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4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160) 北美留記 第四年 1977 - 다시 뱅큐바에

다시 뱅큐바에

 

423() - 뱅큐바로 떠났다. 강연 겸 휴양을 위한, 장범식 박사의 배려로 된 일이다. 아침 930분에 떠나 다섯 시간 계속 날아 오후 210분에 내렸다.

항만의 큰 다리를 건너 산 중턱에서 동양화적인 풍경을 전망했다. 남화(南畫)[1] 그대로다.

밤에는 호텔 집회실에서 지도적인 민주동지 약 60명이 모였다. 강연에 진지한 토론이 이어져서 시간이 아쉬웠다. 더러는 장범식 박사 댁에까지 와서 새로 세시까지 얘기했다. 숙소는 줄곧 장 박사 댁이다.

424() - 오후 1시에 반병섭 목사 교회에서 예배했다.

425() - 장 박사 댁에서 휴식을 즐겼다. 장범식 박사 친동생인 장윤식 박사가 내방했다. 장윤식 박사는 사회학 전공이고 U.B.C. 대학 교수며 몇 해 째 한국농촌연구 Project로 여름에는 한국나가 직접 농촌 실대를 연구하고 있다.

418() - Simon Frazer대학과 U.B.C. 동양학 도서관을 견학했다.

밤에는 6, 7인의 지성인들이 모여 12시까지 담화했다. 그들은 진지한 민주동지들로서 박 정권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판단도 명확하다.

427() - 장범식 박사 안내로 Vancouver Island를 관광했다. 내해(內海)의 너무나 잔잔한 호면, 섬과 산과 숲이 새파란 수경(水鏡)[2] 속에 그림자를 잠근다. 그리고 서로 안고 엇갈려 동양화를 그린다.

기화요초Buchard 화원을 보고 송림과 산협의 길을 달렸다. “부쳐화원은 항만공사 때 아무렇게나 흙을 파낸 자리란다. 다이나마잇으로 깊숙이 패인 데는 주위의 암벽 위에 시냇물을 이끌어 폭포를 만들고 그 폭포가 갇혀 작은, 그러나 깊은 심연 같은 호수가 되게 하고, 어찌못해 그대로 둔 거암(巨岩)은 그 밑에 난초와, 지초(芝草)[3]를 심어 바닥의 호수와 어울리게 했다.

자연미란, 관리자인 사람이 하기에 달렸다고 다시 다시 우리 강산을 생각했다.

하루의 풍류를 마치고 나나이모”(나는 이것을 九薯港이라고 이름해 본다)항에서 페리(관광선)호로 두시간 만에 호오스슈”(馬蹄港)에 내렸다.

428() - 반 목사, 정대성 장로, 장범식 박사 등과 함께 케불카로 만년설 덮인 설산에 오르고, 내려와 저수지 호수와 폭포, 사자봉 그리고 반 목사 Drive로 해변도로를 달려 반도의 호화주택들과 인디안들의 빈촌가를 봤다.

인디안 농가 한집을 방문했지만, 주인이 없었다. 인디안 농토에 인디안이 가꾼 채소인데도 시장관리가 백인 손에 쥐었기에 어쩔 수 없이 소작인노릇을 한다는 것이었다.

눈산(雪山)에서 내려와 곧장 알몸을 바다에 잠글 수 있는 고장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429() - 장 박사와 함께 U.B.C. 캠퍼스 동양학 도서관을 봤다. 일본 명치시대의 자유주의자로서 국제친선에 이바지한 니도베이나조오”(新渡戶稻造) 기념으로 일인들이 기증한 일본식 정원도 산책했다.

밤에는 장 박사 댁에서 5, 6인 동지가 석별의 좌담회로 모였다.

430() - 토론토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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