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6일 금요일

[범용기 제5권] (99) 요꼬하마에 - ‘뱃폴’에 간다.

[범용기 제5] (99) 요꼬하마에 - ‘뱃폴에 간다.

 

뱃폴은 꽤 먼 고장이다. 2차 대전 후 아카데미 운동의 발상지고 그 본부격인 수양관이 여기 있다. 차로 4시간 가다가 도중에서 한신동문인 박종화 동지 집에서 하루밤 쉬었다.

부부 모두 극진하게 친절했다. 그래도 내 몸은 내 마음을 치켜주지 않았다. 서독교포교회 여신우회 간부와 유지들이 오늘 저녁에 이 댁에 모였다. 그들 주동으로 각 가정에서 한 품목씩 차려온 한국음식을 종합메뉴로 둥글려 그 준비의 마감을 맺자는 것이다.

430 회의장소에서 폐회 후 마감식사인 점심은 한국음식의 푸짐한 진수성찬이었다. 우리 동양족은 물론이었지만 백인들도 두 번 세 번 비운 접시를 다시 채우고 있었다. 즐거운 향연이었다. 나만이 미안스러운 금식자’, 말하자면 억지 수도승이었달까?!

뱃풀의 비공식 WCC 회의는 428일 저녁에 시작하여 43012시 반에 끝났다. 서독이 회의장소니만큼 서독대표들과 협조자들이 많았고 일본서도 긴급회의, 일본 NCC 분들이 모두 자비로 왔다. 그 밖에 세계적인 학자, 동대교수 사카모토’, 미국서 그레고리 핸더슨’(한대선 박사)도 왔다. 한국에서 YMCA 연합회 총무 강문규, 홍콩의 인명진[1] 등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UM의 박상증[2] 사무국장이 총무격이고, 브라질 대표 카스트로가 사회했다. 주요 강사로는 서독의 Sharft 감독, 일본의 Sakamoto 교수, 미국의 렌데슨 교수, 우리 편에서 지명관 교수였다. 나는 폐회기도랄까? 기도형식의 폐회사랄까. 어쨌든 그런 종류의 마감매치를 맡아했다. 용어는 영어다.

회의기간에는 좌불’(座佛)테세로라도 엉덩이무게를 제공할까 했는데 그것도 힘들어서 그냥 내 방에 누워있었다. 전세계 교회와 사회가 그렇게까지 한국 교회와 한국이란 나라를 걱정해준다는 것은 Power Politics의 현실에서는 하늘나라가 임한다는 천사의 나팔소리 같았다. 적어도 그 서곡의 부드러운 음파’(音波) 같았다. 그들은 자기나라 일같이 가능한 최선을 바칠 성의를 보이고 있었다.

다른 나라들이 이렇게 성의를 보이는데 우리 한국인 참여자들이 다만 그들의 일원으로만 자처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오래 전부터 미국에 UM이 생기고 일본에 민주동지그룹이 생기고 독일에 민건’, 캐나다에도 민건이 생겨서 각기 있는 고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선이라기 어려우면 차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우리끼리서 며칠 묵으면서 밤새가며 의논했다. 이념정립과 실천요항, 그 방법 등을 토의했다. 그 내용은 비공개. 나는 그 모임에서 개회사랄까, 개회기도 형식의 개회선언이랄까를 맡아 했다. 그 후에는 여전히 내 방에 누워 있었다. 많은 동지들이 틈나는 대로 내 방에 찾아와 위문했다. 열은 없지만 위장이 쌀가마같이 부풀었고 음식 들어갈 공간이 없으니 식욕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배설되는 것도 아니다. ‘폐색사회. 나는 나이 80고개를 넘었으니 언제 이 젊은 동지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 마감인사들 같이 서글픔이 섞인다. 그러나 이렇게 유능하고 사무적이면서 자기 철학과 신앙이 확립된 최고 지성인들이 이렇게 험블하게 봉사하는 걸 보면서 소망 중에 즐거워했다. 그리스도인의 본보기라는 자랑도 솟구친다. 모두 박사다. 박사 칭호가 없는 이도 박사동등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 부인들과 함께 차 나르고 테이블보이 노릇하고 소제하고 소사처럼 심부름에 뛴다. 언제나 기쁜 얼굴이다.

지명관 교수는 저런 분들이 있는 한, 민주운동에 실패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고 자랑 섞인 희열을 독백’(獨白)같이 튕겼다.

마감 폐회 직전에 본국에서 이태영[3] 박사가 와서 본국 소식을 전했다. 말하자면 원탁회의식의 헤드테이블에 나오자마자 걷잡을 수 없는 통곡이 터진다. 이 박사는 한참 통곡하다가, 첫마디가 본국은 온전한 암흑사회입니다. 캄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고해 주었다. 그는 이번 미국의 드류대학교에서 열리는 세계법학자대회에 부군인 정일형[4] 박사와 함께 명예법학박사학위 받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 모임에 들린 것이었다.

우리는 후에야 알았다. KCIA에서는 별별 공작을 꾸며 출국을 방해했단다. 주최측인 세계법학자대회에서는 매일같이 한국정부와 KCIA와 소위 국회군부에 긴급 전보로 소낙비를 퍼부었단다. 할 수 없이 한국 군정에서도 개최 직전에 출국허락이 났다는 것이다. 정일형 박사는 뒤늦게 혼자 출국이 됐으나 학위수여식에는 휠체어에 앉은 정일형 박사를 부인 이태영 박사가 밀며 단에 나가 둘이 가지런히 꿇어 앉아 명예스런 법학박사 학위를 부부 함께 받았다한다.

카터가 학위 받을 때 보다도 더 열광적이었다는 소문이다.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부부 두 분이 동시에 나란히 앉아 최고 명예학위를 받은 예는 극히 드물었다 한다.

이태영 박사의 통곡 때문에 장내는 숙연해졌다. 곧 이어서 나의 간단한 폐회사가 있었고 축복형식의 기도로 마쳤다. 잔무는 통례에 따라, 사무국과 실행위에서 맡았다.

나는 회의장소에서 산회한 후에도 내 방에 누워 있었다. 누워서 뱃폴 회의를 되새겨 본다. 내 몸의 괴로움보다도 참여자들에 대한 고마움이 앞선다.

 

[각주]

  1. 인명진(印名鎭) - 1946년 충청남도 당진 출생. 예장통합 출신으로 해방신학에 기초한 도시산업선교에서 활동한 바 있다. 1972년부터 12년간 선교회 총무로 활동했다. 이 선교회는 재야 활동가 손학규, 김문수, 오종세 등의 활동 무대였던 곳이다.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등의 이유로 4차례 투옥되었고(YH 사건 등), 한 차례 국외 추방된 경력을 갖고 있다.
  2. 박상증 목사는 아버지가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되었을 때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6세 때 서울로 왔으며, 서울대 사학과를 중도에 그만두고 미국 캔터키로 유학을 가서 아버지의 권유로 성결교파 신학을 공부하였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서울신학교에서 잠시 가르치다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활동하면서 WCC로 진출하였다. 1970년대 지명관 교수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집필하는 것을 도우는 등 해외에서의 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이후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으며 그것으로 인해서 201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2014~2017)에 임명되었을 때 거센 반발이 있었다
  3. 이태영(李兌榮, 1914~1998) - 대한민국의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이다. ()는 백인당(百人堂).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며,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우고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가정폭력 상담 해결, 유교적 인습에 저항하였다. 1932년 이화여전 가사과에 입학하여 4년 후 수석으로 나왔다. 194633세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49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남편은 정일형 박사이다.
  4. 정일형(鄭一亨, 1904~1982)은 대한민국의 관료이며 정치인이다. 미군정기 때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과 물자행정처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야당에서 활약하였다. 2공화국의 두 번째 외무부 장관이었으며, 5·16 군사 정변 이후 실각하였다. 한민당의 창당 멤버이자 민주당의 당원이었으나, 민주당 신파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신파의 영수였던 국무총리 장면과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한국 초기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의 남편이자, 정치인 정대철의 아버지이자 정치인 정호준의 할아버지이며, 이윤영의 처조카였다. ()는 금연(錦淵)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