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7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75)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눈 내리던 날

눈 내리던 날

 

요새 다른 날들은 강추위로 낯에 얼음을 비벼 넣은 것 같았지만, 오늘 눈 나리는 바로 지금은 바람도 없고 그리 춥지도 않다. 나가서 아름드리 가로수 밑을 걷는다. 나무마다 눈꽃이 소복하다. 참새가 깃을 털고 날아가면 내 머리 위에 락키[1]의 만년을 흰 하늘이 스친다.

계곡을 찾아 거닌다. 아무도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시냇물은 얼지 않았다. 완만하여 물결이 없다. 굴르잖으니 더 추워 보인다. 내 후배들이 본국의 감옥 속에서 살이 얼어터지는 자기 발을 주무르며 를 구상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소리없이 몸으로 흐느끼는 그들에게는 의로운 자랑과 외로운 슬픔이 있다.

어쩌다가 흐릿한 구름 틈에서 햇빛이 샌다. 눈도 이제는 몇 알씩 휘영청 날릴 뿐이다. 햇살은 밝으면서도 샐쭉해서 웃지를 않는다. 그 야릇한 광파(光波)가 얇은 레이스를 짠다.

크리스마스 츄리에 매달린 솜 송이처럼 억지로 앉아 있던 눈()망울들이 빛을 타고 날아가버린 다음의 나목(裸木)은 벗은 여인처럼 내 앞에서 부끄러워한다.

사람의 이란 뭔가를 밟는 재미로 붙어있는 녀석이 아닐까? 늦은 봄에는 떨어진 꽃잎을 밟는 재미에 홀린다. 늦은 가을에는 낙엽 밟는 재미, 겨울에는 눈 밟는 기분에 좋아한다.

그 중에서 눈 밟는 늙은이의 풍류랄까? 특히 갓 온 눈에 푹푹 빠지며 천천히 시름없이 옮기는 발은 흰 벌에 첫 길을 여는 멋이 있다. 그래서 가슴에 수필을 그린다.

하얀 갈매기들이 떼지어 날아온다. 하얀 눈벌(雪原) 위에 흰 갈매기란 한국에서는 그리 흔한 콤비가 아니다. 인천 갈매기가 서울까지 날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바다같은 호수를 바로 겨드랑이에 낀 토론토는 행복하다.

갈매기들은 호수에서 가 출출해지면 육지에 올라와 고기 창자며 베어버린 생선 대가리 따위를 사냥하는 것이겠지. 오늘도 내게는 풍류이니 하는 감상에 그려지는 그들이지만 그들 자신으로서는 생존을 위한 선택 없는몸부림일 것이다.

그러나 눈 깔린 에 예비된 식탁이 있을 리 없다. 그들은 계곡의 하찮은 개천 여울에 앉는다. 어떤 놈은 헤엄친다. 뭐 먹을 걸 던져주고 싶었다.

나는 털로 안을 짜 넣은 좀 투박스런 반장화를 신었기에 발시릴 걱정은 없다. 그러나 이제 앞길이 창창하달 수 없는 나이니 내게는 시간이 금싸래기다. 도루 걸어 내 방 책상에 마주 앉는다. “내 남은 날들이 주님 영광 더럽히는 기록이 되지 않게 합소서” - 기원을 올리고 붓을 든다.


[각주]

  1. Rocky 캐나다에 있는 로키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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