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70) 北美留記 第一年 1974 - 서독에

서독에

 

1128() - 서독에로 간다.

서독 민주운동의 공동전선 형성과 확장, 친구들과의 친교, 관광 등 다목적여행이다.

5:25PM에 토론토를 출발 Luthansa기로 Frankfurt에 직행한다.

8:25AMFrankfurt에 도착했다. 종착역이다. 한신학부 제2회 졸업생인 이화선[1] 박사 부부와 민건위원장이 마중 나왔다.

이화선 박사 댁에서 한참 자다가 점심 후에 Local기로 Duisburg에 간다.

여기는 제1차 대전, 내 나이 아홉 살 때에 신문에서 날마다 읽던 루우르지방이다. 무기 공장과 유명한 제철소가 있는 탄광 지대이다. 65년 후에 나 자신이 여기를 심방 온다는 것은 놀라운 섭리라고 느낀다.

이차대전 후에 이 탄광지대에 한국인 광부가 집단 고용되어 천단위를 헤아린다. 장성환[2] 목사는 그들의 목자로 그들 가운데 선교한다.

병원 간호원으로서도 한국 아가씨들이 집단으로 고용되었다. 3천명이 각 고장 병원에서 성실하게 봉사한다. 고단하고 외로운 아가씨들이다. 장성환 목사는 그들의 목자이기도 하다. 장 목사는 서독 선교의 개척자요 원로다. 지금도 주일 날이면 아홉 군데를 돈다. 새벽부터 아홉 곳에서 차례차례 예배한다. 사모님이 Good Driver조수격이다.

나는 듀이스벅 본 교회에서 설교했다.

며칠 후에 서백림의 정하은 박사를 방문했다. 그의 댁에 며칠 유하면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때, 형장과 동과 서를 갈라놓은 국경 아닌 국경과 미국 자본에 의한 산업 부흥상을 보았다.

1214() - 점심식사는 윤이상[3] 박사댁에서 초청한다. 고요한 언덕 중턱에 작곡가로서의 바람직한 저택을 건축하고 있었다. 친히 설계했단다. 순진한 분이었다. 나는 한국 멋이 섞인 대작을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고 김기석[4] 박사 아드님인 김정량 씨과 그의 부인 김형규 여사가 선친의 추도예배를 드린다고 나에게 추도사겸 설교를 부탁했다. 그대로 했다. 김기석 서울대 교수는 기독학생운동 초창기에 나와 수고를 나눈 동지기도 하다.

백림교회 운영위원인 김정신 씨가 만찬에 초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215() - 서백림 한인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설교했다. 제목은 세상ㆍ교회ㆍ인간의 관계라 붙였다.


[각주]

  1. 이화선 목사(아내 김순실 작가)는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7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독일에 있는 한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였다. 이화선 목사는 개인 잡지 화해를 통해 기독교와 맑시즘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접촉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부터 프로코뮤니스트’(procommusint)로 몰린 적이 있다. 그는 감리교신학대학에서 공부한 이영빈 목사와 함께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 대화를 성사시켰다. 이 모임은 해외 교포 기독자들과 조선그리스도련맹 지도자들과의 대화 모임으로 첫 모임은 198111월 비엔나에서 열렸다. 이화선 목사는 2017년 독일에서 소천하여 프랑크푸르트에 묻혔다.
  2. 1970~80년대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신앙 생활을 위해 독일 개신교의 요청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1972620일 최초로 독일에 파송한 제1호 선교사.
  3. 윤이상(尹伊桑, 1917~1995) -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출신의 독일 현대 음악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이다. 경남 산청 출생. 1963년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어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금지하였다.
  4. 김기석(金基錫, 1905~1974) - 본관은 광산, 호는 서은(西隱). 평안북도 용천 출생.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도호쿠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오산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월남하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였다. 칸트 철학과 인도 철학을 연구하였고, 국민윤리교육 및 도의교육을 강조하였다. 516 군사쿠데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고문(1963~1964), 경남대학 학장(1971~1974)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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