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9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67) 환도와 재건 1953~1958 - 순강(巡講) 행각

순강(巡講) 행각

 

공자님처럼 주유천하[1]는 못할망정, 전반적인 순회강연이 필요하게 됐다. 정통주의자들의 음성적인 허위선전을 양성적인 진실로 격파해야 한다. 예수도 바리새 교인들과의 변론을 회피하지 않았다.

경상도에는 해병대와 같은 돌격 상륙이 필요하다. 전라도와 충청도는 그 분위기와 대세가 개혁운동의 기류에 덮여 있기는 했지만 신학적인 이론 체계가 결핍했다. 한신 졸업 목사님들의 응원도 해야 할 판이었다. 전라도에는 김세열, 이남규, 조승제[2] 등 원로급 목사들이 있어서 맘 든든했다. 교회마다 대 환영이다. 남장로 선교사들과 그들의 추종자 또는 동조자들이 방해했지만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군산에는 한신 졸업생으로서 큰 교회 맡은 사람이 많았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시기까지 보류한다는 신중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중에서 김영천 장로가 선봉장으로 나섰다. 그 당시에는 집사였다.

성명서도 내고 그룹도 만들었다. 상당히 오랜 후일에사 우리 졸업생들이 개혁 운동에 인테그레잇할 수 있었다. ‘허헌’(?) 장로는 최태용[3] 계열이었으나 우리 켠 거물급이었고 최태용 씨 계열도 동조했다.

이규갑 씨도 열심당이었다. 전주에서의 연합강연회는 서정태 목사 교회당 안과 바깥 앞마당이 차고 넘치는 성황이었다. 서울 성암교회 안병부 목사가 찬조강연으로 웅변을 토했다. 그는 동경 법정대학 정경과 정규 졸업생으로서 식견도 있고 말솜씨도 웅변이었다.

나를 소개하는 장로가 말했다. “김재준 교수를 악평하는 분들이 하도 극성을 부리길래 우리는 머리에 뿔이 돋힌 어마어마한 괴물(怪物)인줄 알았었는데 정작 만나보니 작고, 얌전하고, 약한 시골 소학교 선생같다.”

어쨌든 강연은 성공적이었다.

 

대구에서는 우리 졸업생 예종도[4] 목사 교회에서 강연하기로 돼 있었다. 그리로 갔다. 예종도는 강단 모새기 마루에 앉아 있고 어떤 장로가 사회했다. 설교 시간에 강단에 올라가 앉았다. 그때까지도 말썽이 없었다. 일어서서 강대상에 나가려 할 순간, 사회하는 장로가 나를 끌어 강대상 아래로 밀어제친다. 그리고 자기가 설교한다.

 

나는 그야말로 얌전하게순해빠진 같이 앉아 예배했다. 그날 밤, 내 여관에 두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 교회에 출석하는 대구대학 교수라고 한다.

오늘 김 목사님이 그 장로에게 항거하셨더라면 그 교회는 난장판이 됐을 것입니다. 그 장로님은 김 목사님을 욕보이려고 그런 비례’(非禮)[5]를 의식적으로 감행한 것입니다. 우리는 김 목사님이 참으시는 걸 보고 안심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싸우렵니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대구에는 박재석이라는 거물급 목사가 있었다. 그는 익살꾼이랄까, 재담[6]과 농담이 샘솟듯 한다. 남의 얘기같이 구슬려 간다. 다 듣고 나면 제자랑이다. 그 분이 대구에서의 우리 켠 주장(主將)이다. 이쪽 저쪽에서 소진[7], ‘장의[8]처럼 종횡(縱橫)[9]한다.

내가 지방 교회를 방문할 때면 꼭 따라 나선다. 심심찮게 인심을 어루만지고 주무른다.

 

경주는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나와의 절교를 선언하고서 목사가 된 우리 졸업생이 교회를 맡고 있었다. 강연에 교회당을 빌려주지 않는다. 거기서도 평신도와 장로들 가운데는 열린 마음가진 이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소학교 강당을 빌렸다.

그래서 우리는 경주에 상륙했다. 씨는 뿌려진 셈이었다.

충남 서천, 삼례 등지에도 들렀다. 대전 수원도 역방했다. 광주에서는 백영흠[10] 목사의 독립교회전방기지. ‘여수교회는 김재석[11] 목사 부부와 부모님이 모두 우리 한신졸업생이니만큼 문제가 없었다. 목포에는 이남규, 조승제, 장하원[12] 등이 있고 이해동[13]도 있었기에 순조로웠다.

 

수원서도 그런대로 강연할 수 있었고 대전은 어려웠으나 소규모의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탈환됐다.


[각주]

  1. 주유천하(周遊天下) - 천하 각지를 주루 돌아다니며 구경함. 별 소득 없이 떠돌아다님
  2. 조승제(趙昇濟, 1898~1971) - 한국의 장로교 목사이다. 호는 춘우(春雨). 경남 사천 출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후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과 한국신학대학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39~194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의록 서기를 지냈고, 이후 일본 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총회 의장과 전남교구장을 겸임했다. 1961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46회 총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3. 최태용(崔泰瑢, 1897~1950) - 호는 시남(是南). 함경남도 영흥 출신. 청년기에 수원농림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연희전문을 거쳐 1920년 일본 동경영어학교에서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內村鑑三)에세 가사하면서 성서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때 김교신과 함석헌 등과 함께 하였다. 1924년 귀국, 1925년에 천래지성이라는 개인잡지를 발간하면서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쇄신을 외쳤다. 1928년 메이지학원대학 신학부 유학하고 1932년에 귀국, 1935년에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창립하였다. 광복 이후 신생회를 조직하였고, 1947년에는 독립촉성국민회의의 총무를 맡기도 하였다. 정부 수립 후에는 농민회 부회장, 국민훈련원 원장으로 농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5091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4. 예종도 목사는 194212월 조선신학교 제2회 졸업생이다. 그의 셋째 아들은 예태해 목사이다(예태해 목사는 예장 통합측에서 이단 시비가 있었으나 2004년 제89회 총회에서 이단이 아니라고 결정하였다).
  5. 비례(非禮) - 예의가 아님
  6. 재담(才談) - 익살을 부리며 재치있게 이야기함
  7. 소진(蘇秦) - 고대 중국 전국시대 중엽의 정치가. 강국 진나라에 대적하기 위해 나머지 6국이 연합하는 합종설을 주장하였다.
  8. 장의(張儀, BC ?~309) -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의 모사. 소진의 주선으로 진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혜문왕 때 재상이 되었다. 연횡책을 주창하면서, 위ㆍ조ㆍ한나라 등 동서로 잇닿는 6국을 설득, 진니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다.
  9. 종횡(縱橫) - 가로와 세로를 한데 이르는 말, 거침없이 마구 오가거나 이리저리 다님
  10. 백영흠(白永欽, 1904~1986) - 경기도 인천 출생으로 영명중학, 일본대학 사회학과를 거쳐서,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등으로 고초를 당하였다. 해방 후에 최흥종 목사와 함께 광주 YMCA 재건에 힘썼다. 1946년 일본 교회였던 적산가옥을 인수하여 동부교회를 설립하고 1978년까지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그때 동부교회는 독립교회였다). ‘동광원의 지도자 이현필과는 동서간이다. 김필례 교장을 이어서 수피아 여중고의 교장을 역임하였다(1947~1948). 1980518시에 죽음의 행진에 참가하였으며, 1986년 별세하여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11. 김재석 목사는 1953년 당시 광주양림교회 당회장이었다. 1952년 제37회 총회장으로 피선된 김재석 목사(1900~1959, 광주제일교회)와는 다른 인물이다.
  12. 장하원(1912~1992) - 충남 서천 출신. 1927년에 세례를 받고, 1932년에는 노회 구역 순회전도사가 되어 남포, 웅천, 서천, 장항, 옥산 등 15처 교회를 10여년 간 순회 시무하였다. 19427월에 경기노회에서 목사로 임직되어 송파, 세곡, 둔전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안수를 받은 이후 신학교를 졸업(194212월 제2회 졸업)한 것이다. 다시 군산노회로 옮겨 지방 순회 목사로 남내, 이곡, 성덕, 서포, 나포, 웅포, 서수, 임피, 술산 등 15처 교회를 시무하며 일제 말기의 어려운 시기로부터 해방 초기까지 보냈다. 그의 지방 순회 목회는 교파 분립의 혼란기에 기장 군산노회의 지반을 굳히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신황등교회를 4년간 시무하였으며, 1951년에 노회장을 역임하였고, 군산 금성교회로 전임하였다. 38회 총회 당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1963년 제48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그후 목호 전남지역으로 무대를 옮겨, 목포남부, 양동, 광주양림교회를 시무하였고, 목포노회장(1959), 전남노회장(1960, 62, 66)을 역임하였다. 한국기독교연합봉사회 총무(1967~1972), 목포 영흥중고등학교장(1972~1980)을 역임하였다.
  13. 시기적으로 이해동 목사가 아니라 이해영 목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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