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4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156) 北美留記 第四年 1977 - 와싱톤에

와싱톤에

- 죄수복 차림의 데모 -

 

226() - 945AM에 문재린 목사님과 둘이서 와싱톤으로 날았다.

1045분에 도착. 그 근방은 모두 관청건물이라 보통 식당이 없다. Calton Hotel 지하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둘이서 햄 앤 엑, 토스트, 커피를 먹고 15불을 냈다.

백악관 앞 공원에서 모이기로 되있었는데 너무 일찍 왔었는지 문 목사님과 나밖에 없었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필라델피아의 김순경 박사가 혼자 나타난다. 반가왔다.

얼마 서성거리는 동안에 전세뻐스로 온 N.Y.부대가 내린다. L.A. 보스톤부대도 온다. 100명이 됐다.

N.A.부대는 숱한 죄수복을 싣고 왔다. 부인동지들이 밤새가며 만든 생광목 바지 저고리다. 우리는 모두 양복 위에 죄수복을 입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연행된 민주인사 함자[1]를 한 데모원에게 한 분 씩 가슴에 달았다. 내게는 윤보선 씨 성함이 차례졌다. 그리고 긴 밧줄에 손목이 엮인 모습으로 행렬은 시가를 걷는다. 구호는 이승만, 시노드 신부가 선창했다.

이 죄수복 대열은 백악관, 한국대사관, 일본대사관, 국회의사당, 그리고 거리를 종일 외치며 걸었다. 경관대와의 충돌도 심심찮게 잦았다.

밤에는 황재경 목사 교회에서 한경직[2] 목사가 친여적 부흥회를 한다기에 만나려고 전 데모대원이 갔었지만 경관대의 포위로 입장이 거절됐다. 김병서 박사만이 보통 교인으로 분장, 뒷문으로 들어갔단다. 우리는 밖에서 찬송부르고 기도하고 데모구호를 외치고서 헤어졌다.

김병서 박사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상복 위에 외투를 입고 옆문으로 들어가 강단 바로 밑에 앉았다. 한경직이 나타나자 그는 외투를 벗고 죄수복차림 그대로 한경직 앞에 다가섰다 한다. 한경직은 당황했다. 그는 몇 마디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했다. 장로들이 달려들어 한경직을 피신시키고 김병서를 몰아냈다고 한다.

그날 밤 나는 홍성빈 집에서 유숙했다.

227() - 낮에는 백인들과 연합하여 백인교회에서 연합예배를 드렸다. 영어와 한어를 섞어 진행시킨다. 나는 영어로 축도한 것 뿐, 문재린 목사 사모님[3]3분간 연설은 압권이었다.

 

나는 내 아들이 먼저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동료들이 다같이 나올 때까지 거기 머물러야 한다. 나는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만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감옥 안이나 감옥 밖이나 통털어 감옥이기 때문이다.

 

밤에는 촛불행진이다. 백악관 앞에까지 갔다가 다시 회의장소에 돌아오는 코오스였다.

228() - Washington에서 모이는 North America CoalitionSteering Committe에 참석하고 전규홍 박사의 초대로 점심, 오후에는 두 파로 나뉘어 한 파는 Fraser의원 회견, 한 파는 백악관 동북아안보담당관을 회견하기로 했다. 나는 후자에 배정됐다. 임창영 박사도 나와 같은 일행이었다.

관료와 민간인과의 회견이란 그리 유쾌한 기분일 수가 없다.

발언을 무척 삼간다. 그는 임창영 박사의 말씀을 약 10분간 듣고서, “그래도 이북보다는 낫지 않느냐?” 한다. 임박사의 성분을 친이북으로 규정짓고 말하는 야유였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별로 말이 없기에 나는 억압에 대한 감도(感度)는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컴퓨터식의 해답을 얻기가 어렵다. 가령 미국 시민이 박정희 정도의 탄압정치 밑에 있다면 그 반발 정도가 지금의 한국 시민과 꼭 같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들으려는 성의를 보였다. 그리고 얘기도 얼마했다. 30분 약속시간은 엄수랄까. 그는 황급하게 자리를 떠난다.

31() - 홍성빈 집에 머문다. 세계은행의 인도담당직원인 귀진의 인도얘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인도 농민은 영양부족으로 몸이 쇠약하다. 육류를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육우(肉牛) 목장을 설계하여 인도정부로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얻도록 하고 영양식품공장을 세워 염가로 서민층에 영양식품을 제공하는 구체적 계획서 작성에 노력하고 있노라 했다.

1245분에 토론토로 떠났다.


[각주]

  1. 함자 남의 이름을 높여 이르는 말
  2. 한경직(韓景職, 1902~2000) - 장로교 목사, 교육가, 육영사업가. 19021229() 평남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한도풍의 장남으로 출생. 1912년 향리의 자작교회에서 설립한 진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과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는데, 어린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는 6촌간이며 초기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이었던 한병직 목사, 진광학교 교사인 홍기두 선생(평양 대성학교 출신), 교회 전도사 우용진 등이 있었다. 1914년 진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김찬빈(1899-1974)과 결혼하였다. 1917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승훈, 조만식 등에게서 민족주의적 교육을 받았으며 1922년 숭실대학에 진학하여 자연과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숭실대학 재학중 블레어(W. Blair, 邦偉良) 선교사의 비서로 일하면서 공부하였는데 1924년 여름 블레어와 함께 황해도 구미포 해변가에 갔다가 목회자로 헌신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블레어와 윤치호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캔자스주에 있는 엠포리아대학에서 1년간 인문과학을 수학하였다. 1926년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신학교로 진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았는데 그가 프린스턴에 갔을 때 박형룡, 최윤관, 백낙준이 졸업하였고 그는 최윤관, 김성락, 보켈(H. Voelkel), 윤하영, 이규옹, 김재준, 송창근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는 프린스턴 재학중 신학노선의 차이로 신학교가 분열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1929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계속하려 했으나 폐결핵이 발병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뉴멕시코주의 알버커크 요양소에서 2년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그후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다시 6개월간 요양한 후 1932년 귀국했다. 귀국직후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 교사로 부임했으며 숭실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고 이듬해 의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5년 건평 3602층 벽돌건물로 교회당을 건축하였으며 1939년에는 백지엽, 김응락 등의 도움을 얻어 보린원을 개설하여 고아들을 수용하였고 후에는 양로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인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미국에 유학하였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교회에서 추방당하였으며 이후 해방되기가지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았다
    해방이 되자 그는 윤하영, 이유필 등과 함께 평북지역 치안책임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459월에는 윤하영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월남직후 미군정청 통역으로 있으면서 김재준, 송창근 등이 하는 조선신학교에 나가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서울 영락동에 있던 천리교 경성분소 건물을 접수하여 1945122일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서울 영락교회가 되었다(194611월에 교회명칭을 바꾸었다).
    1954년 숭실대학장에 취임하여 3년간 봉직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KNCC) 회장에 선임되어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였다.
    197312일 그는 박조준 목사를 후임자로 세우고 은퇴하면서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976년에는 고당 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를 조직, 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82년에는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을 지휘하고 있다. 1948년 미국 엠포리아 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를, 1958년 연세대학교에서 역시 명예신학박사를, 1977년 숭전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으며 1970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48년 조선신학교의 김재준에 대한 신학논쟁이 전개되었을 때 그는 총회석상에서 개혁자의 부르짖은 자유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3대 자유인데 나와 해석이 다르다 하여 그를 처단하는 것은 삼가야 할 줄 안다고 하여 김재준에 대한 총회의 처단을 반대하면서도 결국 행동으로는 그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경직 목사의 신앙노선은 김재준은 그것보다 온건하고 중도적이었기 때문이다.
  3. 김신묵 여사(1895~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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