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24)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대화의 광장?

대화의 광장?

 

국무총리 김종필은 기독교협의회 김관석[1] 총무를 통해서 기독교회 중진들과 대화의 광장을 가져보자고 자주 교섭해 온다고 했다. 나는 박 정권 일방통행인데 대화는 무어고 광장은 무어냐고 일소에 붙였다. 그러나 몇 달을 두고 하도 그래샀는다니 그럼 어디 만나보자고 김 총무가 말을 건넨다. 그럼 만나기로 하되 총리관저 아닌, 어느 중간 장소에서 우리가 선정한 몇 분과만 만나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단다. 그래서 19731211일엔가 만나 보기로 했다.

김관석, 박형규, 김정준[2]과 김재준 네 사람이고 저쪽에서는 김종필 단독이었다.

김종필이 귀빈 만나는, 삼청동의 궁궐 같은 한옥 객실에서 모였다. 김종필은 그 머리말에서 무슨 비판이든지 맘대로 하되 체제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럼 우리는 별로 할 말이 있을 것 같지 않소”, “모든 문제가 체제 때문에 생기고, 체제 속에서 나오는데 체제를 건드리지 않고서 무슨 문제발굴이나 해결책이 있겠소!”

김관석과 박형규는 신상관계로 별로 발언하지 않았으나 김정준과 나는 노골적으로 말해버렸다. 박과 김도 공감이란 표정을 보였다. 김종필은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렇게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제발 체제는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건드렸다가는 참혹한 유혈극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 때문입니다.”

기독교회인으로서는 할 것은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는 것이 신앙고백인데 형편에 따라 신앙고백을 달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정치 문제 이전에 신앙문제입니다.”

김종필은 서로 핀트가 맞잖는 대화를 더 오래 끄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감쯤 되어 CIA 무어라는 무표정하고 뚱뚱한 인물이 김종필 옆에 나와 앉는다.

김종필은 그가 정보부 무슨 책임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듣기만 했고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공갈[3]용인 것 같았다.

헤어질 때 김종필은 섬돌[4] 아래까지 내려와 작별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그의 비서에게 - “목사님들은 아주 강경한데! 더 어쩔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하더라는 것이다.


[각주]

  1. 김관석(金觀錫, 1922~2002) - 함경남도 함흥 출생. 함흥제이보통학교를 거쳐 능인학원이라는 불교 사찰의 부속 학원에서 불교의 교리와 염불 암송하는 법을 배웠다. 이후 캐나다 선교부가 운영하는 함흥영생중학교(교장 김관식 목사)에서 수학하였다. 세례를 받고 신학 공부를 결심하고 김형숙 목사의 추천으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중앙신학교에 응시하였으나, 목회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낙방하였고 1년 후 도쿄에 있는 일본신학교에 진학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해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해방 후에 귀국하였다. 함흥남부교회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 월남하였다. 1947년 조선신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한 후 송창근 박사의 권유로 조선신학교 여자신학부를 맡아 육성하였다. 1948년 승동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동경에서 함께 공부하던 유관우, 장하구,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지동식, 전경연, 전택부, 박봉랑, 한철하 등과 함께 복음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김재준, 박봉랑, 김정준, 정대위 목사와 함께 조선신학교 재건에 힘썼다. 그때 기독교서회 총무인 김춘배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서회에서 일했으며 미국 시라큐스 대학,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1966). 196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1968~1980)로 선출되면서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기독교방송 사장(1980~1989), 새누리신문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2. 김정준(金正俊, 1914~1981) - 해방 이후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초대 회장, 한국신학대학 학장 등을 역임한 목사, 신학자. 호는 만수(晩穗). 부산 출신.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거쳐, 캐나다의 임마누엘 신학교,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고,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 한국신학대학 구약학 교수, 1961년 한국신학대학 학장, 1963년에는 연세대학교 교목실장 겸 구약학교수, 1964년에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장, 1970년에는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다시 역임하였다. WCC 세계신학교육기금(TEF) 한국대표, 대한기독교서회 편집위원장과 이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교회 신학과 교육 발전,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는 관에서 나온 사나이라는 별명처럼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고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으며, 19812월 지병으로 소천했다.
  3. 공갈(恐喝) - 공포를 느끼도록 윽박지르고 을러댐
  4. 섬돌 집채와 뜰을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든 돌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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