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9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88) 돌아와 보니 - “평심원”에서

평심원에서

 

내가 광주 백영흠 목사 댁에 은거한지 이틀 후던가 동산병원[1]() 의사(의사이기도 하다) 그룹 세 분(?)이 찾아왔다.[2] 그들은 서울 혜화여의전 재학 중에도 몇 번 우리 집에 찾아온 일이 있는 옛 친구들이다.

그들은 광주 동산병원[3]에 취직됐지만 단순한 의사로서 만족하기에는 너무 비전이 컸다. 그들은 결핵요양원을 설립했다. 그들의 월급에서 성별하여 제단에 바친 성금으로 사설 요양원을 세웠다. 요양실, 의료실, 주방, 식당 등이 갖춰진 아담한 한국식 기와집이었다.

그들은 나를 거기에 안내했다. 고장은 백운산 계곡이어서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한다. 아직 이름이 없다. 그들은 나에게 작명(作名)을 청한다. 나는 평심원’(平心園)[4]이라 이름했다. 현액(懸額)[5]도 써달래서 썼다. 낭간 밑 두툼한 도리[6] 위에 걸어놓았다. 고전문화재 같이 의젓했다.

나는 거기서 숙식하며 한 주일쯤 지냈다. 고독과 정사(靜思)[7]가 나의 일과였다. 멀리 폭포 밑에도 가보았다. 그렇게 높지는 않아서 수량이 풍부했다. 나는 알몸으로 폭포 웅덩이에 허리까지 잠궜다.

얼음냉수 같아서 곧 나왔다. 폭포 바로 밑은 파랗게 깊은 심연이어서 조금 무시무시해진다. 돌아오는 길에서 독사 한 놈을 두들겨 잡았다. 늘어졌지만 채 죽지는 않았다. 요양원까지 왔다. 요양원 별실에 있는 젊은이 둘이 뛰쳐나와 그 뱀을 달라한다. 뭣하려느냐? 했더니 구어 먹는다고 했다. 닭고기보다 더 맛나다는 것이었다. 구워서 몇 점 내게 가져왔다. 진짜 별미였다. 난생 첨 먹는 뱀고기다.

 

이 젊은이 둘 중에 한 사람은 한신재학생이었다. 입학은 했지만 소명감같은 것은 없다고 느껴져서 고민했다. 진실이 그를 이런 데로 이끌어 온 것이었다.[8]

그는 우수한 지성(知性)의 소유자였다. 소명감을 경험하려고 혼자 산중에서 철야기도도 해보고 난신고행도 얼마 해봤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다 한다. 내게 상담을 요청한다.

 

나는 말했다.

네가 네 본위로 하느님을 불러 내리려는 것은 오만하다. 그건 너 자신을 위한 영적 탐욕이다. ‘믿음이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한 예수의 겟세마네기도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신앙이란 풀 자라듯 안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성장하고 열매 맺는 장기 공작이다. 지금은 초조하고 불만스럽고 의혹에 차 있다 해도 그것 때문에 믿음 자체를 포기하거나 단념해서는 안 된다. 그런 데로 꾸역꾸역 계속하노라면 긴 세월 안에서 몰래 몰래 자라는 것이다. 신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계속해라.”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큰 교회 목사로 충성하고 있다. 해외 유학도 했다.

나는 지금 신종선을 두고 하는 말이다.[9]

 

또 한 청년은 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치고 소학교 교사로 있는 사람이었다. 인생 문제에 고민하여 신경쇠약의 한계선까지 이른 진지한 젊은이였다.

나는 그에게 권했다.

혼자 고민해봤자, ‘자학밖에 되지 않는다. ‘한신에 와라 입학시켜주마!” 했다.

그는 그렇게 용단하고 한신에 입학했다.

선과에 들어왔지만, 그 동안에 5년제 중고등학교 전 과목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한신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마쳐 학사, 석사 칭호까지 획득했다. 지금 금호동 천은교회 목사로 충성과 지성을 겸한 목회에 전념한다. 단기간이지만 영국 유학도 했다. 노력가라 하겠다.

한신시간 강사로도 봉사하고 있다 한다. 이름은 이기영이다.

그렇게 생각하노라면 나의 백운산 피신 생활 며칠도 하느님 은혜의 질서중 한 토막이었다고 감사한다.

 

총회에서는 헌법, 신앙고백서, 권징조례, 예식서 등등이 일사천리로 무수정 통과됐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출 사건에 대하여는 재판부가 설치되고 이남규가 재판장이 됐단다.

재판부에는 내가 반드시 출두해야 한다고 강권한다. 나는 안 간다고 고집했다. “나는 영어로 말한다면 Sick and Tired[10] 했다. 삶아먹든 구워먹든 마음대로 해라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이튿날 그는 다시 왔다. “싸움은 끝까지 싸워야지. 최후 결전장에서 후퇴하면 되느냐? 같이 가자하고 잡아 일으킨다.

그래서 다시 갔다.

이남규 재판장 앞에 앉았다.

나는 말했다.

내가 할 말은 여기 다 쓰여 있으니 더 말하지 않겠다.”

그는 알았다면서 나가라고 한다.

 

결국 판결문은 간단했다.

조선출은 학교 공금을 변상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출에게는 변상 능력이 없으므로 그것은 결손 처분에 붙인다. 동시에 조선출은 한신에서 퇴직한다.”

 

=-=-=-=-=-=-=

 

[애자 사건]은 제46회 총회 회의록

[부록 제1] 한국신학대학 경리조사 처리에 관한 건 44쪽 이하를 참조


[각주]

  1. 범용기(2)에는 동산병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평심원에서 장공과 만났던 실제 인물인 이기영 목사가 제중병원’(현재 광주기독병원)으로 수정해 주었다.
  2.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여성숙 선생을 가리킴, 개신교(초교파) 독신여성 수도공동체인 디아코니아자매회설립자
  3. 제중병원(현재 광주기독병원)
  4. 범용기(2)에는 평심원(平心院)으로 적혀있지만, 당시 평심원에서 장공과 만났던 실제 인물인 이기영 목사가 평심원(平心園)으로 수정해 주었다.
  5. 현액(懸額) - 그림이나 글자를 판에 새시거나 액자에 넣어 문 위나 벽에 달아 놓은 것
  6. 도리 집이나 다리 따위를 세울 때, 들보와 직각으로 기둥과 기둥을 건너서 위에 얹는 나무
  7. 정사(情思) -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생각함
  8. 당시 장공과 상담한 이기영 목사(1967년 졸업)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에 한신대 1년 중퇴하고 요양 중이었던 사람은 이종헌 목사(1964년 졸업)라고 한다. 이기영, “그리스도인의 지성과 자유한 삶을 구현하신 분”,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회, 장공 이야기(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284-292.
    이종헌 박사는 1939427일 제주에서 태어나 한국신학대학, 연세대 대학원으로 마치고 제주YMCA,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활동하였다. 1971년 데니슨(Daneson)의 그룹에 영향받아 한국인간관계교육협회가 생기고 빈센트 신부(Dr. Vincent)와 그룹치료를 10년간 활동한다. 영국 버밍험대학에서 상담수업 디프로마(Diproma) 취득하고 미국 클라인벨 박사에게서 목회상담을 배웠다. 서울 강남(1985~1995), 양평(1996~2011)에서 상담 및 그룹치료 활동을 하였으며, 2012년부터 제주에서 서양상담의 대안인 한국상담 아리랑풀이작은그룹 운동을 펼치고 있다.
  9. 신종선, “지금도 마음속에 깊이 살아 계시는 분”,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장공 이야기(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1), 135-140.
    이 부분에 대해서 장공 김재준 목사는 그 당시 평심원에서의 인연을 신종선 목사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신종선 목사(서울노회 공로목사)범용기에서의 기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실 나는 광주 백련계곡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으며 더욱 평심원에 들른 적도 없다. 물론 뱀을 요리하여 구어 스승을 대접한 일도 없다. 아마도 김 목사님이 약간 기억의 착오를 일으키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이 기억의 착오 속에서 깊은 은사의 정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그분이 나를 한 제자로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정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추모하면 할수록 김 목사님은 나의 훌륭한 은사이셨다.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언제나 나는 그 분에게 상담하여 나의 소명감의 고민을 해결 받은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분은 나의 인생의 중요한 시절에 나를 가장 보람있는 길로 인도하여 주신 은사이시었다. 비록 일종의 기억의 착오가 포함되어 있지만 보잘 것 없는 나를 우수한 지성의 소유자로 과찬하여 삶의 용기를 북돋우어 주셨고, 내가 권하는 뱀 고기를 싫어하지 않으시고 받을 만큼 마음의 고향을 잃고 방황하던 나를 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게 해주셨던 것이다.”
    당시 장공과 상담한 두 청년은 앞페이지에서 언급했듯이, 이종헌 목사와 이기영 목사이다.
  10. Sick and Tired : 아주 싫어진, 진절머리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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