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18) 캐나다에 갔다 오고 - 다시 서울에

다시 서울에

 

캐나다에 있는 동안에도 3을 위한 글을 써 보냈다. 이상철 목사는 헌 자동차를 몰고 나와 함께 캐나다 동부지방을 할리팩스까지 역방[1]했다. 그 일기는 19739월호(36) “3오토방랑 10,700라는 제목으로 발표돼 있다.

방랑에서 돌아오자 귀국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 동안 197376일에 박형규가 정부전복 음모라는 엉터리 죄목으로 구치감[2]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왔다. 3월 부활절 때 남산 잠두에서의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학생들이 민주주의는 부활한다등등의 전단을 뿌리다가 잡혔는데, 자금출처가 박형규였다는 데서 구속된 것이라 한다.

나는 여기 있을 경우가 아니라고 느껴서 곧 귀국하려 했다. 이민국에 갔더니 이민국 차석이란 분이 진정으로 만류한다. “국내에 있었대도 망명해야 할 처진데 왜 구태여 돌아가려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간다니까, 자기가 그동안에 영주권 신청을 해 놓을테니 일이 생기거든 즉석에서 다시 오라고 한다.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도 특별취급으로 즉석에서 비자를 주도록 공한을 보낸다고 한다. 스캍 박사도 일부러 오셔서 만류하셨다. ‘신자더러는 김 목사 신발 감춰 놓으라고 농담하셨다.

바로 얼마 전에 본국 다녀온 토론토의 김희섭 박사 말에 의하면, 서울에서 일본 달각바리[3]들 설치는 꼴, 일반시민의 무표정한 체념상태, 이대로 간다면 민족자멸이란 결론밖에 없을 것 같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래도 민주운동에 앞장섰다는 늙은이들이 가만 있을 수 없을 것은 사실이다.

나는 부랴부랴 떠났다. 그것이 아마도 19739월이었던 것 같다. 이상철 목사는 내가 나가면 구속이라도 될 것 같았었는지 전송한다면서 LA, 다시 하와이에까지 따라와 하와이 비행장에서 작별했다. 하와이 사는 김봉화[4] 여사와 그의 부군도 비행장까지 나와서 이제라도 도로 들어가자고 졸랐다. 나를 아껴주는 그 애뜻한 충정이 너무나 고마웠다.

김포공항에서 민주수호 연락원(?)정수일[5] 군을 만났다. 혼자 나와서 마치 정보원이 끌고 가듯이 나를 끌고 저켠으로 걷는다.

지금 함석헌, 천관우 등 여러분이 김 박사님을 기대리고[6] 있습니다. 이거 뭔가 해야지 이렇게 있어서야 되겠나 하고 날마다 걱정이랍니다. 815에 민주성명이라도 내려 했는데 못하고 말았으니 김 목사 오면 곧 착수하자고 고대한답니다. 우선 김 목사님 의사를 전해야 할텐데 백지 서명이라도 제게 해주세요한다. 나는 그를 신임하는 처지였기에 백지 서명을 해 줬다.

정세는 폭발적이었다. 김대중은 88일에 동경 프린스 호텔에서 박정희의 정보원 손에 납치되어 구사일생으로 지금 자택감금을 당하고 있다. 학생들은 데모에 나섰다가는 잡혀간다. 그러나 일반 시민은 꿀먹은 것도 아닌데 벙어리같았다.


[각주]

  1. 역방(歷訪) - 여러 곳을 차례로 찾아가 봄
  2. 구치감(拘置監) - 일제강검지, 미결수를 가두어 두는 감옥을 이르던 말
  3. 딸깍바리 일상적으로 신을 신이 없어서 마른날에도 나막신을 신는다는 데에서 나온 말로, 가난한 선비를 이르는 말
  4. 김봉화 여사는 한국전쟁 당시에 미국의 YMCA와 연락되어 미국으로 지도자 수업을 다녀왔으며, 연세대 의과대학 홍승훈 교수와 결혼하여 1967년 남편 홍 박사를 따라 하와이에 가서 13년간 체류하다가 1980년에 귀국하였다고 한다. [중앙일보 1982821일자 신문]
  5. 정수일 씨는 1960년대 말에 지역에서 사과농사를 짓다 무작정 서울 원효로에 있는 함석헌 선생 집으로 찾아갔다. 이후 그는 함석헌,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등이 공동대표로 있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일을 돕게 되었다.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이 되기도 하였는데, 35년이 지난 2013년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평택시민신문, 2013626일 기사]
  6. 기대리다 - ‘기다리다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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