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38) 北美留記 第一年 1974 - 한국에서의 마감 몇 주일

한국에서의 마감 몇 주일

 

128 집에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를 읽으며 자성한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좀더 겸손해야 하겠다. 나 자신의 “Yes”“No”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을 통하여 그의 “Yes”“No”를 말해야 한다.

129() - 토론토 신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130() - Academy House에서 Lutheran이 주최한 모임이 열렸다. 거기 모여 온 젊은 목사들이 내방했다. 한국에 온 루터랜미조리 시노드소속이어서 극단을 걷는 보수파다. 그러나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한신출신이었기에 나와는 가까이 지냈다.

23() - 오전 예배는 경동교회에서 드렸다. 예배 후에 강원룡 목사가 경동교회 찬양대원들을 Academy에 초대하여 오찬을 대접한다. 나도 동참하여 저녁때까지 환담했다.

나는 한 2개월 동안 캐나다에 갔다 올까 하는데 어떠냐고 강 목사에게 물었다. 그는 한국 정세가 참으로 나를 요구할 때까지 얼마 동안 캐나다에 계시는 것이 좋겠다고 권한다.

5:00PM에 일본 아카데미 사람 요시노 목사와 한신대 강사 사와 澤正彦 목사가 내담했다.

4:00PM에 카톨릭시보 여기자가 내방하여 근황을 전해 준다.

131() - 장준하와 백기완에게 15년 징역이 구형되었다고 보도되었다.

25() - 신년휘호 몇 폭 썼다.

작가 이호철[1]이 간첩혐의로 구속됐다고 지상에 보도되었다. 이호철은 충실한 민주동지로서 첨부터 우리와 고락을 같이 했었다. 그는 연행되었다. “왜 민주운동 그룹에는 그토록 충성이냐고 따지더란다.

소설 재료를 얻으려고 그랬오!”

26() - 9:00AM에 신촌 개발공사에 가서 이민을 위한 Orientation[2]의 모임에 참석했다. 보통 하루종일 있어야 하는데 한 시간 후에 가라고 해서 돌아왔다. 번호는 103이었다. 1년 안에는 전엣 조서가 통용되기 때문이란다.

관용과 함께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 박근원[3] 박사 딸 우인양을 문병하려는 것이었다. 어제 퇴원했다고 한다. 그 후 귀여운 우인은 뇌암으로 먼저 갔다.

27() - 2:00PM에 성서공회 실행이사회를 소집했고, 4:00PM에 베다니 학원 이사회를 불렀다.

28() - 한신빌딩에서 한신이사회 인사위원회에 참석했다. 퇴직 교수 거의 전부가 복직됐는데 전경연[4] 박사 것만 부결되었다. 그 이론이 무사주의여서 나는 도중에 나와 버렸다. 후일에 전경연 박사도 한신 교수진에 들어갈 수 있었다.

211() - Nostradamus[5]“The Centuries”[6] 대예언이란 책을 읽었다. 19997월에 인류가 전멸한다고 예언했다.

그는 물론 크리스천이다. 기발한 천재였던 것 같다. “괴테와 같은 시대였고 친구였으며 괴테도 파우스트에 그의 예언을 인용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는 어떻게 조화될 것인가! Radical한 종말 심판론은 창조주의 전 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와 어떻게 일치될 것인가.

212() - 큰 눈이 내린다.

이른 아침에 조원길[7] 목사가 왔다. 이달 15일에 Elham 대학에 유학간다고 했다. 작별 인사 방문이었다.

213() - 신학교 신입생 Interview모임에 참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오는 지원자 중에는 유망주가 많은 것 같다. 서울법대 졸업생들에게 왜 법조계에 나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법이 있어야지요!” 하고 대답한다.

소련의 노벨 수상자 솔제니친[8]이 고국에서 추방됐다고 보도됐다.

214() - 5:00PM에 향린교회에서 안희국 한신교수 설교집 출판기념과 그의 환갑 축하잔치가 있어서 참석했다.

서평은 서남동 교수

약력은 문익환 목사

축도는 장공

아주 간결한 잔치였고 참석자는 약 200명이었다.

밤에 김연준 한양대 총장이 수유리 우리집에 내방하여 11:00PM까지 담화했다.

215() - 총회 사무처에 들러 신우관 회계서류에 Sign하고 세금관계 보고를 들었다. 모든 종교단체와 교회당 울타리 밖에 있는 목사관 등에는 예외 없이 과세한다는 지시가 고지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급징수한다고 했다. 그러나 교계의 반대가 더무 심해서였는지 몰라도 결국 유야무야로 그 자체가 둔갑하고 말았다.

2:00PM에 대법원 117호 법정에서 열리는 민주수호 청년협의회사람들에 대한 공판광경을 참관했다. “○○의 서재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있었다. ○○의 방에는 백남석[9]의 조선경제사가 있었다등등이 기소이유라 했다.

 

그 중에는 서적상도 한 사람 섞여 있었다. 그는 불온서적을 유포시켰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그의 진술은 이러했다. 나는 법 절차를 어긴 일이 없다. 서적 구입 규정에 충실했다. 일본에 주문하기 전에 구입할 서적 목록을 작성하여 주문허가를 받는다. 허락된 서적만을 주문한다. 책이 온다. 그러면 그 책을 검열관에게 드려 내용을 검사하게 한다. 그 검사에 통과된 책만을 판매한다. 통과 안된 책들은 반송한다. “나는 그대로 해 왔다.”

그런데 내가 왜 죄인으로 끌려다녀야 하느냐?” 하고 차근차근 진술했다. 그의 답변은 묵살됐다.

그날에는 심문으로 끝내고 그들은 다시 고랑에 손발이 묶여 형무소에 갔다.

함석헌, 천관우와 나는 공판정에서 나오다가 길가 어느 초라한 다실에서 차 마시고 문안을 나누고 작별했다. 그것이 천관우와의 마감 면회였다.

218() - 11:00AM에 김연준 총장이 차를 보내 자택에 초청한다.

12:00AM에 거기서 민관식[10] 문교부장관과 나를 오찬에 동석하게 한다. 인사를 교환하는 정도로 끝냈다.

2:00PM에 민 장관은 가고 나는 남아서 김 총장과 장시간 간담했다.

220() - 2:00PM에 총회 사무실에서 학생관건축위원회가 열렸다. 건축비 1,300만원을 연동에 있는 기독교 연합빌딩에 투자하기로 의결했다. 그 돈을 지금까지는 한신대에 대여했었으나 저리였고, 통화팽창 관계도 있고 해서 부동산에 투자하기로 가결한 것이다.

221() - 나의 도가 여권신청서를 제출했다.

222() - 한신대 졸업식 날이다.

2:00PM에 한신대 졸업식에 참석했다. 졸업생 45명이다.

223() - 저녁에 한신대 젊은 교수들이 내방했다. 228일부터 31일까지 특강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228() - 10:30-12:15AM 2시간 한신대에서 특강했다.

31() - 창천 감리교회에서 3.1절 기념예배를 드린다. 그 교회 단독행사다. 담임 목사인 박춘화[11]가 한신대 졸업생이라는 인연으로 나에게 설교를 청했던 것이다.

박춘화 목사는 한신대 재학중부터 8년에 걸쳐 그 교회를 목회한다. 교인이 약 200명이고 교회 행정이 정돈되고 짜여 있었다. 기미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과 인연 깊은 교회여서 박춘화 목사는 그것을 그 교회 전통의 귀중한 하나로 충성스레 지키는 것이었다. 천관우, 김동길[12]도 출석했었다. 내가 어떤 내용의 설교를 하나 궁금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32() - 손녀 명은을 안고 산책한다. “할아버지의 즐거움이다. 이건 오늘만이 아니라, 거의 매일 행사로 되어 있었다. 정보원이 멀지감치 따라다니는 모양이었다. 내 다니는 코오스가 변경될 경우에는 갑자기 나타난다.

33() - 경동교회에서 예배했다.

W.C.C. 중앙위원이고 바아젤 밋션회장이라는 Rossel목사가 설교했다. 설교 요지는 교회론이었는데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전파를 위탁맡았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A) 경제적으로 Share하고 (B) 사회적으로 인간차별이 없고, (C) 다양성 안에서의 UnityFellowship, 즉 친교를 증진해야 한다 등등의 내용이었다고 기억된다.

밤에는 T.V.로마의 휴일을 감상했다.

34() - Dr. Kang과 함께 Koreana Hotel 22층에서 식사를 나누면서 Academy 이사회 진행에 대하여 간담했다.

35() - 관용을 데리고 김연준 한양대 총장을 방문했다.

나의 캐나다 가는 여권이 나왔다. 주로 관용이 수고했다.

36() - 캐나다행 여권과 여행절차를 전부 완료했다.

310() - 오늘은 노동의 날이다.

3:00PM에 인천 산전 Center에 갔다. 거기서 3.10노동절[13] 기념예배 모임이 있어 설교했다. 감리교에서도 같은 지역에서 같은 사업을 하고 있었으나 소속단체의 한계선을 넘어 협동할 만큼 폭넓은 것은 아니었다.

이국선[14], 전주석[15], 전택완[16], 길진경[17] 등 여러 친구의 친교를 감사한다.

311() - 6:00PMAcademy House에서 Dr. Kang이 신양섭, 조덕현[18], 이영민[19], 이영찬[20], 이해영[21] 등을 만찬에 초대하고 나의 Canada여행 계획을 피력했다.

Dr. Kang얼마 동안 떠나 계시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알기 때문에 나는 찬성한다고 말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도 찬의를 표시한다. 그러나 이해영만은 굳어진 표정으로 첨부터 끝까지 한마디 말도 발언하지 않았다.

그때 이해영은 당뇨병이 심해서 정양 중이었다. 결국 이해영과의 이 순간이 영원한 작별이었다. 그의 침묵은 지금도 나에게 Abyss로 남아있다.


[각주]

  1. 이호철(李浩哲, 1932~2016) - 원산시 출신의 소설가. 분단 문학의 거장이며, 본인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남과 북, 전쟁과 분단에 대한 소설을 주로 썼다. 박정희 정권 때 민주화 운동에도 투신하여 고은 시인과 자유실천문인협회를 창설했다.
  2.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 - 새로 입학한 학생이나 신입 사원, 새로운 일을 하는 사람 등에 대한 사전 교육이나 적응 지도
  3. 박근원 1934년 전북 고창 출생. 정읍 농림중고등학교(정읍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듀북대학교 신학대학원(S.T.M.)과 아퀴나스 학원대학 신학부(Ph.D.)에서 학위를 취득하였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하였다. 한국신학대학 교수, 학장을 역임하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 원장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 회장과 실천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예배관련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4. 전경연(全景淵, 1916~2004) - 일본 도쿄 신학대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30여년간 한신대 신약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4년부터 1990년까지 <복음주의 신학총서> 33권을 간행하여 세계 신학의 흐름을 한국에 소개하는 등 한국 신학의 연구 환경을 한층 높였다.
  5.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1503~1566) - 프랑스의 천문학자, 의사,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는 라틴어 이름이고 성모의 대변자라는 뜻이며 본명은 미셸 드 노스트르담(Michel de Nostredame)이다. 1555년에 처음 출판된, 운을 맞춘 4행시를 백 편 단위로 모은 예언집으로 유명하다.
  6. 쿼티렌이라 불리는 1,000여편의 4행시 모음은 그를 전설로 남게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3년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예언록을 작성했다. 이로써 942편의 4행시가 탄생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4행시 저서 예언록이 1955년 출간된 이후로 이 책은 성경, 셰익스피어 작품과 더불어 독자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재출판되었다. 정확한 날짜나 사건을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노스트라다무스는 자신의 점성술을 이용하여 종말의 시기를 예언했다. 그가 예언한 종말은 1999년과 3997년 혹은 7000년으로 해석에 따라 시기가 각각 다르다.
  7. 조원길(趙元吉) - 1935년 경상북도 영덕군 출생. 강구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포항동지상업고등학교 야간부를 졸업하고 1961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1969년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M.A.)을 졸업하고, 미국 Earlham 신학대학원, 미주리 주의 Springfield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대학원을 졸업(M.A.)하였다. 1975년에 남성교회를 담임하여 2005년 은퇴하기까지 한 교회만을 섬겼으며, 장공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 이사장(2010~2013), 사랑의봉사협회 이사장, 만수김정준박사장학회 명예회장을 역임하였다.
  8.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 - 러시아의 소설가, 극작가, 역사가. 스탈린 시절 10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1962년 스탈린 시대 강제 노동 수용소의 비참한 현실을 다룬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연재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7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73년 유형지에서의 잔학상을 폭로한 수용소 군도가 해외에서 발표되자 서독으로 추방되었다가 1919년 소련이 붕괴된 후 1994년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9. 백남운의 오기인 듯
  10. 민관식(閔寬植, 1918~2006) - 대한민국 의학자, 약학자, 정치인.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일본 교토 제국대학 농학부 농예화학과를 졸업하고 약사시험에 합격 약사 면허를 취득하였고, 일본 교토대학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한체육회 회장과 대한약사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는 문교부장관을 맡았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1986),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1989) 등의 직책을 맡았다.
  11. 박춘화 목사는 1966년 창천교회 부목사를 거쳐 1971년 담임목사로 취임하였고, 2007년에 은퇴하고 원로목사가 되었다.
  12. 김동길(金東吉) - 1928년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편에서 출생하였다.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에반스빌 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한 뒤 보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신 이후에 함석헌의 씨ᄋᆞᆯ의 소리에 노골적인 체제비판글을 게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였다. 민청학련 사건(1974),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1979)으로 해직되기도 하였다. 1984년 대학에 복직한 이후에는 정권 친화적인 인물로 변모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3.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 시절 1958년 이후, 대한노총 창립일인 319일을 노동절로 정했으며, 박정희 정권 때인 1963417일에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여왕벌을 먹이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꿀만 나르는 꿀벌처럼 일잘하는 근로자가 필요했다. ‘근로자의 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4년 정부는 51일을 근로자의 날로 개정하였다.
  14. 이국선(李國善, 1919~1986) 일본의 동지사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였고 해방 이후 완도 및 제주도 등지에서 목회하다가 목포중앙교회에서 1952년부터 1963년까지 교육목사로 봉직하였다. 419혁명 이후 인천으로 옮겨 1963년 인천 대성목재공업 산업전도실 목사로 산업선교운동을 시작한 뒤, 1968년부터 1986년까지 도시산업선교센터 원장을 역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79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64회 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0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리는 미국 연합장로교회에 진상을 알리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15. 전주석 군산 동부교회에서 안병부 목사님의 부흥사경회를 통해서 한신대학을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1952년 한신대학에 입학하였다. 1957년 졸업하였다. 인천 용광교회 원로목사.
  16. 전택완 서울성남교회 장로로 1949년 임직하였고, 1981년에 원로장로로 추대되었다.
  17. 길진경(1902~1989) 길선주 목사의 차남으로 1902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대학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참가하여 투옥됨에 따라 졸업하지 못했다. 출옥 후 중국 남경으로 망명하여 금릉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했고 193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해방 직후 공산당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미국 유학(듀북신학교)을 거쳐 한남신학교 교장, 1960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45회 총회장을 지냈고, 1961년 한국기독교협의회 총무로 활동하였다.
  18. 조덕현 목사는 1929년 중국에서 태어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서울로 이사하여 17세의 나이로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에 들어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1952년 군목으로 입대하였다. 1956년부터 한일교회에서 시무하면서 1970년 서울노회장, 1977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62회 총회장을 지냈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노회장과 총회장을 지낸 목사는 전무후무한 실정이다. 1981년 미국 뉴욕한인중앙교회로 옮겨 목회활동을 지속하였다.
  19. 이영민(1925~2014) - 192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이영민 목사는 한신대학을 졸업하고(1951),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임마누엘 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 총무(1964~1976)를 역임하였고, 생명의전화 초대원장(1976)을 역임하였다.
  20. 이영찬 목사는 한신대학을 1952년에 졸업하였으고, 서울 성암교회(1960~1994)30여년동안 목회하였으며, 1984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69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21. 이해영 목사는 1948년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성남교회 제4대 당회장(1959~1972)으로 1964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49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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