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7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69)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개똥벌레

개똥벌레

 

내가 열아홉 살 때였다. 직장의 직무 관계로 두만강 하류 일대를 돌고 있었다.

서수라[1] 어항에서부터 굴포’, 그리고 구룡포늪지대를 헤치고 나가서 조산포까지 갈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루 일정으로서는 벅찬 걸음이다. ‘구룡포늪 가에서 벌써 어둠이 내려 씨웠다. 그 늪은 담수호[2]로 그리 깊지는 않다지만 거의 절벽이랄 수 있는 가파로운 산 자락과 엇물리고 고여 있는 침묵이어서 어딘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온갖 종류의 바닷새들이 밤 새우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새들이 제각기 저희들 방언으로 주고받는 언어가 무던히 시끄러웠는데 차츰 어두워지자 침묵에 잔다. 그 소리까지 잠든 늪지대, 질척거리는 밤길은 더욱 무료했다. 내 걸음은 제절로 빨라진다. 늪지대가 낮은 언덕바지에 막혀 더 퍼지지 못한 고장에는 키들이 갈대가 밀림을 이루고 있다. 뭔가 나올 것 같은 음지. 앞이 갑자기 환해진다. 수백만일 것 같은 작은 불꽃들이 어둠 속을 난무한다. “어허! 저게 도깨비 불인갑다!” 몸이 오싹해진다.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고 결사적인 행진이다. 그건 물론 사단레벨의 반딧불 부대였다.

대낮의 암흑보다는 암흑 속의 형광이 높은 점수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빛이 마광일 수도 있다는 데 두려움이 있었다.

어쨌든, 나는 선땀에 젖은 몸뚱이를 조산진 여인숙 한 구석에 뉘일 수 있었다. ‘조산진은 두만강 가까이지만 강가는 아니고 그렇다고 산꼭대기도 아니다. 그 점이 경원의 용당과는 다르다. 안온한 언덕 복판이 평평하게 꺼진 데에 몇 걸음에 둘 수 있는 돌성이 허물어지다 남았다. 그 성안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가 아담한 비각 속에 서 있다.[3] 그때 조산만호였던 이순신은 강 건너 여진족의 침범을 막는 것이 주요 업무였던 것 같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하면 으레 전라도 다도해와 경상도 강진’, ‘거제도등 남쪽 바다를 생각한다. 마치 그는 거기만 위해 있는 제독인 것 같은 인상이다. 그러나 함경북도 두만강 건너의 거센 민족을 막아내고, 우리 국토의 어느 모새기 한치인들 그들 발바닥에 더럽혀질소냐 싶어, 목숨 걸고 지켜주신 그 자취가 바로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통일한국의 어느 한 귀퉁이도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나라 사랑을 드높여 준다. 오늘날 남한 정부가 울릉도, 죽도, 난도 등등을 일본과의 관계에서 다루는 태도는 괘씸한 데가 없지 않다.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귀포, 거제도의 옥포 이런 금수강산에서도 알짜 비단무늬랄 수 있는 우리의 명승지가 놈팽이[4] 왜족들 소돔으로 더럽혀진다는 것은 진정 민족얼의 치욕이다. 이순신 장군을 우상으로 모시고 그 그늘에서 잡당들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는 오늘의 한국을 충무공은 얼마나 노여워 하실까 싶어진다. 거기 사람들 말에 의하면 나라에 무슨 변란이 있으려면 이 비석에서 땀이 난다고 한다. 미신이라지만, 충무공의 우국심정을 상징하는 속담이다. 우리가 모두 반딧불만큼한 빛이라도 몸에 지니고 있다며는 그걸 모아 한꺼번에 어둠의 늪지대를 밝힐 수도 있지 않을까? 개똥벌레는 명함 내놓기에는 점잖지 못한 이름이겠지만 그것은 빛의 벌레다. 빛도 남의 것을 빌어온 빛이 아니라 제 몸에서 만들어낸 빛이다. 혼자서도 반짝이지만, 수십만이 뭉쳐 어둠 속에 불덩이를 날린다. 이순신 장군이 여진을 몰아낸 것처럼 대낮의 암흑을 쫓아버리자는 개똥벌레 서민들이여 용감하라! 회고담에 끈을 달려니까 이런 넉두리[5]가 나오고 만다.


[각주]

  1. 서수라(西水羅) -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서수라동에 있는 지명. 우리나라 최북단의 어항(漁港)이며 군항(軍港)이기도 하다.
  2. 담수호(淡水湖) - 호수에 함유된 총염분의 양이 1리터 중에 500밀리그램 이하인 호수. 건조 지역, 화산 지역, 해안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 분포하며, 가장 일반적인 호수이다.
  3. 녹둔도 전투 - 1587(선조 20) 조산보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 이순신에게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다. 그해 91일 이순신이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여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하는 사이에 추도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사전에 화살과 병기류를 숨겨놓고 있다가, 기습 침입하여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 녹둔도 전투에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열다섯 필의 말이 약탈당했다. 하지만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 이순신은 이경록과 남아서 싸웠고 그 결과 승리했으며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4. 당시 조산만호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및 침략을 예상하고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북병사 이일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 당하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 씌우고 이순신은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1588년의 2차 녹둔도 정벌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
  5. 이렇게 조산 만호로 부임하여 2년 만에 변방을 튼튼히 한 이순신의 업적을 기념하여 이곳 백성들은 슬흔봉이라 하던 이 봉우리를 승정봉이라 바꿔 불렀으며 남녀노소 모두가 돌을 날라 탑을 쌓았는데 그 높이가 사람의 키 한 길 반이 더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순신의 5대손 이민상이 관북절도사로 있으면서 탑을 보고 장군이 나라에 남긴 공적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 하여 1762년에 승전비를 세웠다. 비의 높이는 1.8미터 가로 0.8미터 세로 0.27미터 갓돌은 가로 1.2미터 세로 1미터 높이 0.6미터로 균형이 잘 잡히고 정중성이 갖춰져 있다.
  6. 놈팽이 놈팡이’(사내를 얕잡아 이르는 말)의 비표준어
  7. 넋두리의 북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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