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7일 일요일

[범용기 제3권] (228)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Toronto에서

Toronto에서

 

617() - 오후 2시 연합교회에서 김익선 목사 위임식이 있었다.

노회에서 주재한다. 내가 설교했다. 제목은 목자상()”이다.

79. 6. 19() - 서독의 이영빈[1] 부부가 토론토에 왔다. 친척 방문이란다. 이 목사와 나는 그들을 코레아 하우스에 초대했다.

이영빈 목사는 내가 N.Y.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처음에 교섭하던 것과는 온전히 다른 성질의 모임인데 내 이름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내가 내 양심대로 해야 할 일도 태산같은데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까지 내 이름을 내 놓아야 할 까닭은 없지 않겠오?”

옆에 앉는 이영빈 목사 부인은 이용당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지요!” 했다.

어쨌든, 그 모임도 태산명동 서일필이었다.

625() - 선우학원 박사로부터 평양의 내 막내조카 남용의 편지와 사진이 전해졌다.

남용은 모스크바 대학을 마치고 지금 평양에서 중직에 있다는 것이다.

아들이 넷이라고 했다. 내가 평양에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오지 고향에도 가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 성묘도 했다고 한다.

비석도 세웠단다. 비엔나 이북대사관이 하는 일이니까 신빙성은 할인할 밖에 없겠다.

나는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74() - 서울 교회 신계동에 우거하는 강기철 씨가, 단권에 요약된 A. Toynbee“Study of History”를 자역, 자비 출판한 것을 한권 보내왔다. 호화판 장정이다.

79. 7. 7.() - 최홍희 장군 부부가 Korea House에서 곰탕에 정종 한 도꾸리 대접한다. 별 대답도 없었다.


[각주]

  1. 이영빈 목사 초대 감리교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풍운 목사의 아들로 광복후 감리교신학교 첫 졸업생(1948)이다. 그는 1955년 서독으로 건너갔으며 1958년 독일에서 동독 교회의 주선으로 이북에 계신 부친의 소식을 접하게 되어 1960년 부친이 사망할 때까지 서신 교환을 하였다. 1964년 괴팅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려던 그는 한국인 광부와 간호원이 있는 루르 지방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1974년 음악가 윤이상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816월 이화선 목사와 아내 김순환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였다. 당시 <로동신문>통일하자고 해외 그리스도인이 찾아왔다!”고 대서특필하였다. 2018년 향년 92세로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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