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8일 목요일

[범용기 제5권] (7) 북미유기 제7년(1980년) - 또 한번 귀국 얘기

[범용기 제5] (7) 북미유기 제7(1980) - 또 한번 귀국 얘기

 

1980112 광주 백영흠[1] 목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시라큐스 대학교 교수로 있는 맏아드님을 찾아와 몇 달 유숙하다가 귀국하는 도상, 시카고에서 부친 편지다.

오는 119일에 시카고에서 귀국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도 귀국을 권한다.

그런데 송석중[2] 박사는 귀국하면 안된다고 긴 편지를 보내왔다.

지금은 돼지들이 썩은 죽을 제각기 제가 더 먹겠다고 싸우는 판인데 뭣 때문에 그리로 가느냐는 것이다.

나가긴 나간다. 그러나 신중해야 한다. 내 나이 80고개에 들었으니 예수보다 50년을 더 산 셈이다.

염체없지만, 인생기록이라도 정돈해 놓고 가야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 삶의 과정에서 내가 진 사랑의 빚을 갚지는 못해도 고맙다는 말만은 남겨야 한다 등등……

113() - 2PM에 시내 연합교회에서 예배하고 예배 후에 이 목사와 장시간 상담했다. 그 결론은 대략 아래와 같다.

 

(1) 귀국은 당분간 단념하고 여기서 좀 더 저작에 주력하자.

(2) 한국의 현 정세는 송석중 박사의 말대로다. 그의 충고를 듣기로 하자.

(3) Social Welfare 관계에서의 interview를 다시 교섭하여 일이 되도록 밀어보자.

(4) 노인 아파트를 얻어 할머니와 함께 거기 있으면서 서재를 차리고 아무 구애됨 없이 저작에 전념하도록 하자.

(5) 써 놓은 수기며 저술은 여기서 출판하기로 하자.

(6) 일본에는 봄 꽃철에 약 한 달 예정으로 다녀오자.

(7) 캐나다 시민 여권으로 좀더 자유롭게 본국에 왕래하도록 하자.

 

합리적인 그리고 실현성 있는 제언이다.

결국에는 이 목사 말대로 됐고, 또 되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나대로 80고개에 오르면서 달라지는 심경을 얘기했다.

물론 과거를 정돈하는 것과 얼마 남지 않은 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 십분 동의한다. 그런데 나는 내 신학에 있어서 최근에 특히 맘이 쏠리는 부분을 얘기하고 싶다.

요새 교회 신학이니 화해의 신학이니, 혁명의 신학이니, 민중의 신학이니 하는 형용사 붙은 신학이 말버릇처럼 유행하는데 그보다도 더 깊이 우리 혈맥에 뿌리 박은 신학이 모색되야 할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한국 민족과 역사에 토착화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구상하고 싶다는 말이 되겠다.

동양신학, 한국신학, 생활신학 등등의 이름이 붙어도 좋겠다.

더 나아가서는 유대교가 유대민족의 종교인 것과 같이 기독교가 한국민족의 민족종교가 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싶다는 것이겠다.

이것은 국교화하자는 말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을 민족적 사회화한 기독교로 남과 북과 해외이주한인의 공통적인 종교로 우리 민족의 모든 생활의 활력소가 되게 하자는 생각이다.

서구신학은 교권과 정권이란 거목(巨木)겨우살이”(Paras ite Misletoe)처럼 붙어 살며 자랐다.

기독교는 국교라는 이름의 전매특허품이 됐다.

그 기득권에 도전하는 종교종교가는 산채로 장작불에 타 죽어야 했다.

그 앞에서, 특권 기독교 독재자들은 이 이단자를 제거한 하느님께 영광 돌린다고 찬양 예배를 드린다.

적어도 동양신학 또는 한국신학에서는 이런 넌센스가 연출될 수는 없다.

연출되서는 안 되겠다. 우리는 동양사상이란 토양에 원시기독교, 더 나아가서 예수의 기독교, 적어도 사도들의 기독교를 심어야 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신앙, 우리의 신앙을 체계화한 신학의 수립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쩌면 모색 단계에서 건설 단계에로 발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유익한 대담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좀 더 있어보겠다는 얘기로 낙착된 셈이다.

 

118() - 저녁 쯤에 시라큐스의 백영흠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뉴욕을 떠나 귀국한다는 것이다.

長空도 귀국하여 무등산에도 같이 올라가고 죽장망혜’(竹杖芒鞋)[3]로 관동팔경도 시름없이 다녀보자는 것이었다.

말만 들어도 흐뭇하다.

 

[각주]

  1. 백영흠(白永欽, 1904-1986) - 경기도 인천 출생으로 영명중학, 일본대학 사회학과를 거쳐서,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등으로 고초를 당하였다. 해방 후에 최흥종 목사와 함께 광주 YMCA 재건에 힘썼다. 1946년 일본 교회였던 적산가옥을 인수하여 동부교회를 설립하고 1978년까지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그때 동부교회는 독립교회였다). ‘동광원의 지도자 이현필과는 동서간이다. 김필례 교장을 이어서 수피아 여중고의 교장을 역임(1947-1948)하였다. 1980518시에 죽음의 행진에 참가하였으며, 1986년 별세하여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송석중 박사는 서강대 전임강사로 있다가 1962년 인디아나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과정을 시작하였고 1968년에 마쳤으나 귀국하지 않고 미시간 주립대학 동아시아언어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3. 죽장망혜(竹杖芒鞋) - 대지팡이와 짚신이란 뜻으로, 먼길을 떠날 때의 아주 간편한 차림새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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