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7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95) 野花園餘錄(야화원여록) - 중국에서의 ‘패도’와 ‘왕도’ (2) : “왕망”의 혁명과 실패

중국에서의 패도왕도’ (2)

왕망의 혁명과 실패

 

세월가는 동안에 유씨 직계는 안일과 음란 때문에 몸이 약해 수명이 짧아지고 대체로 무능하기도 했다. 그 대신 내척 관계의 타성 사람들은 결사적이었다. 전쟁에는 자원출전하여 공을 세운다. 경쟁자의 질투에 걸려 애매하게 죽는다. 그래도 또 한다. 자기 변호를 위한 설득력도 능숙해진다. ‘상소’, ‘탄핵등을 위한 문장가도 배출된다. 그러나 나라의 뿌리가 썩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왕망’(王莽)[1]이 혁명에 성공하여 ’() 왕조를 전복시켰다. 그는 이상주의자였달까, 이미 상공계급이 발달된 시대에, 한 옛날 주()나라의 농경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정전제(井田制)[2]를 실시하는 등 무리를 저질렀다. 뜻대로 안되느니만큼 탄압과 횡포가 늘어간다. 경제가 궁핍하고 민심이 이반된다.

그는 과격파였다.

 

천하의 모든 농지는 왕전즉 임군의 밭이다. 그러므로 그 매매는 법적으로 금지한다.

노예제도는 원측상 폐지돼야 한다. ‘노비’(奴婢)사속’(私屬)이라고 부른다. ‘사속매매는 법률로 금지한다.

토지는 호족(豪族)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그 소유권과 처분권이 호족들 손에서 고스란히 새여나가 국유화했다. 호족들이 들고 일어난다. 국가경제가 혼란해진다. 빈민들은 비적이 된다.

소금의 전매제를 실시했다. 이것도 호족의 기득권 침해였다.

중소기업자에게 무이자 또는 저이자로 융자한다. 원래 상공업과 금융업은 호족들의 본업이었는데 그것이 왕망에 의하여 국영화할 경향이 짙어갔다. ‘호족들의 반발이 심할 것은 사실이었다.

왕망은 병리연구를 위해 생체(生體) 해부를 명한 일도 있었다.

그는 한왕조를 찬탈했기 때문에 의 시조인 한고조의 신령이 자기에게 덮칠까 무서워 고조묘’()의 문짝들을 도끼로 부수고 도탕(挑湯)을 부었다고 한다. ‘도탕은 귀신 쫓는 주법으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왕망의 사회개혁은 일반 서민을 위한 호의에서 고안, 실시된 것이었지만, 너무 조급하게 서두른 것 때문에 주먹구구식으로 되어 설계도없는 건축자같이 허점 투성으로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조령모개’(朝令暮改)[3]여서 일반 서민들은 어쩔 줄 몰라, 혼란과 불신에 잠기고 생활은 더 곤란하게 됐다. 적미군(赤眉軍)[4]이란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왕망은 탄압을 강화한다. 무자비한 살육이 강행된다. 결국 왕망두오’(杜吳)라는 상()나라 사람에게 몰려 공빈취에게 목이 잘렸다. 각지방의 친왕망파는 그 지방 사람들에게 살해됐다.

한국의 실정에 맞춰볼 때 남의 일 같지 않아 자못 무연해진다.


[각주]

  1. 왕망(王莽) - 중국 전한의 정치가(B.C.45~A.D.23). 자는 거군(巨君).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를 빼앗아 국호를 신()으로 명명하였다. ()나라 유수(劉秀)에게 피살되었다. 재위 기간은 8~23년이다.
  2. 정전제(井田制) - 고대 중국의 하(), (), ()에서 실시된 토지 제도. 토지를 ()’ 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하여 주위의 여덟 구역은 사전(私田)으로 하고, 중앙의 한 구역을 공전(公田)으로 하여 이곳의 수확은 조세로 바치게 한 제도이다.
  3. 조령모개(朝令暮改) - 아침에 명령을 내렸다가 저녁에 다시 고친다는 뜻으로, 계획이나 결정 따위를 자꾸 바꾸어서 갈피를 잡기가 어려움을 이르는 말
  4. 적미군(赤眉軍) - 신나라 때 18년에 산동 지방의 낭야에서 번숭(樊崇), 역자도(力子都)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도적으로, 왕망의 군사와 자신의 편을 구별하기 위해 눈썹을 붉게 칠하였으며 신나라의 여러 군현들을 공격하여 노략질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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