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9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69) 경동교회의 재건 - “경동교회”로 노회가입

경동교회로 노회가입

 

야고보교회도 이제는 조직 교회로서의 구조를 갖추었다. 창설당시에는 당회’, ‘제직회등의 구별이 없었고 모두가 한 위원회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로 장립, 목사 청빙 등의 절차가 필요하게 되자, 노회 가입 문제가 진지하게 토의됐다. 결국 노회에 가입 신청을 냈다.

노회에서는 교회 이름이 문젯거리가 됐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거의 전부 그 소재지 이름을 따 썼는데, ‘바울이니 야고보니 하는 것은 너무 파격적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름을 고치라는 권고가 내렸다. 그래서 바울교회남쪽에 있다고 해서 성남교회로 되고 야고보교회는 서울 동쪽에 있다고 해서 경동교회로 개명(改名)을 했다. 그리고서 노회에 가입했다.

처음 장립된 장로는 강원룡, 김영규, 김석목[1] 등이었고 김능근은 원래가 장로였기에 이명해 왔다.[2]

강원룡은 장로 장립식 때 김규식 씨에게 축사를 부탁했다. 그래서 김규식은 처음부터 강단 바로 아랫구석 독의자에 앉아 있었다. 성남교회 송창근 목사도 순서에 들어 있었다. 좀 늦게사 도착했다. 현관에 발을 들여 놓자, 김규식 박사가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송 목사는 덜렁 핏대를 올리며 나가버린다.

김규식이 교회와 무슨 상관이냐! 교회는 정치 무대가 아니다. 덜 된 녀석!”

나는 그러지 말고 들어오라고 붙잡았지만 뿌리치고 달아나 버렸다.

 

강원룡은 해방 직후에 진짜 정치에 나서려고도 했었다. 처음에는 이승만을 찾아 돈암장[3]에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조향록, 이명하 등도 한 그룹이었다. 그러다가 이승만의 독재 버릇에 실망하고 김규식에게로 갔다. 김규식은 영문학 전공이었기에 인간성이 경화되지 않았었다.

후에는 안재홍[4]과도 가까이 지냈다고 들었다.

은 자기의 나갈 길에 대하여 내게 상담한다. 나는 말했다.

지금 한국의 정치란 것은 물 위에 뜬 거품 같아서 변동이 심하고 수명이 짧을 것이다. 지금 어느 정치인에게 Commit했다가 그가 실각하는 때 너도 그와 운명을 같이할 것을 생각해 봐라, 앞길이 창창한데 첫 데뷰에서 패잔병이 된다면 계산이 안 맞는다. 그보다도 한신에 들어와 신학을 공부하고 세계 교회 무대에 나서는 것이 바른 길일 것이다.”

 

결국 그는 그렇게 했고 그렇게 됐다. 그는 경동교회에서 시작하여 경동교회에서 늙었다. 증자(曾子)[5]신종’(愼終)[6]과 맹자의 계득(戒得)이 늙어가는 누구에게도 좌우명’(座右銘)이 되야 할 것이 아닐까?

 

625때에도 나는 서울에 남았었기에 모두 피난 간 다음에 남은 부스러기’ 10여명을 데리고 예배를 계속했다. 우리가 도농에 강제 소개되었을 때에도 강원룡의 셋째 동생 강리룡(利龍)은 교회 건물 안에 남아 있었다. 교회가 폭격당할 때 그는 교회당 현관에서 순사[7]했다. 그가 아마도 제일 진실한 신자였을 것이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될 작정이었지만, 일찍 승천했다.


[각주]

  1. 김석목 장로는 1947년의 서울사범대학 교수 명단에 이미 있었으며 1979년 고희기념 논문집이 출간된 것을 보면 평생을 서울사대 교수로 재직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 유학생으로 독립운동을 한 분이기도 하다. 입교대학 학생이었던 평남 출신의 김석목은 중국 광동에 있는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간부 김붕준의 조카로서, 기독교계통의 일맥회라는 단체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평남출신 임태정과 교류하기도 했다. 또한 19423성서조선158호 권두문인 조와”(弔蛙)라는 글이 문제가 되었을 때 정기구독자라는 이유로 장기려, 김석목, 유달영 등은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12일간 구금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2. 경동교회 연표를 보면 김능근, 강원용의 장로 임직은 1947, 김영규, 김석목 장로 임직은 1948년으로 되어 있다. 이상철 목사의 회고록을 보면, 김능근 장로는 한문에 능통한 분이어서 숭실대학 한문학교수로 진출했고, 김석목 장로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윤리학을 강의하고 있었고, 김영규 장로는 일본에서 사회사업을 전공하고 조선신학교 사회사업과에서 강의했다고 전한다. 김능근 장로는 20대 후반에 함흥 영생중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하였고 해방 후 남쪽으로 내려와 영생중학교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3. 돈암장(敦巖莊) - 1945년 이승만이 환국하여 처음 기거했던 사저
  4. 안재홍(安在鴻, 1891~1965) - 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1907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들어가서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등과 교분을 가졌다. 1911-1914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 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 신채호 등이 조직한 동제사에서 활약하였다. 교육과 언론 활동에 종사하면서,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하다가 잡혀서 8개월 투옥되었다. 1936년 임시정부와 활동하다가 2년간 복역하였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 민정장관이 되어 한인체계에 의한 행정기반을 굳혔다. 정부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1950921일 납북되어 19653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5. 증자(曾子, 506~436) - 중국 춘추시대의 유학자. 공자의 도를 계승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를 거쳐 맹자에게 전해져 유교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동양 5성의 한 사람이다.
  6. 신종추원(愼終追遠) - 논어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말이다. ‘신종’(愼終)부모의 임종을 신중히 하다라는 말로 장례를 극진하게 모신다는 뜻이며, ‘추원’(追遠)먼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으로 제사를 정성스레 올린다는 뜻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증자(曾子)였는데, 계모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자랐으나 효성이 지극하였다.
  7. 순사(殉死) -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