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9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76) 인철ㆍ혜원 결혼 - 나의 캐나다 방문

나의 캐나다 방문

 

1958년 이른 가을 이미 예정된 캐나다 방문의 길에 올랐다. 9월 하순에 있을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에 친선 사절’(Fraternal Delegate)로 초청됐기 때문이라지만, 사실인즉 휴식을 위한 전지요양[1]이었다.

해방 후 첫 해외여행이다. ‘꼴불견의 시골뜨기 모습이었을 것이다.

 

떠나기 전에 두 가지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인철ㆍ혜원 결혼식을 치르는 일이다.

1958712일에 경동교회에서 강원룡 목사 주례로 인철ㆍ혜원 결혼식을 올렸다. 두 집이 꼭 같이 씻은 듯 가난했다. 좋게 말해서 청빈’(淸貧)이다. 인철 어머니 혼자 진주에서 올라왔다. 그래서 신랑 켠 가족석을 빛냈다.

 

인철은 자기 힘으로 백금 결혼반지를 마련했다. 그때 신학교 교수들도 모두 무료봉사나 다름없었기에 내 주머니도 비고 맑았다. 마침 예수교서회에서 어드맨의 출애굽기 주석 번역을 부탁해 왔다. 나는 그것을 한주일 안에 마감했다.[2] 그 원고료가 결혼비용에 쓰여졌다. 장롱과 침대도 그런대로 준비됐다. 피로연은 경동교회 여신우회에서 차렸고, 회원 총동원으로 접대한다.

하객은 이삼백 명, 교회당이 완전 만원이었다. 퇴장할 때 신랑은 거의 달음질하다시피 걷는다. 따라가노라고 더 잽싸게 걷는다. 백영렵[3] 목사가 농담한다. “무던히도 급해 맞았네, 식을 벌써 올려주지 않고……하면서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른다.

신혼여행도 없다. 자동차로 시내를 한 바퀴 돌고서 수유리 학장 사택에 왔다. 이층 침실이 신방이다.

혜원은 이대에서 도서관학과 속성과를 졸업했고 도서관 직원 자격증도 받았다. ‘한신도서관에 직원으로 취직했다.

그래서, 남아돌아가던 교수ㆍ직원 사택의 하나에 입주했다.

 

또 하나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경동교회를 강원룡에게 위임하는 일이다.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를 거쳐서 경기노회에 위임 청원서를 냈다. 무난히 접수됐다. 위임식은 노회에 부탁하고 나는 캐나다에로 뛰었다.


[각주]

  1. 전지요양(轉地療養) - 기후가 좋고 공기가 깨끗한 곳으로 거주지를 옮겨 질병을 치료함
  2. 촬스 어디맨 저, 김재준 역, 출애굽기 강해, 대한기독교서회, 1956.
  3. 백영엽(白永燁, 1892~1973) - 19086월 의주 양실중학교를 거쳐 1913년에 북경 광문대학 4학년을 수료하였으며 1921년 남경 금릉신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중화교회 목사로 시무하였고, 1922년 만주 하르빈 한인기독교회 목사로 재직중 평남 안주교회의 청빙을 받아 가던 길에 안병철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5만원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는 혐의로 검속되었으며 평양감옥에서 16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1927년 안창호가 길림에서 체포되자 장작림과 교섭하여 그 석방에 성공하였다. 19338월 선천북교회 목사로 전임되었고, 1937년 동우회 흥사단 사건으로 체포, 종로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에서 16개월간 구류되었다가 무죄로 출옥하였으나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목사직을 박탈당하였으며, 19458월 해방과 동시에 선천군민위원장 및 평북도민위원장 등을 역임하던 중 1946년 이를 사임하고 월남하였다. 19471월 남조선과도정부 강원도 인사처장에 부임하였고 같은해 12월 대광중학교 교장(1952년까지)으로 전임하였으며 평안북도민회 회장(1948-55), 이북 오도 평안북도지사(1947-70) 등을 역임하였다. 동생 지엽은 영락교회 장로로 봉직했고 유족으로는 부인 조영화와의 사이에 3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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