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4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176) 北美留記 第四年 1977 - 한ㆍ미 N.C.C. 연합회의에

한ㆍ미 N.C.C. 연합회의에

 

1024() - 스토니 포인트 교회수양관에 갔다. 한국 N.C.C.와 미국 N.C.C.와의 연합 Conference에 방청으로 초청됐기 때문이다.

회의 전날 밤에는 한국 N.C.C. 대표들 14명만이 모여 Orientation을 가졌다.

나에게는 동경 민통 관계를 밝혀달라는 것과 미군철수에 대한 태도를 알려달라는 것이 그들의 요청이었다.

나는 동경 민통에 대한 것은 이미 뉴코리아타임스와 UM사무국에 그 경위를 해명한 글이 발표됐으므로 더 해명할 것이 없으나 아직 읽지 못한 분들을 위해 다시 설명한다면 이런 것이라고 자세하게 설명했다.

잘 알았습니다. 다시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합시다.” 하고 모두 오른손을 잡고 악수했다.

한국에서는 배동호가 나를 동경민통 최고고문으로 추대했다는 것을 이북 방송을 통해 들었다는 것이다. 이북에서는 몇 번이고 반복 선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에게 직접 Clarify[1]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제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철수에 대하여는 미군 주둔은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인 이상, 미국에 유익하면 가라 해도 있을 것이고 유익이 없으면 있으라 해도 갈 것인데 우리도 명색이 독립국가인 한, 너무 빌붙은 태세는 삼가야 할 것이라고 나는 솔직히 말했다. 그리고 지금의 형편으로서는 일본의 안보를 위해서나 소련과의 대결을 위해서나 한국의 현상유지를 위해서나 미군이 아주 철거할 것 같지는 않다고 해뒀다.

그들은 미군 철수 곧 김일성 남침이라는 공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박정희의 세뇌공작이 무던이 성공했다고 느껴졌다.

1025() - 한국 N.C.C.와 미국 N.C.C. 합동회의가 개막됐다. 이천환[2] 주교(K.N.C.C.회장)의 개회설교와 김관석 목사의 Presentation 등이 있었고 회의에서 한국 대표들이 미군 철수는 미국의 배신행위라는 둥,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식이라는 둥, 공격조로 나오는 바람에 미국측 대표들은 무표정으로 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았다.

그다음 순서에서의 김관석 목사의 Speech가 무던히 Mature[3]한 내용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미국 대표들이 그때부터 표정이 풀리고 자유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결국 한국 대표들의 발언을 어느 정도 반영시키면서도 무던히 외교문서적인 비공개 성명서가 합동으로 하나 발표되었다.

오후 분과회의에서는 상당히 활발했고 나는 제4분과인 Unification of Korea에 배당됐다. 나는 별로 발언하지 않았으나 마감에 무엇보다도 급선무는 자유분위기 조성이다. 모든 비판과 언론이 동결된 상태에서 무슨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인간해방이 기대되겠느냐? Unification[4] 문제도 마찬가지다했다.

사회자는 Absolutely[5]하고 찬의[6]를 표했다.

이번 모임에 본국에서 강원룡, 김관석, 강문규, 조승혁 등 14, 일본서 지명관, 이인하[7], 오재식 등, 서독서 장성환, 이삼열, 프릿즈 등, 그리고 뉴욕의 이승만 손명걸, 구춘회, 박상중, 김상호 등이 한 고장에 재연합된 것은 축복의 때라 하겠다. 다만 우리가 이 모임을 최선이랄 정도로 이용할 수 있었는가가 의문이다.

아직 우리는 정치 외교부문에 숙련돼 있지 못하다는 것이 절감했다.

111() - 토론토에 돌아왔다.


[각주]

  1. Clarify 명백히 하다, 밝히다, 분명히 하다.
  2. 이천환(李天煥, 1922~2010) - 전라북도 정읍 출생. 1965년 처음으로 한국인 성공회 주교가 되었으며,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의 교구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천환 주교는 재임 시 한국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3. Mature 성숙한, 숙성한, 원숙한
  4. Unification 통일, 통합, 단합
  5. Absolutely 절대적으로, 완전히, 정말로, 전적으로 그렇다(완전한 동의)
  6. 찬의(贊意) - 찬성의 뜻
  7. 이인하(李仁夏, 1925~2008) - 경북 구미 출생. 1941년 혼자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캐나다 유학을 다녀온 후 1959년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가와사키시(川崎市)의 한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재일대한기독교회총회,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일본기독교협의회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0년 재일한국인 2세가 일본 국적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취업을 취소당한 히타치(日立) 취업 차별 사건을 시작으로 재일 한인의 취업 차별 반대 운동을 벌였고, 1980년대에는 일본 내 외국인 지문 날인 철폐 운동에 앞장섰으며, 1990년대에는 재일 한인과 북한인에 대한 전후 보상 운동을 이끄는 등 평생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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