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39) 잠시 “런던” 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 - 박형규와 그 그룹

박형규와 그 그룹

 

내가 삼선개헌 반대에 나섰을 때, 박형규는 신동아엔가 () 목사의 비장한 사회참여 결단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던 것 같은데 사실인즉 비장할 것도 결단이랄 것도, ‘사회참여랄 것도 없는 것이었다. 목사로서 최소한의 증언을 남겼다면 남긴 것뿐이다.

나는 사실, 한국 교회도 “No!”라고 증언해 주기를 바랐다. 내가 런던 간 동안에 장준하가 나를 대신해서 내 이름으로 여러 번 교회에 격문을 보냈었다는 데 그야말로 광야에 외치는 소리랄까 메아리가 없었다 한다. 뒤늦게 N.C.C.에서 짧은 성명이 나왔었다고 들었다.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 하는 것이 교회 지도자들의 거의 일치된 대답이었다.

나는 말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하룬들 살 수 있느냐?”, “정부에서 하는 대로 하는 친여적인 행태는 정치가 아니고 정부의 잘못을 충고하는 것만이 정치 관여냐?”.

 

김 목사(나를 의미한다)가 이번에 정치인과 관계없이 순 교회 지도자로서 교회에 호소했었다면 우리도 다 따라나섰을 거요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진짜 그랬더라면 그들은 목사 내놓고 정치에 나서라고 대들었을 것이 아닐까?

“‘삼선개헌반대운동은 범국민투쟁위원회로 발족했고 정치인들이 많이 참여했지만, 그들은 정치인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다. ‘국민으로 참여한 것이다. ‘헌법은 국민이 자기들 주권을 수호할 유일한 근거기 때문에 그걸 양보 또는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주권의 양보 또는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운운했다.

이 말은 3선개헌반대 위원회 발대식 때 이병린[1] 변호사가 연설한 내용의 한 구절인데 나도 목사들에게 같은 말로 설명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투쟁위원회란 이름에서 투쟁이란 단어가 기독교인의 성미에 거슬린다고도 했다.

의를 위한 투쟁을 회피했다면 예수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대답했다. 예수님도 세상에 싸움을 일으키러 왔노라 하지 않았는가? 하고 나는 항변했다.

나는 3선개헌 반대 발기인 명단에 박형규와 신애균 여사를 기입했다. 박형규는 그 당시 기독교사상편집책임자로 있었는데 기독교서회 김춘배 총무의 비위에 거슬린다고 이름 내기를 꺼려했다. 신애균 여사도 가정사정상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오라, 가라하지 않을테니 이름만 빌리라고 했다.

뱃장세기로 이름난 이태준() 목사도 처음에는 아주 적극적이었는데 중도에서 이름을 뺐다.

김대권인가 하는 사위님이 청와대 검찰담당관으로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박형규는 기독교사상8월호였던가를 ‘3선개헌 반대 특집호로 편집, 김춘배 총무의 인허 없이 돌격 간행, 비밀 배부에 성공했다. 한 획기적인 Document였다고 본다. 거기에 나와의 인터뷰 기록이 자세하게 게재되있다. 이 책은 곧 발매금지로 압수됐지만 퍼질 대로 퍼진 후였다.

 

하루는 박형규가 어느 치벽한 다방에서 자기의 숨은 동지들을 내게 소개했다. 이문영[2], 서광선[3], 현영학[4], 이극찬(?), 홍동근[5] 등등이 아니었던가 싶다.

 

행정학 박사로 고대 교수인 이문영은 “3선개헌이 통과되면 국민은 할 일을 다 뺏긴다고 했다. 한 사람이 나라의 대소사를 혼자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할 일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박정희가 독재자로 군림할 것과 민주분권제도가 사멸할 것을 암시한 말이라 하겠다.

 

이분들이 후일에 3동인이 되어 4년을 하루같이 집필했던 것이다.


[각주]

  1. 이병린(李丙璘, 1911~1986) - 호는 심당(心堂). 경기도 양평 출생.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서울매동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재직하다가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190년에 경찰조직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315 부정선거 후에 일어난 마산소요사태의 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정희 정권 때 3선개헌 반대, 유신헌법철폐를 위해 활동하였다. 1970년 군사정권을 비판한 당시 <오적> 필화사건의 시인 김지하와 윤보선 전 대통령과 강신옥 변호사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등에서 변론을 맡았다.
  2. 이문영(李文永, 1927~2014) - 호는 소정(小丁). 서울 출생.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31 민주구국선언, YH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고려대 교수직을 세 번 해직당했으며 모두 4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2008년 자서전에서, ‘유진오 총장에 대한 평가에서 일제 학병 출정을 독려한 친일파보다 전두환의 국정을 자문한 사람이기에 더 나쁘다고 회고했다.
  3. 서광선(徐洸善) - 1931년 평안북도 강계 출생. 한국전쟁 당시에 아버지 서용문 목사는 공산군에게 총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간 그는 해군에 입대하였다(당시 사귄 친구 중에 민경배 교수가 있다). 그곳에서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어 몬타나 주의 로키마운틴 대학과 일리노이 주립대학원에서 공부를 하였다. 함선영 사모와의 만남 이후에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이화여대 교단에 서게 되었고, 유니온신학교에서 사귄 박형규 목사를 통해서 김재준 목사를 만나게 되고 <3>이란 동인지에 관여하게 되었다.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 해직교수가 되면서 장로회신학대학에서 학과목을 이수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4. 현영학(玄永學, 1921~2001) - 함경남도 함흥 출생. 목사 현원국과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신애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윤치호의 여섯째 딸 윤보희와 결혼했다. 1938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간사이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광복 이후에 이화여전 강사,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7년 미국 유학 성서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49년 유니언신학교에서 니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55년 이화여대 신학과 교수로 복귀하였고, 박정희 군정 연장에도 반대하였다. 1970년대에는 서남동, 안병무와 함께 민중신학 운동을 주관하였다.
  5. 홍동근(1926~2001) - 평양 출생. 한국전쟁 중 월남하였고 북의 평양신학교, 남의 장로회신학교를 거쳐 미국의 뉴욕신학교와 풀러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서울 영락교회와 동신교회에서 부교역자로 목회하다가 일본 경로한인교회를 섬기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0년대 미국으로 이민하여 목회활동을 하다가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을 왕래하면 통일운동을 벌였고, 1989년부터 미국과 평양을 오가며 김일성대학에서 기독교를 가르쳤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