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28)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운동 - 한일 굴욕 외교 반대 운동

한일 굴욕 외교 반대 운동

 

19656박 정권은 미국의 사주에 따라 급속도로 일본에 접근한다.

김종필이 몰래 가고 오고 하면서 오오히라’(太平)[1]와 저두외교(低頭外交)[2]를 벌인다고 한다. 그래서 소위 한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이 학원과 민간에서 날마다 격화되어 갔다.

196571일이었던가, 시내 각 교파를 망라한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영락교회 안에 모여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한경직, 김재준, 이태준[3] 등 불과 6, 7명이 모였었으나 차츰 그 수가 불어 시내 각 교파 교직자로서 가담하지 않는 분은 거의 없었다.

신학적인 차이나, 세대차, 교파별 등도 문제되지 않았다.

수백 명의 목사, 전도사, 문인, 재향군인, 장교 등 각계각층이 일체화했다. 회의진행 절차도 없었다. 다들 모여 오순도순 얘기하다 보면 제절로 합의되곤 했다.

결국 성명서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국회의장, 일본정부, 일본국회, 일본교회, 미국대통령, 국제연합본부 등등에 보낼 공개 서한들을 기초할 위원회가 지명되어 김재준 책임하에 모든 문서가 작성되었고 그것이 검토 채택되었다.

 

그리고 마감으로 영락교회에서의 공식예배 설교시간에 대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집회허가 없이 강연하려면 교회의 기도회나 예배 형식을 취할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집회는 초만원이었다. 연사는 한경직과 나였는데 한경직은 예배 설교에서, 나는 특별 강연에서 우리의 반대 이유를 밝히려 한 것이었다.

 

성명서에서 우리는 한일 국교 정상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화 이전에 우리의 태도와 각오와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넘치는 저수지 물이 출구를 찾는 것과 같은 일본 자본이 한국에 범람하는 경우에 한국은 일본 자본의 수몰지대’(水沒地帶)로 화할 우려가 크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는 정상화 이전에 강한 견제력을 가진 외자도입법과 관리법을 제정해야 한다.

일제 36년간의 한국 착취와 병탐에 대한 사과의 배상과 금후 행동에 대한 다짐을 받고서 회담을 개시해야 한다.

강력한 독립정신으로 국산 장려와 국가 이익 보호의 국민운동을 전개하도록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 등등을 제안했던 것이다.

 

일본 교회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가 침략자의 위치에서 돌이켜 모든 인간의 자유 평등 선린(善隣)[4]의 정부로 될 수 있게 제언, 편달, 투쟁해 줄 것을 호소했다.

내 강연에서 강조한 것은 일본이 일로전쟁[5] 이전에, 39도선으로 한반도를 분단하여 러시아와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사실과 러시아가 이에 불응하자 일로전쟁 준비에 광분했던 사실을 말하고 다음으로 일본은 지금도 침략 야심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 군사, 정치, 경제의 순차적 지배라는 종전의 순서를 경제, 정치, 군사의 역순서로 진행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금후의 한국은 미국 자본 아래 있는 중남미와 비슷하게 그보다도 더 나쁘게, 일본 경제 침략의 제물이 될 공산이 크다고 경보[6]했다.

 

그날 밤 한경직의 설교는 대일 감정의 노골적인 폭발이랄 수 있는 웅변이었다.

그는 만 명 가까운 청중을 울리며 매혹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냉소적이었고 김종필은 태평(오오히라)과의 비밀회담을 급속도로 성숙시켜, 일본의 사과(謝過)는커녕, 제발 국교를 열어주십사고 애걸복걸하는 태도로 나왔다고 한다. ‘고조오’(小僧) 같이 냉대를 받으면서 빌붙었다는 것으로 굴욕 외교딱지가 붙은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을 자기들의 지방정부정도로 아는 모양이었다.

우리 반대 운동에 동참했던 소장 목사들 중의 일부는 계속 따로 모여 가두 데모에도 수차 나섰기 때문에 연행도 되었었고, 그 후에 정치 교수또는 정치 목사로 딱지 붙어, 문교부로부터 파직 선고를 받게 된 교수도 있었다. 한국신학대학의 전경연[7] 박사 같은 이가 그 일례였다.

 

학생들의 데모는 치열했고, 경찰과의 투석전도 빈번했다.

 

어느 날 박정희는 청량리 쪽으로 가는 도중 사범대학 앞을 지나게 됐다. 그때는 사범대학 학생들과 경찰과의 승갱이[8]가 최고도에 치솟은 순간이었다. 경찰의 최루탄 공세와 학생들의 투석 항거가 격전장을 연상케 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학생들의 돌멩이가 우연하게도 박 대통령의 찦차 옆구리를 때리게 됐었다 한다. 발작적인 박 대통령은 다짜고짜 찦차에서 뛰어내려 교정으로 달려간다. 대통령 각하가 들어오신다는 급보에 교장 이하 모든 직원이 뛰어나가 환영 대열에 차렷했다.

교장이 경례를 붙이자, “이 자식 네가 교장이냐?” 하는 금속성 욕설과 함께 각하의 손은 교장의 뺨을 호되게 갈겼다.

이것은 한 교사의 목격담이다.

그리고서 그는 혼잣말 같이 학생놈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하며 이를 악물더라는 것이다.

그 후에 생긴 소위 사립학교 법안[9]이란 것은 이런 그의 복수심에서 안출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각주]

  1. 오히라 마사요시(大平 正芳, 1910~1980) - 일본의 정치가이며 제68, 69대 내각총리대신(1978.12.7~1980.6.12)을 지냈다. 1962년 외무대신으로 재직할 당시 한국과의 국교 수립 교섭과정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두 차례 회담을 통해 대일청구권과 관련해서 김종필ㆍ오히라 메모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회담 타결의 돌파구를 찾아내기도 하였다.
  2. 저두외교(低頭外交) - 머리를 낮게 숙이는 외교
  3. 이태준(李泰俊, 1893~1972) - 장로교 목사, 교육가. 호는 일송(一松). 평남 평원군 공덕면 양수리에서 이승각의 아들로 출생. 7세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때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만에 졸업하였다. 1909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으며 계속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그해 5월 간도 용정에 있던 캐나다 선교사 푸트(Foote; 富斗一)의 초청을 받아 간도 용정으로 가서 2년 동안 시골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하는 한편 용정청년회 회장, 동아일보 지국장을 역임하였다. 191931운동 때에 교회 청년들과 용정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202월 그는 푸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은진중학교를 설립하였고 자신은 교무주임이 되어 민족교육에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 19203월 은진중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될 때에 그도 연행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해 용정중앙교회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1921년에는 동산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은진중학교에서 교육에 종사한 지 10년째 되던 19294월 휴가를 얻어 일본에 건너가 칸사이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여 2년간 신학을 수학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그해 5월 동만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용정중앙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은진중학교 교무일을 계속 맡게 되었다. 1935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여 모든 것을 사임하고 인쇄업에 종사한 일도 있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자 당시 캐나다선교회 회장 스코트(Scott)는 그에게 은진중학교 인수를 요청하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만주국의 설립과 함께 학교를 만주국 정부에 몰수당하였다.
  4. 815해방이 되자 학교를 되찾아 잠시 운영하였으나 19464월 또다시 중공군에게 몰수당하고 말았다. 공산당의 압력이 점차 가중되자 결국 1946년 귀국, 월남하였다. 월남후 서울에 상도동교회를 설립하였고 1948년 돈암동에 미암(美岩)교회를 개척, 별세하기까지 이곳에서 무보수로 봉직하였다. 교회 목회와 함께 기독교연합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대한성서공회 위원장(196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위원, 기독교교육협회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이외에 경기노회장(1959), 총회협동사업책임위원(1959),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위원장(1968), 숭의여자중ㆍ고등학교 이사(1950), 숭실고등학교 이사장(1961), 총회신학교 이사, 대한신학교 이사, 외지선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14월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긴 투병생활을 하다가 197211일 별세하였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이태준 목사의 설교집인 무너지는 담 1972의 서문에서 사회와 교회에서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대륙의 거탑(巨塔)”같은 분이라고 기리고 있다. 유족으로 부인 박봉영 권사와 18녀가 있는데 아들 성돈(盛暾)은 장로가 되었다.
  5. 선린(善隣) - 이웃이나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
  6. 러일전쟁(1904~1905)
  7. 경보(警報) - 급작스러운 사고나 재해 따위가 예상도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대비를 하도록 미리 알리는 일
  8. 전경연(全景淵, 1916~2004) - 함남 함흥 출신. 니혼신학대를 거쳐 미국 보스턴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한국신학대와 중앙신학대 교수를 거쳐 한신대 교수로 재직했다.
  9. 승갱이 - ‘승강이’(서로 자기주장을 고집하여 옥신각신하며 다툼)의 방언
  10. 박정희 정권은 19638월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와 감독을 위해 사립학교법을 제정했다. 시간적으로 한일회담 반대 데모와는 상관없는 데모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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