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57) 北美留記 第一年 1974 - L.A.에

L.A.

 

914() - L.A. 순강의 길을 떠난다.

9:10AM에 토론토 공항을 떠나서 10:55AML.A.에 도착한다. 시차가 3시간이나 되니 사실은 만 5시간 비행이다. L.A.공항에는 양준철 박사와 송선근 선생이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양준철 박사 어머니 최옥명할머니 Apt.에 유숙하기로 했다. 별명이 경동교회 할머니. 경동교회 창설교인으로 집사로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915() - 라성 한인연합교회에서 설교했다.

이 교회는 1906510일에 창립된 L.A.에서 제일 나이 먹은 교회다.

우상범[1]이라는 임시 목사가 강단을 맡고 있었다.

점심 후에는 할리우드에 있는 홍동근[2] 목사 교회에서 설교했다. 제목은 자유의 선용이다.

그 교회에는 지면(知面)[3]의 옛 친구가 많이 모였었다. 장로 안수식, 전입식, 집사, 권사 임명식 등도 있었다. 말하자면 이신복 장로, 박재훈[4] 장로, 김춘식 장로, 홍양도 권사, 정재숙 권사, 임문규 권사 등 여러분이 임직되는 것이었다.

916() - 이창식 목사 안내로 L.A. 명소들을 구경하고 박명필 전도사 댁에서 점심 대접받고, 나행렬 김재순 부부의 접대도 받았다. 모두 친교의 인정다움이다.

그 당시의 L.A.는 아직도 박정희 정권의 영역인 것 같았다. 한국어 신문에서 집회 광고도 내주지 않고 집회 장소도 얻어낼 수 없었다. 차상달[5] 선생과 석진영[6] 여사가 결사대처럼 적진을 돌파했다.


[각주]

  1. 우상범 목사는 19667월 서울 새문안교회(예장통합)에서 중남미 지역으로 파송한 선교사 1호로 멕시코에서 6년간 활동하며 맥시코 한인 선교의 첫 단추를 뀄다. 이후 미국의 LA의 나성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를 거치는 등 미국과 멕시코를오가며 목회와선교활동을 펼쳤다. 황해도 신천 출신인 우 선교사는 김익두 목사가 전도사로 있던 서북교회 출신이다. 20126LA에서 지병으로 82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2. 홍동근(1926~2001) - 평양 출생. 한국전쟁 중 월남하였고 북의 평양신학교, 남의 장로회신학교를 거쳐 미국의 뉴욕신학교와 풀러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서울 영락교회와 동신교회에서 부교역자로 목회하다가 일본 경로한인교회를 섬기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0년대 미국으로 이민하여 목회활동을 하다가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을 왕래하면 통일운동을 벌였고, 1989년부터 미국과 평양을 오가며 김일성대학에서 기독교를 가르쳤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3. 지면(知面) - 만나서 알 만한 사이
  4. 박재훈(朴在勳) - 1922년 강원도에서 출생하였다. 1942년 평양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한국전쟁 때 해군본부 군악대 하사로 복무하였다. 전쟁 이후 초등교원과 중등교원을 지내다가 장수철 등과 기독교 음악 활동을 하며 서울 영락교회 장로회 한양대학교 음악학과 교수를 지낸 그는 1973년 미국을 거쳐 1977년 캐나다로 건너가 60의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큰빛장로교회를 목회하다가 조기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섬겼다.
  5. 차상달(車相達, 1905~1992) - 충청북도 진천 출생. 경기고보와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15세 때 31운동으로 부자가 함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LA 퀘이커회 대표, 조국민주회복 남가주 국민회의 수석의장을 역임하였고, 1983년과 1986년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하여 남한 정부에서는 기피 인물이 되었다.
  6. 석진영(石鎭英, 1926~2002) -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Lutheran Bible Institute 졸업, Life Bible College를 졸업하였다. 울산중학교 교사, ‘복음의 전령발행 및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찬송가 작사자로 활동하면서 30여곡을 작사하였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믿는자여 어이할꼬라는 찬송가 작사자로 유명하다. 한인가정상담소(당시 가정법률상담소) 초대 이사장을 맡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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