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5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66) 細語錄(세어록) - 그림과 음악의 하루

그림과 음악의 하루

 

921, 겹으로 덮힌 구름이 무겁게 내리 누르는 그늘진 날씬데 가을 빗줄기가 올까말까 망설이는 불안정한 날씨다. 그래도 맘먹은 대로 나가자면서 박재훈[1] 박사가 차를 몰고 왔다.

열 한 시 반에 떠났다. 떠나자마자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차 속에서의 우리는 오겠거든 와라!” 식으로 하늘을 깔보는 뱃장이었다.

지금 가는 데는 토론토서 15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클라인벅이란 한적한 시골인데, 거기에 캐나다 초창기 화가 아홉 분의 그림이 전시돼 있다는 것이다. 우거진 숲속에 바랔식으로 된 화랑이 연결된 행랑까지 쳐서 일곱 채 정도 이어 있었다.

그림은 거의 다 풍경화였으니 화가마다 특색이 달라서 심심치가 않았다. 그래도 현대 추상화처럼 아주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기에 미술에 소양 없는 나로서도 제법 알고 보는 것 같아서 신기로웠다.

나는 떠나기가 허전해서 거기 그림들을 모조리 모은 화첩을 샀다. 박 박사는 여기 화랑그림이 든 81년도 캘린더를 내게 선사했다. 기억이 가을의 낙엽처럼 시들기 전에 때맞춰 푸름을 불어넣자는 것이다.

오늘 저녁 여덟시부터 토론토 로얄콘서바토리에서 고 이해영[2] 목사 장남 화정 군의 피아노 독주회가 있어서 기어코 참석해야 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대로 달리면 시간에 맞아 떨어질텐데 웬놈의 차가 그렇게 많은지, 거기다가 어딘가 앞에서 차 사고라도 난 것으로 짐작돼서 20분 이상 자라걸음으로 애태웠다. 겨우 길목이 풀려 초속으로 달렸지만 첫 순서에서는 추방자신세였다.

2부 마감순서인 무쏘르스키[3] 전시회 그림[4]이란 곡은 금방 전시회그림들을 보고 온 나로서는 무슨 인연인 것 같기도 했다. 그림의 아름다움이 녹아서 음악의 선율이 흐르고, 그 소리의 아름다움이 엉켜서 그림이 됐다면 미술 세계의 자유, 예술인의 신통력 등등은 속세 위에서 안에로 내려온 신선일 거라 생각해 봤다.

이런 화가, 음악가, 시인, 문학인들은 타고난 천재들일 것이다. 결국 범용[5]의 레벨을 넘는 천재들만이 말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하겠다. 나는 근일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끼오[6]의 글들을 읽으면서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타고난 천재들만이 말할 수 있는 언어들이었다. 그 머리의 섬광이 너무 눈부시었다. 그림도 시와 음악도 모두가 천재들의 로고스

나는 갑자기 김지하[7]를 생각했다. 그는 하늘이 한국 땅에 보낸 천재. 그걸 모르고 권력의 돼지떼들은 그를 돼지들중의 하나인양 물고 찢고 한다. 김지하는 돼지에게 던져진 진주랄까? 짓밟히고 먹히고 해도 진주는 진주여서 돼지 피, 돼지 살은 되지 않는다. 먹혔어도, ‘진주대로 배설될 것이다. 그러면 어떤 극성스런 진주장사가 제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걸 살 것이다.

그림과 음악의 하루는 뒤늦게 개인 가을의 새파란 하늘에 영광의 무늬를 수놓았다. 아름다운 계절의 자랑이었다.


[각주]

  1. 박재훈(朴在勳) - 1922년 강원도 출생. 194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첫 데뷔한 그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오르가니스트로 데뷔한 이후 일본 유학을 하다가 징병을 피하여 일본 유학 생활을 포기 및 단념하고 귀국, 광복 후 월남하여 1949년 대한민국 해군 하사 임관하여 대한민국 해군본부 정훈과에 배속되었다가 이듬해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해군본부 군악대 하사로 복무하였고 1952년 해군 하사 예편한 그는 이듬해 1953년 한국 전쟁 종전 이후 서울에서 초등교원과 중등교원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장수철 등과 함께 기독교 음악 활동을 하며 서울 영락교회 장로와 한양대학교 음악학과 교수를 지낸 그는 1973년 미국을 거쳐 1977년 캐나다로 건너가 현재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개신교 목회자 겸 원로목사로 음악 활동과 사목 활동을 겸하고 있다.
  2. 이해영 목사는 1948년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성남교회 제4대 당회장(1959~1972)으로 1964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49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3. 모데스트 무소륵스키(1839~1881) - 러시아의 작곡가. 오늘날의 프스코프 주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피아노를 공부했으나 사관학교에 지원(당시 러시아는 음악원이 없었다), 1856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청산하고 농노 해방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한 뒤 창작에 몰두하였다. 미하일 글린카의 뒤를 이어 러시아의 국민 음악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작곡가로서 지식은 빈약하였으나, 타고난 음악적 재능으로 좋은 작곡을 하여, 프랑스 인상파 등 현대의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4. 무소륵스키의 대표적인 기악곡으로 손꼽히는 전람회의 그림은 선율의 구성이 간결하면서도 대담하고 강건한 표현과 고난이도의 기교로 이루어져 19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피아노 음악 중 하나로 꼽힌다. 다채롭고 신선한 음악을 통해 피아니스트의 기교를 한껏 과시할 수 있는 작품으로, 관현악 편성으로도 자주 연주된다. 여러 작곡가들이 이 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했지만 화려한 색채감을 자아내는 모리스 라벨의 편곡이 가장 자주 연주된다. 무소륵스키가 그의 친구인 건축가 빅토르 하르트만을 기리기 위해 쓴 피아노, 관현악 모음곡.
  5. 범용(凡庸) - 됨됨이가 평범하고 변변하지 못함. 또는 그런 사람.
  6. 미시마 유키오(Mishima Yukio, 三島由紀夫, 1925~1970) - 20세기 일본 최고의 소설가로 인정받고 있다. 도쿄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948~49년 일본 대장성 금융국에서 일했다. 자전적 소설 <가면의 고백>으로 소설가의 길을 걸었고, <사랑의 목마름>, <금지된 색> 등 많은 작품을 썼다. 마지막 작품 <풍요의 바다>4권으로 된 역사 이야기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좌익 봉기가 일어나거나 공산주의자들이 공격해올 경우 덴노를 보호하는데 이바지하려는 생각으로 약 80명의 학생들을 모아서 다테노카이라는 사병대를 조직했다. 19704명의 다테노카이 추종자들과 함께 총감실을 점거했고, 전쟁과 일본의 재무장을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 헌법을 뒤엎으라고 촉구하며 할복자살했다.
  7. 김지하(金芝河) -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다. 1954년 아버지를 따라 원주로 이주하여 원주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 중동고등학교를 다녔으며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여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고, 1970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후 다시 구속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에 징역 7년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1980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0년대 이후 생명 존중 사상을 수용하고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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