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2일 일요일

[범용기 제6권] (17) 최근 30년 한국 역사의 회고와 전망

[범용기 제6] (17) 최근 30년 한국 역사의 회고와 전망

 

최근 30년 한국 역사의 회고와 전망이라면, 결국 해방 후 한국의 움직임을 훑어보고 정시하면서 다음의 한국을 바라보자는 뜻이 되겠습니다.

 

우선 이 배경으로서 이조말 개화 운동 때부터 일제 36년간의 Dark Background를 잠깐 들여다보고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만을 추린다면 191931의 기미 독립선언과 그 후의 운동일 것입니다. 31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빠리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에 의한 국가군() 재건 또는 재조정을 주장한 것을 계기로 하여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보복(報復) 전쟁의 악순환을 정지 또는 제거시킴으로써 영구평화를 모색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독일의 자멸을 노린 포위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한국 민족에게 전해진 가장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천지의 여명을 보았고 그것과의 관계에서 한국 민족의 해방과 독립, 그리고 세계 역사의 전환, 새로운 인간상의 정립 등등을 예견했던 것입니다.

31 독립선언은 한국은 독립국이요, 한국인은 자유민이다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것이었습니다. 전 민족이 이에 향응하여 전국적으로 궐기했습니다. 참가자가 1,363,900여 명, 학살당한 자가 6,670, 투옥된 자가 52,700여 명이었다고 하니, 이만하면 이 운동이 전국적 거사였고 민족정기의 폭발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31 “정신을 선언서에 나타난 대로 요약한다면 - (1) 그 정신적 근거로 인류평등의 대의(大義), 민족자존의 정권(正權), 이천만 민중의 충성, 인간 자유발전의 정로(正路), 인류양심의 발로, 세계개조의 기회등등 어디까지나 세계적, 인류적, 윤리적인 큰 테두리 안에서 한국과 한국 민족의 소재를 규정지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2) 전체로서의 인류 역사에 근본적인 전향점이 나타난다는 예언입니다.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시대는 가고 도의와 인도(人道)의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National InterestPower Politice의 시대는 가고 National Justice, Human Rights의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에 당장 성취된 것은 아니었고 지금에도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만, 반드시 성취되고야 말 새 역사의 방향제시였던 것만은 사실이겠습니다.

(3) 적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제언입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가지가지 배신과 불의와 악행을 열거하면서도 그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그와의 화해와 평화건설을 종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동양 3국이 각기 자주 독립하면서 상부상조하여 동양평화와 세계 질서에 이바지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폭력의 악순환에서 세계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에서였다고 봅니다. (4) 그러니까 새로운 국가관이 제시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Power Struggle과 무력경쟁의 전투 주체로서의 권력국가가 아니라, 정의와 봉사로 다 같이 평화롭게, 바르게, 자유롭게 잘 살기 위한 국가 존립이라는 것입니다. (5)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방법은 물리적인 보다는 비폭력ㆍ불타협의 진리운동에 뿌리박은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6년 후에 인도의 간디가 취한 항거방법의 선배였습니다.

지금이라도 세계 역사를 맹수형, 독사형, 또는 광견형 등의 집권자상으로부터 인간형의 봉사자 손에 돌아오게 하려면 이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31 정신을 사회와 역사에 구상화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선언서에서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 중에서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 밀고 나가겠다던 약속을 일편단심, 엄수한 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후세에 유감을 남겼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신라연당멸고”(聠唐滅高) 이래의 민족정기 위축과 강국에 대한 Soft Policy가 민족심리의 심층권을 구성한 탓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소수의 예외는 언제나 있었고 언제든지 있을 것입니다만, 민족전체로서의 기질은 그 씩씩하던 기백을 잃었다 하겠습니다.

 

일제 36년간의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해외에서 활동하던 분들은 몰라도, 국내에서도 이렇다 할 항거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적응하면서 항거한다는 양면정책이 일반화했다고 하겠습니다. 일반 서민층에서까지도 일본 사람을 일본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놈”, “일본녀석”, “왜놈”, “왜놈의 새끼등등으로 부릅니다. 물론 면대하여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만, 뒤에서는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심층에 가라앉은 억년 묵은 항거의식의 변형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당당하게 일대일로 결투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항거는 계속하는 이런 현상은 사내다운 민족상이 아니기에 용서는 할 수 있어도 자랑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개별적인 사건과 개별적인 인간에 따라 적응과 항거Ballance가 혹은 이쪽에, 혹은 저쪽에 기울어진 예는 있었습니다만, 어느 한 쪽만의 한국인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1945815에 갑자기 한국 해방의 공고가 나붙었습니다. 일본 천황8.14에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한국은 일본 영토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도록 1943. 12. 1일에 카이로에 모인 3대국(, , ) 회의에서 결정되고 1945. 7. 26일에 영, , , 4대국의 Potsdam 회담에서 재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국내에 있는 우리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언제 되든 독립이 되면이런 나라를 만든다는 치밀한 건국설계가 준비돼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민주주의 국가로 한다는 것은 거의 불문율로 전송되었습니다만, 상당히 낭만적이었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조선역사 학자들의 진단학회와 조선어학회의 한글정리와 한글사전 편찬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일제 말기에, 검거, 고문, 투옥 등등으로 고난을 겪었습니다.

한국 교회정교분리란 이름 아래서 급속하게 교인수와 교회수를 증가시켰습니다만 신사참배 강요에 부딪쳐 내부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일본 호국종교화 운동이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의 합작에 의하여 강력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극소수의 혁신교단가입자 이외에는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한국 교회 대다수의 태도는 역시 적응하면서 항거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주기철 등 절대 반대파도 있어서 수년 동안 옥중에 있기도 했고, 후일에 재건파라는 이름으로 불리운 신사참배 절대불응 집단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물론 옥중에 있었습니다만, 해방 후에 풀려나와 기성 교회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옥중성자끼리서만 새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름은 재건파교회라고 했습니다. 기성 교회는 우상에게 절한 교회니 만큼 우상의 교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간단합니다. 신사참배 곧 우상숭배요, 신사참배자 곧 우상숭배자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신사에 참배한 것은 아니었고 강요당하는 포로 생활의 일환으로서 죽지 못해 하는 일이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재건파의 행동은 복음적이라기 보다는 율법적이었습니다. 구약의 성결법에 농성하여 우상숭배자와 접촉이 곧 부정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날이 갈수록 내향적이 되고 게토의식이 늘어갔습니다. 해방 직후 어린 자녀를 국민학교에 보내면 날마다 조회시간에 태극기에 경례하니 그것도 우상숭배라 하여 퇴학시킵니다. 이럭저럭 일반 사회에서 단절됩니다. 결국 혼자서 고성(孤城)을 지키다 만 것뿐이라 하겠습니다.

어쨌든, 일제말기 한국 민족의 일본 민족화나 한국 문화의 일본 문화화나 한국 교회의 일본 교회화 등 운동은 실패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한국 민족 생활의 일본 양식화 운동은 애당초부터 먹어들지 못했습니다. 일반 서민층의 습속과 보수성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일본식 생활 따위는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민족 사회의 최후, 최대의 저변을 이룬 그들이 사실은 일본화 항거에 있어서도 최후 최대의 항거자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9458.15에 해방은 되었습니다만, 38선이 생긴 줄은 몰랐습니다. 4대국이 울타리가 되어 삼천리 금수강산이 통일 민족국가로 회복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평양간 기차는 함흥차사여서 가긴 가도 오지는 못합니다. 얼마 후에도 이북 피난민이 백만 단위로 남한에 넘어옵니다. 러샤 군대의 등살에 견딜 수 없어 덮어 놓고 남한에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는 자유가 없는데 남한에는 자유가 있다 하여 왔노라 합니다.

그런데 해방과 함께 남한에는 미군정이 선포되고 하지 중장이 총독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남한 공산당도 합법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한 공산화의 길을 그들에게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공산당 불법화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얼마 후에 김구주석을 비롯한,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습니다. 김구 주석은 이승만 박사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선우진 등과 함께 이북을 방문했습니다. 통일한국 회복운동의 일환에서였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코웃음으로 대신합니다. “공산당과 협상한다는 것은 공산당의 정체를 모르는환각자의 꿈이라고 일축합니다. 그래서 한 번 면담해 본다고 그들은 입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별 성과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남로당에 의한 공산화 운동은 치열했습니다. 각처에서 반란 사건이 속출합니다. 결국 미군정에서도 공산당 비법화를 구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민주공산의 두 갈래가 첨예화해서 서로 극한투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학원에서는 학생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실력으로 대결합니다. 청년 사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그 밀도는 학생사회에서보다 희박했습니다만 근본양상은 같았습니다.

학원에서의 진지한 민주학생이란 주로 기독학생 그룹이었습니다. 그런데 좌익 학생들은 유물론적 역사관을 풀이하여 학우들을 자신있게 설득합니다. 그러나 기독 학생들은 그렇게 명백한 역사 이해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의 한국 교회는 역사에서 유린된 교회주의적 기독교였기에 세상일인 역사에는 관심도 이해도 뚜렷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독학생들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때마침 미국 선교본부에서 최신 문제작인 유명저서 2백 여 권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보내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토인비의 역사연구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사 이해에 대한 다른 명저들, 문명비판, 공산주의 비판 등등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마시듯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기독학생 모임에서 그 내용을 해설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기뻤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할 말이 있다”, “맑스의 유물사관은 낡아빠진 일방적인 이론에 불과하다하고 좌익 학생들을 공격합니다.

그때부터 좌익 학생들은 이론보다도 폭행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사범대학에서는 좌익 학생들이 학장을 살해했습니다. 걸핏하면 죽인다쁠랙 메일을 보냅니다. “하지중장의 공산당 불법화를 그들 편에서 촉진시킨 셈이 되었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담, 신탁통치안, 미소공동위원회 등등에서부터 소위 좌우합작운동까지 모색되었던 것은 기억에 생생한 한국 해방사의 격랑이었습니다.

대구 반란사건, 여수 순천 반란사건 등등은 대규모적인 좌익폭동이었습니다만 결국은 진압되었고 성공했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625가 터졌습니다. 남로당 계열은 일지감치 이북으로 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민족의 좌우 진영이 전면 分立(분립)됨으로 일단 사상정리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분단 한국의 이념적 고정과 지역적 분립이 현실화된 후에도 38선의 비극은 625의 비극을 연장 심화한 것 같이 되었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은 항구한 숙제로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38선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선이어서 한국 민족의 국가건설에 이 두 이념 중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이고 건설적이냐 하는 것을 실험하는 Test Tube이라고 주관적으로 설명해 보기도 합니다. 또는 이 두 이념과 체제의 대립에서 제3의 더 좋은 종합 이념이 변증법적으로 탄생할 섭리적인 의미도 있지 않을까 하는 Wishful thinking도 해 봅시다. 어쨌든, 38선은 우리 국토와 민족에게 있어서는 안 될”, 그러면서도 강요된우리 역사의 비극임에 틀림 없습니다. 결국은 없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38선이 통일한국에의 단계적인 과도현상이라면 그 존재에의 바른 이해가 우선적으로 요청됩니다. 우선 위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정ㆍ반ㆍ합)의 변증법적으로 본다면, 이북의 공산독재와 이남의 자유민주라는 테제안티테제가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남북대화를 위한 두 주체가 또렷하게 또 정직하게 각기 자기를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북의 공산독재”, 이남의 일인독재란 것은 둘 다 독재여서 독재자가 걷는 같은 노정을 같은 양식으로 걷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북에서 정보국가를 세우느냐? 우리도 정보부를 강화해야 하겠다. 이북에서 언론을 탄압하느냐? 우리도 중구난방이어서는 안되겠다 등등.

이런 방향은 이론 대결이 아닙니다.

욕설과 폭력의 일방통행으로 전락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독재가 회담을 시작한다면, 어느 편에서나 일방통행은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대립 에 있어야 할 제3의 종합을 주제로 그 하나된 민족 국가로서의 형태와 Vision을 성의껏 토의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제1차적인 충성을 통일된 한 나라로서의 한국 또는 조선-(고려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만)을 놓고 그 나라격(Nationship)과 가능한 실현 방법을 검토 모색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물론, 같은 민족으로서, 조상과 가족이 혈연적으로 엉키어 있다는 인간 감정도 상당한 저변을 이루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념과 사상과 제도를 초월하여 단일 민족으로 우선 통일부터 해놓고 보자74공동성명은 너무 조급한 생각일 것 같습니다. 통일 후의 혼란이 통일 전의 혼란 이상으로 심화하고 장기화할 것을 예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소원의 일부를 피력한 것뿐입니다. 그 실현성은 여전히 희박합니다.

 

원래, 통일문제는 강대국간의 대립되는 국가이익 때문에 생긴 것이니만큼 그 해결에 있어서도 국제정치 분야에 이관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정도의 경험담으로 끝내고 여러 학자님들의 활발한 연구와 토의를 기대합니다.

다음으로 간과할 수 없는 사변은 군사독재정권 수립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밥 먹을 생각만 하듯이 한국 사람은 눌려 살던 과거를 권력욕으로 배불리려 하는 것 같습니다.

민주국가인 미국에서 평생을 지내다시피 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민주로 시작하여 독재로 변모하려다 실패되어 하야했고, 장면 정권은 너무 단기집권이어서 평을 삼가야 할 것 같고, 다음으로 박정희 소장의 군사 쿠데타로 다시 독재체제가 뿌리를 내리게 됐습니다. 그러나 국민은 그렇지 않습니다. 민주체제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젊은 지성인들을 대표한달 수 있는 학생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므로 독재는 전 국민을 으로 생각하고 국민 상대로 전쟁을 계속할 밖에 없는 것입니다.

1961516일 새벽에 박정희 소장, 장도영 중장 등이 약 3천명의 사병을 인솔하고 한강을 건너 총칼로 모든 정부기관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민주기구(機構)는 전폐되고 십 여 명 군인이 모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국민의 반대여론의 너무 압도적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는 2년 만에 군정을 민정으로, 다시 유신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러나 그 행진 목표는 일인 독재체제 확립에 두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의 군인 윤리를 그대로 국민에게 적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국민 상대로 싸우는 것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작전에 능하다고 합니다. 그는 KCIA를 비롯하여 모든 국가 사찰력을 한 손에 쥐고 그것을 반 박정희켠국민사찰에 사용합니다. “반공국시니까 반공법이 모든 법의 왕초가 되었습니다. 반공법이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어서 변화무쌍한 여의주”(如意珠)라 하겠습니다. 반독재, 반박정권이 그대로 친공, 반정부, 반국가로 비약합니다.

일본 군인이 기아이”(氣合)[1]이란 것을 부하 훈련의 기본방법으로 실시해왔는데, 박정희는 그 후예였기에 피의자를 잡으면 우선 고문부터 시작하여 넋을 잃게 한답니다.

공포 분위기가 시민사회를 덮습니다. 그 이유로는 이북이 또 남침한다”, “경제가 성장해야 하겠다”, “국토를 건설해야 한다”, “그것을 유효하게 진행시키려면 군대식으로 한 사람의 총사령관 밑에서 모든 국민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불복하면 하극상으로 처벌된다”, “그런데 총사령관은 물론 나 한사람이다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굴종합니다. 그러나 충성은 없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포로생활입니다.

일인독재는 모든 독재 중에서 제일 나쁘고 위험한 독재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악3권이 전적으로 장악될 때, 3권이 전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그만큼 증대되기 때문입니다. 3선 개헌 긴급조치, CIA의 고문, 군사재판, 언론부재 등등에서 여실하게 나타납니다. “3선 개헌은 일인독재를 위한 첫 포석이었습니다.

이런 강권주의 독재 하에서 1972년 부활절 날 이른 아침, 서울 남산공원 광장 부활절 새벽예배 모임에서 참가자 6만 명에게 민주주의는 부활했다하는 전단이 산포되었습니다. 이것은 제3 Epoc이 탄생했다는 Anounciation[2]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자유민주주의 부활운동이 본격화했습니다. 개신교에서 박형규[3], 권호경 등 목사와 그와 관련된 기독 학생들, 도시산업 전도사와 그 관계 그룹들, 빈민지대에서 빈민을 봉사하던 임경락 목사와 신학생들 등등이 주동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증언이요, 기독교 신학에서의 교회와 사회 이론의 실천이었고 세속적인 정치운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집권당국에서는 그들을 반정부, 반국가 반란행위로 몰아 투옥했습니다. 1974년부터는 Catholic 교회에서도 적극적으로 공동전선에 가담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훨씬 전부터 독자적으로 농촌운동, 인천 근해, 도서 어민들 상대의 산업선교, “메리놀파에서의 Bus 노무 소녀들 계몽운동 등등에 성심 봉사해 왔었습니다. 신부님들의 헌신적인 실천 종교 행동이었습니다. 강원 교구의 지학순[4] 주교, 김지하[5] 시인 등이 그 뚜렷한 존재로 Close up되었습니다.

전체주의적 독재자 Mentality[6]로 응고된 박 정권은 학원자유, 언론자유, 신앙양심의 자유, 사회봉사의 자유 등등에 스스로의 의구심을 일으켜 자신의 Nightmare[7]에 광태[8]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독사형에서 광견형으로 접근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증언자에 불과합니다. 그 심판의 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임할 것은 우리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대로 가까왔다는 제 육감이 짙어갑니다.

우리는 일제시대 때의 잘못을 또 다시 반복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1 독립운동의 좌절과 함께 그 운동자까지 좌절되었던 유감을 반복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라.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한 바울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참음으로 땅의 귀중한 소출을 기다림같이 여러분도 참음으로 마음을 굳게 하시오한 야고보의 말씀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야고보 5:7-8).

신랑이 더디 온다고 촛불을 끄고 각기 자리에 누워 자는 게으른 열 처녀처럼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독립이 안된다고 단념 또는 좌절되어 아무 계획도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해방의 소식에 놀라 허둥지둥하던 첫 815 때의 부끄러움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Post-Park 민주 한국에서의 정치 실제, 경제 재건, 특히 외자정리와 자립경제의 실현, “과의 관계, 사회생활의 양식(Style), 생활의 간소화, 교육, 문화의 세계적이면서 한국적인 구상과 장려, 교회의 사회화와 국민의 민주화 훈련 문제, 학생과 교수, 학생과 사회, 남녀관계, 성문제 등등에 있어서 멋지게 날마다 더 새로움을 보여줘야 하겠습니다. 요컨대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되어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무준비의 공백을 품은 채 행운만 기다리는 경향이 정리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재미 학자회 여러분에게 특히 이것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19755

Boston 재미기독학자회에서 Keynote Speech

 

年譜抄

 

1945.

  • 9 -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항복문서 조인
  • 8. 16 - 해방소식 전달 / 해방군을 맞이하는 군중이 남대문역에 운집

 

1946.

  • 1 - 모스크바 3상회의
  • 3. 20 - 한국통일독립문제협의를 주제로 미ㆍ소 공동위원회가 덕수궁 석조전에서 모임
  • 4. 21 - 이승만이 장개석 전용기로 국민외교 마치고 귀국

 

1947.

  • 5. 21 - 일시 중단되었던 미ㆍ소공위 재개

 

1948.

  • UN 한국위 공개회의

 

1948.

  • 3. 8 - 김구 등 남북협상 제의
  • 4. 19 - 김구 향북 선우진, 김신 등 수행
  • 5. 20 - 제헌국회 개원식
  • 7. 24 - 이승만 대통령 취임, 하지, 맥아더 등 참석
  • 8. 15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1949.

  • 2. 17 - ECA 사절단 내한
  • 7. - 미군철수 제1인 인천 이륙

 

1949.

  • 3. 31 - 미군철수 반대 데모
  • 7. 5 - 김구 장례식

 

1950.

  • 6. 17 - 떨레스 38선 시찰
  • 6. 25 - 이북군 38선 돌파 남하
  • 6. 28 - 이북군 전차대 서울진입
  • 9. 28 - 미군 인천 상륙
  • 11. - 국군 평양 입성

 

1952.

  • 12. - 아이젠하우어 한국전선 시찰

 

1953.

  • 7. 27 - 판문점에서 휴전조약, 휴전 반대데모

 

1953.

  • 8. 8 - 한미방위 조약체결

 

1956.

  • 5. 23 - 신익희 장례식
  • 8. 15 - 이승만 제3대 대통령 취임

 

1957.

  • 9. 18 - 월남대통령 고딘 디엠 한국방문

 

1958.

  • 1. 30 - 평화선 침범 일본어부 납치와 송환

 

1959.

  • 1. - 재일교포 북송 반대데모
  • 7. 27 - 야당의원들의 국민주권 옹호 위원회 구성, 45입 소동

 

1960.

  • 4. 11 - 김주열 시체 발견, 국민분노, 315 부정선거 규탄데모 부산서 학생 선도(先導),
  • 마산과 각지방에 퍼짐
  • 4. 18 - 고대를 비롯하여 서울 각대학 데모, 정부 폭력단과 충돌
  • 4. 25 - 교수단 데모
  • 4. 26 - 경찰의 무차별 발포, 미 대사 이승만 하야 권고, 이승만 하야 성명, 이기붕 일가 자멸.
  • 5. 29 - 허정 비밀리에 이승만을 하와이에 도피시킴, 아이젠하우어 다시 내한.

 

1960.

  • 8. 15 - 2공화국 민주당정권 수립

 

1961.

  • 1. - 3부요인 경무대에서 회동.
  • 5. 16 - 장도영 중장, 박정희 소장 등의 군사 쿠데타 성공
  • 5. 18 - 육사생 쿠데타 정부지지 행진, 장도영 총리 하야성명
  • 5. 21 - 윤보선 대통령 유임 요청(군정에서)
  • 5. 20 - 국가재건 최고회의 각원 취임선서
  • 6. - 국민재건운동본부 신설
  • 7. 21 - 송요찬 내각수반 기자회견.
  • 7. 29 - 혁명재판소 개소식
  • 8. 12 - 63년에 군정 종식, 민정복귀 약속
  • 8. 17 -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에 대한 사형언도 공판
  • 11. 5 - 소련 핵 실험 반대 우산반대
  • 11. 11 - “미국 방문, 일본 들러 池田 수상, 전 수상 등과 요담

 

1962.

  • 2. 24 - 울산공업 기공
  • 6. 10 - 화폐개혁
  • 8. 28 -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 등 4명 검거 사형, 장면 二主당 반혁명 은모사건으로 피검, 장도영 반혁명 혐의로 구속
  • 12. 11 - 김종필, 태평 회담, 윤보선 대통령 사임성명.
  • 12. 11 - 일본 자민당 부총재 등 40명 한국 방문, 김종필 태평 회담, 윤보선 대통령 사임.
  • 7. - 이주당 사건 공판
  • 12. 25 - 시민회관에서 제3공화국 새헌법 공포.

 

1963.

  • 1. 3 - 단일야당 창립준비를 위한 구정치인 지도자 회담
  • 1. 18 - 김종필 공화당 창당이념 천명.
  • 2. 30 - , , 3자회담, 진전 없었음
  • 3. 16 - 2. 27성명 번의, 4년간 군정연장 반대 데모, 각처에서 군정연장 반대 데모
  • 3. 22 - 민정당에서 군정연장 반대 구국선언 대회 데모
  • 6. 3 - 4대 의혹사건의 하나인 증권파동 동판.
  • 8. 10 - 전 걸설부장관 박림항 중장 반혁명 사건으로 공판.
  • 8. 30 - 5군단에서 17년 군사생활 마치는 예편식 거행 (박정희 퇴역)
  • 9. 3 - 자민당산파역 김재춘 자의반 타의반 외유
  • 8. - 한ㆍ일국교 정상화 반대운동 치열
  • 9. 19 - 전 최고회의 외무 국방위원장 김도화 소장과 박창암 대령이 반혁명 사건으로 재판 회부
  • 3. 20 - 윤보선 전 대통령 미 대사관 앞에서 군정연장 반대 데모. 월남전에 비둘기 부대 파병, “서독 방문.
  • 12. 17 - 1015 선거에서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6대 국회 개원식 선서, 김종필 제2차 자의반 타의반 외유.

 

1964.

  • 4. 18 - 학원사찰 반대 데모, 굴욕 외교 반대 데모
  • 6. 3 - 계엄령 선포, 각 대학 계엄군 점령, 신문 사전 검열
  • 9. 12 - 언론 윤리법 선포, 자율규제 시도로 신문 윤리위 구성, 전국 언론인 궐기, 언론규제 철폐 요구.

 

1965.

  • 3. 21 - 한ㆍ일회담 반대 데모
  • 3. 27 - 야당 데모
  • 5. 16 - “미국 방문

 

1969

  • 8. 3 - 3선개헌 반대 범 국민투쟁위 구성, 선거 종료 후 해산.

 

1970년대의 연보는 생략.

 

[각주]

  1. 기합(氣合) - 군대나 학교 따위의 단체 생활을 하는 곳에서 윗사람이나 상급자가 잘못한 아랫사람을 단련한다는 뜻에서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일
  2. Anounciation - 수태고지
  3. 박형규(朴炯圭, 1923~2016) - 경남 창원시 마산 출생. 1950년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중퇴하고 1950~58년 미 육군에서 근무했다. 그후 목사가 되기로 결심해 1959년 일본 도쿄(東京)신학대학원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1963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이후 공덕교회와 초동교회에서 목회 사역했다. 1967년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지냈으며, 1968년 기독교서회 발행 <기독교사상> 주간, 1970년 기독교방송 상무이사를 지냈다. 1972년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19928월까지 20년간 시무했다. 1981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66회 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실천하여 1973년 반유신체제 시위인 남산부활절사건’, 1974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기독교장로회 청년 전주시위사건등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등 평생 여섯 차례 옥고를 치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2002~2005)과 남북평화재단 이사장(2007~2011)을 역임하였다.
  4. 지학순(池學淳, 1921~1993) - 세례명은 다니엘(Daniel). 평안남도 중화 출생. 1934년 중화공립보통학교 재학중에 중화본당 신부 콜먼(Coleman)에게서 영세하였고, 이듬해 동성상업학교 을조(乙組, 小神學校)에 입학하였다. 1940년 병으로 중퇴한 뒤, 1943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로 편입하였다. 1949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덕원신학교가 폐쇄되자 월남을 시도했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그해 말 동료 윤공희(尹恭熙)와 함께 월남에 성공, 다시 성신대학으로 편입하였다. 625 전쟁 때 자원 입대하였다가 부상으로 제대하였고, 1952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56년 로마 프로파간다 대학에 유학, 교회법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9년 귀국하였다. 1962년 부산 초장동본당 주임을 거쳐 1965년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고, 6월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1972년 교구 내에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설치하여 재해민 구제에 힘쓰는 한편, 한국의 사회ㆍ정의ㆍ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하여 1974년 내란선동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5,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가 이듬해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교회 안팎으로 큰 영향을 주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 사제단이 결성되는 데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9859월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에서 휴전 후 최초로 공식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였다.
  5. 김지하(金芝河) -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다. 1954년 아버지를 따라 원주로 이주하여 원주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 중동고등학교를 다녔으며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여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고, 1970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후 다시 구속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에 징역 7년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1980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0년대 이후 생명 존중 사상을 수용하고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썼다.
  6. Mentality - 사고방식, 심리, 성향, 본능
  7. Nightmare - 악몽
  8. 광태(狂態) - 미친 사람과 같은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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