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83) 北美留記 第二年 1975 - 최홍희와 최덕신 장군의 접근

최홍희와 최덕신 장군의 접근

 

25() - N.Y.의 최석남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최홍희[1] 장군에게 내가 말해서 향군 반박운동을 촉진시켜 달라는 부탁이었다.

29() - Korea House에서 최홍희 장군을 만나 근황을 묻고 듣고 했다. 그 전에도 그의 자택에 여러 번 초대받은 일이 있었다.

오후에 이 목사가 와서 같이 이 목사 집에 갔다. 최홍희 장군과 그 식구를 이 목사가 디너에 초대했는데 나도 동참하라는 것이다. 최 장군은 태권도 총재로서 박정희 타도가 그의 일편단심이다. 민주운동 자체에는 동정자정도인 것 같았다.

216() - 일본 민통에서 장거리 전화가 왔다.

국민투표 이후에 박정희의 독재체제 강화를 규탄하는 민주단체 세계대회를 소집한다는 것이었다. 나더러 꼭 참석하라고 했다. 최홍희 장군은 나의 참석을 강권한다. 나는 못 간다고 대답했다.


[각주]

  1. 최홍희(崔泓熙, 1918~2002) - 함경북도 명천군 출생. 국제태권도연맹이 주장하는 태권도의 창시자이다. 일본 주오 대학 법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던 1944년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 학병을 중심으로 전국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했다가 검거되어 6년형을 선고받아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되었고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1959년에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였다. 1961년 박정희와 쿠데타를 논의하였으나 쿠데타 성공 후 소외되었다. 1966년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창립하고 총재로 취임하였다. 1972년 캐나다로 망명한 후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펼쳤고 북한을 몇 차례 방문하였다. 2002년 평양에서 사망하고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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