

내 다섯 살 때 일로전쟁이 있었다. 러샤 패잔병들이 동네 장정들을 우리 집에 모여 놓고 무언가 공갈치고 있었다. 여자들은 윗방에 모여 서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 가슴에 안겨 무섭지가 않았다. 후에 안 일이었지만 러샤 병정들은 동네 장정들을 징용하여 군수품을 운반시키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튿날 일본 군함이 웅기를 포격하고 해병대가 상륙하는 바람에 러샤 군대는 허둥지둥 강 건너로 도망치고 군수품 남은 것들은 동네 사람들이 많이 나누어 가졌다. 길다란 군인 외투 삽개각주2), 흘레발이(), 고삭개 술, 군용탄재(블랭캣) 등속이 집집마다 감춰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깨끗하게 없었다.

며칠 후에 나는 아버님과 집 앞 언덕 위에 나란히 앉아 일본 군대가 줄지어 발마춰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 신기해서 오래 오래 보고 싶었다. 그때 일본 군대는 깔끔해서 어디서나 민폐끼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들었다.

나는 다섯 살 때 아버님이 손수 붓글씨로서 써 주신 천자또는 백수문을 외웠다. 읽었다기보다도 앵무새처럼 외운 것이다. 다 떼고서 통강까지 했다.

다음에는 동몽선습을 가르치신다. 천자문을 졸졸 외우는 게 귀여워서 자꾸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각주]

  1. 올개미 - ‘올가미의 방언
  2. 삽개 - ‘모자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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