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5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62) 細語錄(세어록) - 왕과 진리

왕과 진리

 

빌라도앞에 선 예수에게 빌라도는 묻는다.

네가 왕이냐?”

예수는 대답한다.

네가 말했다. 나는 진리를 증거하러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음성을 듣는다!”

어리둥절한 빌라도는,

진리가 무어냐?” 하고 질문한다.

예수는 그의 앞에서 진리에 대한 강의를 시도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는 심판정이지 강의실이 아니고 또 믿음 없는 이방인에게 헛수고 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다음은 골고다로 향한 길이다. 그것이 진리의 행진이다. 그리고 무덤에 묻힌다. 그러나 진리는 무덤 속에 매몰되지 않는다. 부활하여 무덤을 헤친다.

이런 극적인 사건들이 지난 한 해 동안에 우리 한국의 교회와 역사 속에서 연출되었다.

그리스도는 봉사한다. ‘이란 말도 쓴다. 그러나 그것은 으로서의 이다. 그는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진리를 바탕으로 한다. 진리 아닌 사랑은 거짓 사랑이다. 거짓 사랑처럼 가증스러운[1] 것은 없다. 그것은 증오무관심보다 더 가증스럽다.

한국에서는 부정부패가 민족 성격을 파먹는다. ‘같이 퍼진다. 그런데 죽어가면서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알고서도 모르는 체 한다. 정의로 가장한 불의기 때문에 안보란 보자기를 뒤집어 쓴 부패기 때문에 사람이 반중건중이 되는 것일까?

그리스도는 말한다.

내가 곧 진리다”, “내가 곧 생명이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 증인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생명을 선교한다.

그리스도가 그런 분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는 가고 해는 온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진리을 선포한다. 그것이 참 삶의 길이라고 증언한다.

불의가 권좌에 앉았다고 진리가 떠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떠는 대신에 심판한다. 우리는 빛의 아들들로서 역사 속에 배여들 것이다.

진리가 무어냐?” 진리의 왕이 선두에 서시니 그의 음성을 들으며 따라가는 것이다.

 

[1976. 1. 3]


[각주]

  1. 가증스럽다 괘씸하고 얄미운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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