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0일 금요일

[범용기 제6권] (13) 민족의 파수꾼

[범용기 제6] (13) 민족의 파수꾼

(에스겔 3:16-21)

 

내가 너를 이스라엘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웠다”(17) 했습니다. 에스겔은 기원전 597년 제1차 바벨론 포로 때 사람입니다.

 

신흥세력자인 바벨론의 네부가트네자[1]가 애굽 세력 권내에 있는 유다 왕국을 가만 둘 까닭은 없었습니다. 대뜸 군대를 출동시켜 유다를 정복하고 쓸만한 유대인은 모조리 쇠사슬에 얽어 바벨론에 옮겼습니다. 에스겔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과 함께 망국의 슬픔을 나누며 그도 포로 대열에 포로가 되어 적국에서 포로로 지냅니다. 포로민들은 강제노동에 쓰여집니다. 그들은 기백이 없습니다. 불꺼진 가 됐습니다. 조상들이 지은 죄의 열매를 우리가 거두게 됐으니 벗어날 길도 회개할 기회도 없다고 체념합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바벨론 사람들에 동화가 되어 살 길을 마련하자는 약삭빠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선민이 다 무어냐? 하느님이 우리 조상의 하느님, 우리들의 하느님이라면 우리를 왜 이렇게까지 망하게 했겠느냐? 하느님이 다 뭐냐? 하고 원망하며 무신론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대로 버려둔다면 민족적 Identity, 야훼 신앙의 전통도 국가의 회복도 기대할 수 없는 무역사(無歷史)의 유랑민으로 상실될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 예언자 에스겔은 하느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는 해골 골짜기에 퇴적된 해골들이 다시 살아 큰 군대가 되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는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웠다하는 야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한국 민족의 파수꾼입니다.

구한말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한국에도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여기저기 교회가 섰습니다. 교회는 한국민족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구습에 젖은 유교도들과 교만과 완고로 굳어진 양반계급에 회개와 개화를 촉구했습니다. 그래서 이상재, 윤치호, 유성준[2], 박승빈[3] 등 양반 사회 인사들도 믿었습니다. 그들은 용감하게 서민층에 접촉했습니다. 일반 민중에게 복음이 넓게 퍼졌습니다. 교회가 각처에 섰습니다.

교회마다 학교가 설립됩니다.

거창스러운[4] 딴 건물이 없어도 됩니다.

오막살이 교회당이 학교 교사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는 망국의 극한선에서 우리 민족의 파수꾼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유다 왕국이 극한선에서 외쳤으나 나라는 망하고 만 것과 같이 우리나라도 회생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1910, 나라는 일본 군국주의 침략에 망하고 합방조서와 함께 2천만은 일본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포로된 한국 민족 속에서 그들의 파수꾼으로 계속 활동했습니다.

1945815일에 민족의 해방이 선언되었을 때, “파수꾼도 함께 해방의 기쁨에 함성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미군정 3, 이승만 정권 10년 가까이를 지난 오늘에도 하느님이 주신 민족 자유를 제대로 누리느냐 물으면 모두 머리를 가로 흔들 것입니다. 이북에서는 민족 자유가 공산 독재자에게 포로 되었고 이남에서는 군벌의 자루 속에 꾸겨져 들어갔습니다.

419 의거를 계기로 민주당 정권이 서기는 했었으나 9개월 만에 반란군인들 총칼에 포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당면한 현실 속에서 한국 교회는 아직도 한국 민족의 파숫꾼으로 제 구실을 하고 있는 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암흑 속에서 때의 새벽을 전하는 전령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까?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소수 창조적 그룹에서는 이 일을 하고 있는 줄 압니다. “창조적 소수가 예언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 전체로 본다면 악하게 게으른 종임을 면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이러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교회 관계 얘기니까 우선 신학면에서부터 천명해 보기로 합니다.

 

(1) 첫째로 한국교회의 타계주의적 신학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가시오하는 것이 선교 표어로 되어, 적어도 50년을 특허품처럼 전매해 왔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나와서 교회에 들어와 충실하게 교회 생활을 하다가 죽을 때에 교회에서 직접 영원한 천당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천당은 기화요초 만발한 아름답고 즐거운 고장이고 영생 복락의 행복만 차고 넘치는 고장이라고 합니다. 거기까지 가면 그것이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랍니다.

이 구원에 참예하지 못한 인간들은 예외없이, 죽은 후에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바다에 던져진답니다. 거기에는 돌이킬 기회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영원한 고통만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서운 Terrorism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털끝만큼도 남은 데가 없고 오직 분노와 보복만이 있는 상태입니다. 이 무서운 징벌에 걸려서는 안 되겠다 하여 너도 나도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위의 말들은 대충 그렇다는 것이고 예외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의 목적을 온전히 내세에 둔다면 현세에서의 역사는 없습니다. 현세의 역사는 우리의 신앙 내용에서 탈락됩니다. 이런 無歷史(무역사) 종교는 인도나 불교에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도피, “비인간상황이라 하겠습니다.

 

(2) 다음 단계에서는 어떠했습니까?

31 운동 이후, 과학 기술학적 문명의 영향을 받은 청년 학생들과 일반 사회 인사의 사상 경향은 점차로 현세주의, 세속주의로 흘렀습니다. “사후천당같은 데는 별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사후처리나 하는 하느님이라면 어디 그때 가 보자!” 하는 식의 모멸이 앞서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교계에서도 천당얘기보다도 교회얘기가 많아졌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가시오대신에 교회에 나오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노라며는 천당 신앙도 생길 것이라는 소망도 포함된 것임에 틀림 없겠습니다만, 어쨌든, “천당보다도 교회가 강조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런 방향에서의 선교가 오래 계속되는 동안에 교회주의가 성장했습니다.

교회가 신성하고, 교회가 천국의 현관이고, 교직자는 성직이고 하느님의 사자고 특별 은혜의 배찬자고 등등 교회의 특권화가 정립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세상, 역사는 장망성(將亡城)[5]이고 속되고 부정하고 죄악의 도성이고 심판날 유황불에 타버릴 운명의 고장이라고 외치게 되었습니다. 그런 비참과 사멸을 면하려면, “일치감치 교회라는 노아의 방주에 들어오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교회주의자가 한국 교회원과 교직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성한 교회, 거룩한 교직자가 어찌 세상일, 특히 정치에 관여할 소냐? 하여 스스로 거룩한 체 얼굴을 내리 다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태를 살펴보면 집권층 정치인에게는 아부랄 수 있을 만큼 순종하면서 정의를 말하는 교계 인사들에게는 왜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느냐고 나무랍니다. 그들에게는 만 정치고 는 정치가 아닌 것으로 느껴지나 봅니다.

한국 교회가 한국 민족의 파수꾼이라면 바른 소식을 바로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3) 더 능동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입이라고 했습니다. 이 역사의 급류 여가리가 아니고 바로 그 복판에서 하느님을 대신하여 역사운영의 권력자들을 깨우치고 경고하고 편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에스겔에게 분부하신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쳐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요,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그 생명을 보전하리라(3:17-19).

교회가 민족의 파수꾼이라면, 악을 행하는 권력자에게 네가 그렇게 하면 죽는다. 너만 죽는 것이 아니라 3천만 국민을 함께 죽음에 몰아넣는 것이다하고 경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본직이요 결코 해도 좋고 안 해도 무방한 “By Job”이 아닙니다. 그것을 말하고 안하고 하는데 따라,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의 운명이 결정될 뿐 아니라 말하는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바른 말을 해서 상대방이 돌이키면 좋지만, 그러지 않고 더 완악하게 된다 하더라도 너는 네 할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해도 그가 고칠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더 못되게 굴지 모르니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났다고 영리하게 침묵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만, 이런 경우에서는 침묵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침묵은 불의에 동조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최소한 아니오만은 분명하게 발언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근자에 한국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하면 15년에서 사형까지 시킨다고 공포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데모는 그들의 의사 표시요 평화적 행진이기 때문에 반란도 질서 파괴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15년 종신 심하면 사형언도까지 한다고 하니 그것은 악인중에서 초고급 악인일 것입니다.

데모는 예언운동에 있어서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동(Symbolic Action)에 유사한 표현 방법입니다. 그것이 15, 종신징역, 사형에 해당될 이유는 천하인간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있을 수 없는 폭군의 만행이라고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4) 또 하나의 경우가 있습니다.

의인이 그 의에서 떠나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의는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3:20) 그러므로 너는 행악자를 깨우치는 것과 같이 의인도 깨우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가 돌이키면 좋고 돌이키지 않아도 네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삶의 황혼기에 들어서 불의에 말려드는 일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가 저축했던 기왕의 의는 무효가 되고 마감의 불의만이 남아 그를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경종입니다.

한국 교회가 한국 역사의 파수꾼임을 회피할 길이 없습니다. “말씀의 바른 전령자가 되어 파수꾼의 구실을 멋지게 해내야 할 것입니다.

 

19741124Boston

시세로 교회에서

 

[각주]

  1. 네부카드네자르 2- 바벨론의 칼데아 왕조의 왕 중 가장 위대한 왕으로 뛰어난 군대를 거느렸으며, 수도 바빌론을 화려하게 꾸미고 역사상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명하다. 유대를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BC 605년 아버지 나보폴라사르가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BC 604년 시리아·팔레스타인 원정을 하면서 유대를 포함, 여러 소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고, 아슈켈론 시를 점령했다. BC 597년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여호야긴 왕을 바빌론으로 강제 호송했다. 성서에는 바빌론이 한번 더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티루스를 포위공략했다고 나와 있다. 포위당한 예루살렘은 BC 586년 함락되고, 지도층은 강제 이송되었으며, BC 582년 더 많은 시민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 BC 562년에 죽었다.
  2. 유성준(兪星濬, 18690~1934) - 1860102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긍재(兢齋)이다. 아버지는 유진수(兪鎭壽), 형은 유길준(兪吉濬), 딸은 유각경(兪珏卿)이다. 조선 말기에 내무아문 주임주사, 농상공부 회계국장 등을 지냈고, 대한제국기에는 통진군수, 내부협판, 내각법제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충청북도 참여관, 중추원 참의, 충청남도지사 등을 지냈다. 1934227일 사망했다. 그의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2조 제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0: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6658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3. 박승빈(朴勝彬, 1880~1943) - 호는 학범(學凡). 강원도 철원출생.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중앙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돌아와서 법관으로 활약하다가 1910년 변호사를 개업하였으며, 1925년 보성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법률가로서는 한국인 변호사만으로 된 경성제2변호사회 창립에 참여한 것과 조선변호사협회 대표로 중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한 것이 알려져 있다. 같은 기간에 신생활운동에도 참여하여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의 조직과 잡지 계명(啓明)의 발간에도 힘썼다.보성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여서는 당시 운영난에 봉착하였던 그 학교를 유지, 운영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가 국어연구에 뜻을 두게 된 직접적 동기는 법률가로서 법전(法典) 편찬을 기획하면서 국어표기법의 통일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 데에 있었다고 전한다. 주위의 대세가 자신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역경 속에서였지만, 자신의 소신을 끈질기게 주장하며 시류에 맞섰던 의지와 집념의 인간이었다.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임하였던 기간 및 그 이후의 여러 해에 걸쳐 보성전문학교와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조선어학을 강의하며 사회의 동조를 구하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당시의 강의내용을 정리한 것이 1931년의 조선어학강의요지(朝鮮語學講義要旨)이고, 이를 보완, 확대한 것이 1935년의 조선어학(朝鮮語學)이다. 1931년에는 동지를 규합하여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고 그 기관지로서 정음(正音)을 격월간으로 발행하였는데(19341941), 그가 쓴 한글 관계의 크고 작은 논설들과 함께 이 모든 노력은 조선어학회와 거기에서 사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어표기법에 대한 그의 사고는 조선어학에 서술된 것을 통하여 판단할 수 있거니와, 구체적으로는 1936년에 나온 조선어학회 사정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대한 비판에 상세히 밝혀져 있다. 그의 생각은 역사주의와 편의주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언어에 대한 연구이론은 복잡한 것이 될 수 있지만, 일반대중이 사용할 정서법은 간편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한 민족의 언어나 표기법은 역사적 지속체여야 한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하여, 복잡하며 혁신적인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사회의 동조를 얻지 못한 채 실의 속에서 타계하였다.
  4. 거창스럽다 - 보기에 매우 큰 느낌이 있다
  5. 성서에서 멸망의 성읍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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