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1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20) 主人(주인)과 主役(주역) - 하늘과 땅과 나

하늘과 땅과 나

 

주역[1]하늘과 땅과 내가 서로 같아졌다란 구절이 있다.

내가 거처하는 방은 맨 아래층이어서 여름 더운 줄 모른다. 들창 커텐을 제쳤더니 화끈 햇살이 들이닥친다. 오늘은 진짜 여름인가보다. 계곡의 바위틈을 굴러내리는 수정같이 맑은 물줄기를 오르내리던 소년 시절이 그리워진다. 아내는 옷까지 갈아입고 쇼핑도 할 겸 나가자고 서두른다.[2]쇼핑센터에서 모색이를 돌며는 막다른 골목이 깊숙한 계곡에서 끝난다. 사닥다리 계단을 내려가면 꽤 큰 개천이 자갈 밭 위를 어루만지며 간다. 금년들어 여름 볕 첫날이다. 물이 맑길래 발 잠글 욕심으로 맨발이 됐다. 그러나 께름해서 잔디만을 밟기로 한다. 여기저기 하수도 물이 합류하기 때문에 개천은 맑아도 더러울거라는 나의 결벽성 때문이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도연명[3]魚父(어부)”의 입을 빌어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흐렸거든 발을 씻어 세상과 흐름을 같이할 것이지 뭐 그리 도도하게 고결하냐는 나무람을 듣는다.[4] 그때 창랑의 물은 흐렸어도 오늘 여기를 흐르는 이 맑은 개울보다 깨끗했을 것이다.

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 잔디 위에 큰 대자로 누웠다. 푸름이 숨쉬는 흙향기가 몸에 배인다. 뜨겁던 해도 얇은 구름 속에서 형광등처럼 보드랍다. 언덕을 덮은 숲 위를 흰 갈매기 두세 마리 날아온다. 잔디, 갈대, 혼자 선 노목, 서로 부축하며 자라는 숲의 억억만 잎사귀들, 흥겨운 생명의 무도장이다.

지금 내게는 하늘과 땅이 한데 어울렸다. 무릉도원[5]이 따로 있을까 싶어진다.

3시에 나왔는데 6시가 됐다. 일어날까 하는데 어떤 아낙네가 동무하는 큼직한 개가 다짜고짜 뛰어와 내 낯을 핥는다. 혓바닥이 산뜻하게 찼지만 친밀 감각이 오히려 고마웠다.

돌아와 목욕하고 시원한 아래층에서 낮잠 잔다. 나 진정 걱정 잊은 은사였던가?


[각주]

  1. 주역(周易) - 중국 유학(儒學)의 주요 경전 가운데 하나. BC700년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과 우주의 변화를 해석하는 중국 사상의 바탕이 되는 책이다. () 나라 때에 길흉을 점치는 원리로 널리 쓰였기 때문에 <주역(周易)>이라고도 한다. 이 책을 역경이라고 부른 것은 송()에 이르러서인데, 특히 정주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역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후 유학의 여러 경전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경전으로 알려졌다.
  2. 서둘르다 - ‘서두르다’(급히 해내려고 바삐 움직이다)의 비표준어
  3. 도연명(陶淵明) - 중국 동진(東晉), 송나라 때의 시인(365~427). 이름은 잠()이며 자는 연명(淵明) 또는 원량(元亮)이다. 29세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41세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 삼아 사임하고 재차 관계(官界)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 관직을 사임하면서 쓴 시()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이후 향리의 전원에서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63세에 생애를 마쳤다. 그의 시는 사언체(四言體) 9편과 오언체(五言體) 47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따스한 인간미와 고담(古談)의 기풍이 서려 있다.
  4. 이 문구는 도연명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의 초나라의 굴원(屈原, B.C. 340~278)이 쓴 어부사의 한 부분이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5. 무릉도원(武陵桃源) - 도연명(陶淵明)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가상의 선경(仙境). 중국 후난성의 한 어부가 발견하였다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낙원이다. ‘별천지(別天地)’이상향(理想鄕)’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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