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3일 월요일

[범용기 제6권] (19) 한국 민족과 한국 교회

[범용기 제6] (19) 한국 민족과 한국 교회

- 민족 종교로서의 기독교 -

 

한국 민족이 형성되기에는 적어도 5천년의 역사적 시련이 필요했습니다. 우랄ㆍ알타이 계로서 민족 이동이 한창일 때, 몽고에, 시베리아에, 만주에 퍼졌고 더러는 북구라파에까지 옮겨갔습니다.

만주의 부여족이 숙신, 말갈, 달단[1] 등 비슷한 족속들을 통합하여 부여족의 전성시대를 가졌습니다.

국사학의 거두인 신채호 선생은 중국의 나라 문화는 부여족의 중원 이동에서 창조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맹자은 동이족(東夷族)이고 주()는 서이족(西夷族)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여족이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동하여 한국 또는 조선 민족이 됐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설화는 직접 동부여족의 혈맥에 잇닿아 있습니다. 신라는 남방민과의 인연이 더 농후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북방 민족과 인연이 아주 없는 것은 물론 아니겠습니다.

한반도에 옮겨온 부여족은 3면이 바다여서 더 갈 데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 자리에 정착했습니다. 단군신화는 아마도 그 정착의 시점에서 생겨난 전승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여족 중에서도 더 용감하고 모험적인 부대는 바다를 건너 일본 땅에 새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연원이야 어쨌든, 지금의 한국 또는 조선 민족은 몽고족도, 한족도, 만주족도, 남방족도, 일본족도 아닌 한국또는 조선민족으로 고정되어 바꿔질 수 없는 한 민족단위로 정립됐습니다.

우리 민족 역사를 흔히 반만년 역사라고 합니다만, 훨씬 이전부터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됩니다.

한반도에서 전에는 신석기시대 유물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만, 근년 함북 웅기항 패총을 파헤치는 가운데서 구석기 시대 유물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거기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아들 낳고 딸 낳고 붇고 퍼지고 싸우고 친하고 뺏고 뺏기고 모아 들고 흩어지고 하면서 마침내는 한국 또는 조선 민족으로 뭉쳐 나라를 세웠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민족을 한 단위로 형성하기 위하여 그렇게도 오랜 세월을 경륜하고 준비하고 정립시킨 것이라면 뭔가 우리 민족에게 맡길 민족적 사명이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서 종교적인 사명을 맡긴 것 같이 동양에서 한국 민족에게 뭔가 독특한 사명을 맡기려는 경륜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정치일까요?

우리 민족에게 정치 관심은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 정치운영에는 늘상 졸렬했습니다. 3국시대에도 세 나라가 서로 자기중심의 ”()을 달리지 말고 3국 연맹체로 뭉쳐 중국이나 일본에 대결할 때 정치적 구상을 품고 그 실현을 위하여 운동을 일으킨 정치인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중국의 소진[2], 장의[3] 정도의 정치 유세꾼도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전 세계의 금융과 무역을 주름잡을 만한 자원도 없었고 그런 꿈을 실현하려는 폭 넓은 상인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군사적으로 세계정복의 꿈을 가진 군인도 없었고 중원점령의 군사 활동을 시도한 사례도 없었습니다. 만주족은 중원에 쳐들어가 왕조를 세웠고 몽고족은 중국에서 왕조를 세웠고, 소위 516국의 춘추전국 시절에는 사면팔방의 각이한 민족들이 중원에 몰려들어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패거리에 우리 민족이 끼어들지는 않았고 시종 얌전하기만 했습니다.

이조 말에는 남이[4] 장군 같은 20대의 탁월한 군인이 있어 종성(種城)에 주둔하여 만주족의 한국침입을 막고 이겨 항복받고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함경북도 조산만호로 거란족의 한반도 침입을 봉쇄한 일도 있었습니다만, 결국 그때 그것만으로 끝났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전남 완도의 어느 젊은 분이 탁월한 실업인으로 중국 무역에 민완을 휘둘러 중국 왕래의 해상권을 독점하다시피 한 일도 있었답니다만 애매하게 역적 음모로 몰려 죽고 말았습니다.

권좌에 앉아 놀고먹는”, 발바닥에 먼지 한 알 묻혀보지 못한 양반네들의 승기자압지”(勝己者壓之) 때문에 이순신도, 남이 장군도, 완도의 무역상(장보고)도 억울하게 몰려 뜻을 못 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민족이 실제 정치운영에 졸렬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문화와 종교면에서는 자랑거리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화면에서 세종대왕 때의 한글창안의 자랑스러움을 빼 놓고 본다면 거의 전부가 대륙문화의 전달 또는 습득 정도였고 원초적인 창조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혹 창조적 발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륙점(離陸点)으로 해서 더욱 높고 넓고 크게 발전시키는 일은 못했던 것입니다.

발명, 또는 발견한 것은 그 개인의 비장(秘藏)품이거나 그 가문의 가보로서 좀처럼 세상에 나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령 이순신의 거북선만해도 그 당대, 난리동안만 허용됐었고 그것으로 끝났던 것입니다. 고리고리 보수적인 역사였습니다. 종교로 말한다면, 자랑거리가 훨씬 더 많다 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본래적인 종교는 무교샤머니즘이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이 무당종교 멘텔리티는 우리 민족 심리의 심층에 끈덕지게 또 겹겹이 침전돼 있다고 합니다. 특히 부녀자 계층에 더합니다. 그 후에 불교, 유교, 천주교, 기독교(개신교)등이 들어왔지만, 무교와의 습화(習化)에는 정도의 차는 있어도 예외는 없다고 합니다.

소위 고등종교라는 불교가 기원 372,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여름 6월에 秦王(진왕) 부견(符堅)이 보낸 중 순도”(順道)[5]에 의하여 고구려에 들어왔고 소수림왕 4년에 중 아도”(阿道)가 와서 선교했고, 소수림왕 5년 봄 2월에 초문사”(肖門寺)[6]란 절이 세워졌고 이어서 이불란사[7]를 세워 거기에 를 주재시켰다고 합니다.

신라에는 법흥왕 15, 이차돈[8]의 순교와 백혈(白血) 기적을 계기로 불교가 수립되어 마침내는 불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원효대사[9]는 중국에도 인도에도 유학한 일이 없었지만, 스스로 성불하여 대승기신론이란 방대하고 독특한 학적 논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많이 산질, 유실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경주에는 지금도 불교 유적이 많습니다. 고도(古都)에 풍기는 낭만의 남은 향기가 묵호자[10]가 피운 향로에서 지금도 향기롭습니다.

석굴암의 불상은 서장 돈황(敦幌)[11]의 그것들 보다 규모는 몹시 작습니다만, 미술적인 정교는 월등하답니다.

 

도교”(道敎)도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고려시대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도교란 것은 자연 안에서의 인간을 응시하며 자연과 조화된 인간을 높이 평가하려는 철학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중국에서 전한”(前漢), “후한시절에 국교에 가까울 정도로 득세했었습니다만, 종당에는 윤리성의 박약 때문에 현세적 길흉화복을 점치는 참서류”(讖書類)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시인의 풍류는 높은 경지에서 도교적이겠고, “풍수설은 낮게 흐른 하류도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교는 한국에도 삼국시대에 벌써 들어왔습니다만, “이조에서 국교행세를 하게 된 때에 권좌에 올랐습니다. 그것도 원래 중국에서의 제전을 기반으로 삼고 그 위에 인ㆍ의ㆍ예ㆍ지ㆍ신 등 윤리교훈을 짜 넣은 것이니만큼 그 본바탕은 종교였다고 하겠습니다. 공자의 도 주로 제전적인 바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조에서는 주자학이 유교의 전부인 것 같이 생각하여 유교의 다른 학파들은 얼씬도 못하게 했고 그것이 너무 세속화한 탓으로 종교적 영적인 요소가 증발되서 종교 활력소를 잃어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샘터없는 물웅덩이가 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조 유교에서도 퇴계[12], 율곡[13] 등 세계적인 유학자를 배출함으로 우리 민족의 별빛이 영원토록 빛나게 했습니다.

 

근년에 한국산 신흥 종교들이 속출해서 동양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만연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서 보기 드문 현상입니다. 여러 가지 심리적, 사회적 이유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그 심장부는 역시 한국 민족에게 innate[14]종교 지향성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른 종교 얘기는 이만큼 하고 이제는 기독교로 옮겨 봅시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극히 최근에 속하는 이조 말기였습니다.

천주교가 철종[15] 시대에 중국을 통하여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중국에 국사로 가는 사신들 일행에 끼어 북경으로 갔던 한국 학자들이 북경에서 가톨릭의 제스윗[16] 신부들을 만나 서양학을 배우면서 천주교 교리문답 책을 읽게 되었고 그것도 西學의 하나로 알고 접근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카톨릭 교리책들과 서양 과학서적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다양하게 또 다량으로 사 갖고 왔습니다. 천주교 서적을 읽는 가운데 그들은 천주를 믿게 됐습니다. 그러나 지도자, 전문적인 교역자가 없기 때문에 교회의 설립이나 조직은 할 수 없었고 자의로 교의를 해득하려 한 것뿐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그들도 여전히 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교적 교훈을 실제생활, 특히 서민층 생활에 실천시키려는, 말하자면 생활 유교의 주장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실학파[17]란 칭호가 붙게까지 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직접 간접으로 천주교에 영향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후에 중국인 주문모[18] 신부가 입국하여 본격적인 가톨릭 교회 터닦이가 시작됐습니다.

정약용[19], 정약종[20] 등 실학파 학자들은 그 후에 모두 사형, 유형을 당하고, 한국 신부 김대건[21] 씨 시대에서 교회가 섰습니다만, 그도 순교했습니다.

필자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 천주교가 첨부터 외국 선교사에 의하여 선교되고 정착된 것이 아니라, 한국 지식인 자신들이 스스로 연구하고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죽음으로 씨를 뿌렸다는 그것입니다. 한국에서 순교한 한국인 신도들, 지식인들의 가 한국 천주교의 가 되어 자라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거듭거듭 밀려오는 박해와 순교의 역풍을 거슬러 싸웠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 천주교사는 한국에서의 선교 역사나 종교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근세사 자체의 Dynamic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대원군의 쇄국시대가 지난 다음에 들어왔기 때문에 정치 집권자의 박해는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로는 1885년 부활절 날에 미국 북장로회 호레스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교회 H.G. 아펜젤러가 인천항에 같은 날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보다 2년 전에(1993) 의사인 알렌이 와서 황제의 궁의로 대감 벼슬도 했다고 합니다만, 그는 본격적인 복음 전파자는 아니었습니다. 터전 고르는 공사는 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나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의 지성인으로 개화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이수정[22] 씨가 일본 체류 중 일본의 내촌감삼[23]이나 식촌(植村正之) 등 기독교 거물들과 친교를 갖고, 신약성경의 마가복음서를 한국말로 번역 출판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이 번역한 복음서를 갖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용익[24]하느님 밖에는 한국과 한국 민족을 구원할 분이 없다면서 각방으로 선교의 터전을 닦아 두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개신교도 한국 민족 자신이 주동적, 능동적으로 작업해서 그 빛의 들창을 열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전인 1880년 중국 만주 목단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가 한국인 서상륜[25] 씨와 함께, 이미 간행된 중국어 성경을 대본으로, 한국말 성경 간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상륜 씨는 그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손수 한국말로 성경을 번역하기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열매로 1882년에 심양 문광서원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3년에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1884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1887년에는 마침내 신약성서 전서가 간행되었답니다.

 

1882년쯤에는 쇄국정책이 다소 완화되기 시작하였지만, 복음서가 본국에 들어오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왔었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쪽복음들을 유지에 싸서 압록강에 띄워 보내기도 했다 합니다. 어느 해변 모랫가에라도 닿으면 주워다 읽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였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도 한국 기독교가 자력으로, 또 자의로 한국 민족에게 전달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제1호인 황해도 송천교회는 서상륜 씨가 그 창설자였답니다.

 

갑신정변[26]의 파국은 한국 역사의 또 하나 비극이었습니다만, 이 하늘의 샘터를 막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개화운동자들은 기독교적으로 친화돼 있었습니다. 독립협회[27] 지성인들도 기독교와의 일체감을 맘 깊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을사보호조약[28]과 한일합방에의 항거,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31 운동 이후의 국내 국외 독립전선, 해방 후의 정치인들, 사회운동가들 등등이 적어도 한때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예가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한국 교회 자체가 맨 처음 1885년 이후 선교사 주도 하에 보육원성격으로 육성되었고 대 사회, 대 국가, 대 민족 관계에서 직접 책임적인 입장을 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 또는 각양 외세의 압력과 교회 자립의 열성과가 상호작용하여 필경에는 교회주의에 농성하게 되었다는 부끄러움을 자취했다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한두 해가 아니라 50년의 긴 세월을 변함없이 그러했고 해방 후에도 그 조개껍질 속에서 탈출할 용기는 좀처럼 생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31 독립선언서에서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은 천도교와 기독교와 불교 대표들이어서 모두 종교인이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기독교로서는 역사적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그야말로 풀에 꽃과 같아서 오늘 있다가 내일 시들어서 아궁이에 타 버리는(베드로전서 1:24) 하염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확고한 신학적인 뒷받침 없이 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학생과 청년들 부대는 용감했습니다.

그리고 서민층은 끈기 있었습니다.

박은식[29] 선생의 한국독립혈사에 보면 그 때에도 역시 교회가 가장 많은 피해자였습니다. 일제의 살육 정책에 사망자 7509, 부상자 15961, 투옥자 46948, 소실된 교회 수 47, 소실된 학교 수 2, 소실된 민가 수 715라고 집계돼 있습니다. 일제 당국에서 발표한 집계와 비슷합니다. 피해자의 대부분이 교회 관계 인사들이었습니다. 105인 사건[30]도 일제가 교회 지도자를 말살하려는 음모였습니다.

해방 후에 해외에서 들어온 독립운동자들과 지사들도 거의가 기독교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민족과 기독교를 他山之石[31]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북에서 기독교를 완전 말살한 것은 자멸 행위라 하겠습니다.

어쨌든, 기독교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뺄 수 없는 민족 정신의 활력소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남한에서의 반독재 민주운동에 선봉으로 나선 학생들의 핵심 분자도 기독학생이 대부분이고, 파면 교수들도 거의 전부가 기독교 교수 협의회 회원들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민족적 정신 속에 토착화 한 유산으로 돼 있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남한을 여행하노라면 어느 치벽한[32] 산골 농촌에도 반드시 오막살이 교회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처소일 뿐 아니라, 회의실이고 상담소고 강연 장소고 오락실이고 교육관이고 친교실이기도 합니다. 성경 공부도 거기서 합니다. 이웃 만들기도 거기 모이는 데서 싹틉니다. 한 주일에 세 번씩 모인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과 나와 내 가정과 내 이웃과 내 사회와 내 나라를 내 삶에 심는 것이 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렇게 자주 모이는 규례가 흔치 않습니다.

지금 한국인 이민 사회에서 보더라도 한국인 사회에는 반드시 교회가 서 있습니다. 토론토에도 한국인이 약 1만 명 가량 있는데 교회가 다섯인가 됩니다. 교포 단체로서 한인회가 있습니다만, 교회에서처럼 알찬 봉사는 하기 어렵습니다.

유태인 사회에 유태교가 있고 회당, 시나고그가 있는 것 같이 한국인 사회에는 기독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종교적으로 감수성이 강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 그렇게 종교적이 된 것일까? 지금은 고인이 된 지 오랩니다만, 일본의 유종열 교수는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한국 민족이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서 언제나 수난하는 민족으로 지냈기 때문에 현세적인 데에는 안정을 느낄 수 없고, 늘상 영원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안심입명”(安心立命)[33]을 더 많이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겠습니다. 그런 설명도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의 한 부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역사 안에는 고난받고 천대받는 민족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종교적으로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고난은 주로 외부 세력에서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난에 대결하는 수난자의 주체적 판단과 대응 태도에 의하여 그 의미와 가치가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의 도전에 대한 수난자의 응전태세 여하에서 그 가치가 산출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든다면 1) 고난 받을 때 이를 갈고 참으면서 어디 보자! 내가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리라……하는 보복주의, 2) 고난은 내 삶에 있어서 한 시련이니 이것을 잘 넘기면 다음에는 좋은 날이 오리라…… 하는 것, 말하자면 고난을 수난자 자신이 현세적 성공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낙관적 태도, 3) “생사화복이 모두 타고난 팔자니, 그런 대로 살다가 그런 대로 가는 거지, 그걸 크게 문제시할 것 없다……하는 운명론, 또는 좋게 말해서 체념또는 달관하는 초월적 태도, 4) 고난은 도덕적으로 악에 대한 심판이므로 깨닫고 회개해야 할 사랑의 채찍이라는 도덕주의적 해석 등등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들은 고난에 대한 소극적인 수세여서 결국은 안일주의 입장에서 보는 고난관이겠고 고난은 본질적으로, 있어서도 안 될 불행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닥쳐오니 그걸 어느 정도 합리화해 보자는 밤 본새라 하겠습니다. 특히 개인관계를 넘어서 전민족적인 고난이 닥치는 경우에는 더욱 애매 몽롱하게 됩니다. 침략하는 강대국은 의로운 나라“, 자랑스러운 나라로 변장해도 당연하게 인정받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소극적 수동적인 고난 이해는 이 정도로 끝내고 본 줄거리인 한국 민족의 민족적 고난과 그 기독교적 의미라는 본 과제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고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역사적 민족적으로 이유 불명의 수난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소극적 수동적인 견해를 박차고 적극적 건설적인 숭고한 의미를 천명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민족적 종교적 사명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지정학적으로나 민족적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난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에 대한 응전태세를 들어 보기로 합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점은 고난,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메시야적 희망 실현 과정에서 가장 고귀한 정점적인 위치에 도달했다는 그것이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애독한 성경구절이라고 느껴집니다만, 이사야 53장은 수난의 종 메시야의 장()입니다. 이 이사야 53장은 민족적 수난의 가장 숭고한 이해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은 속량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특히 포로 중의 이스라엘 민족은 마른 땅에서 나오는 풀잎 같아서 모양도 풍채도 보잘 것 없고,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퇴박거리가 됐고, 곤고를 겪고 질고를 아는 인간,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갈 만큼 멸시만 당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

그런데 실상은 하느님이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셔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상하고 매맞고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 민족적 수난을 전 인류의 속죄 제전에의 희생으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인간화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 전 6세기의 예언이 그리스도에게서 개별화(Individualize) 했고 인격화(Personalize)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유태민족만 아니라 전 인류를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이상 왕국 건설자로 출동시키려 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한 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를 높이 들어 전 세계 인류의 구세주로 장립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한국에 찾아 왔습니다. 한국 역사, 한국 민족의 구원자로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한국 민족을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를 한국 민족에게……라는 슬로건이 엘리야의 불수레처럼 달려야 하겠습니다.

나는 한국 민족에게 종교 지향성이 강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물론 다른 민족에게는 종교성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에 맨 처음 나온 미국선교사들은 한국인에게는 종교 지향성이 아주 없다고 결론지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유교가 국교 구실을 하는 현실에서 본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은 판단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나는 이상에서 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민족 종교로 수락되기를 희구했습니다.

그것은 한국 민족이 종교 안에서 민족적 사명을 발견하고, 종교들 중에서도 현재 역사 안에 살아 역사의 다이나믹스로 생명력을 발휘하는, 세계적 종교로 인정된, 기독교를 민족 종교로 하여 그것을 한국 역사와 한국 현실에 토착화하고 의식화해야 하겠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세계적인 그리고 오고오는 세계 역사 진전에 언제나 정신적 윤리적인 Spearhead가 돼 왔고 금후에도 그럴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민족 종교로 정립한다는 것은 어떤 민족 국가의 최고 집권자가 칙령으로 법화(法化)국교로 하라는 요망이 아닙니다. 정부에서는 종교신앙의 자유를 엄수하고, 교회의 내정이나 신자의 양심적 결단에 폭력 행위로 간섭하지만 않으면 된단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기독교에서는 영원시간안에 맞이하여 현실 역사의 정황을 상대로 예언자적 증언을 외치고, 미래 역사의 창조에 비전을 제공하고 그 비전에 따라 교회와 사회에 책임적인 사랑의 공동체건설에 앞장서는 Builder가 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서구 여러 나라와 달라서 그 신봉하는 종교가 기독교로 단일화한 것이 아니라, 각이한 복수형의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고신도(古神道), 불교, 유교, 천도교, 온갖 유사 종교 등등이 무던히 다채롭습니다.

기독교를 민족 종교로 한다면 아마도 종교계에 내란이 폭발할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기독교는 스스로 겸손하여 한국 민족과 그 역사의 난국에서 이사야 53장에서와 같은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는, 입에 거짓을 담은 일도 없었지만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힌 자기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어 놓은……고난의 종을 따라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은 하느님께 맡길 뿐입니다. 하느님이 다시 살려 높여 주시면 더 크고 더 많은 선한 봉사로 한국 민족역사에 이바지 할 것이고, 수난 과정에서 끝난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이라 감사하며 한국 민족된 사명을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민 속량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각기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분부했습니다.

한국 기독자에게는 민족적 십자가도 있고 크리스천이 져야 할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으로 사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더 큰 생명,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적 수난 없이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민족적 부활도 없습니다.

한국 민족의 수난은 한국 민족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나 크리스천에게서 십자가를 제외하면 이빨 빠진 사자가 됩니다. 덩치 크고 큰 소리 쳐도 싱겁게만 보입니다. 십자가는 심볼이나 노리개나 미술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갖고 다니기에는 너무 무겁고 힘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십자가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나를 갖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에 내 생명을 도박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고난의 무덤에서 승리의 부활이 돌문을 헤치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민족적 사명도 이것을 선포하는 데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은 수난자요 한국 민족은 고난의 민족입니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38선이 그어졌습니다. 그리고 두 강대국 진영은 남과 북에 제각기 자기들 우표딱지를 붙여 놓았습니다. 남과 북의 정치 집권자는 그들 배후 권력에 붙어 돌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민족이 서로 반목하고 동족상잔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화해보다도 상극을 격동시키고 있습니다.

미국 국방장관은 김일성이 38선을 넘는 날에는 가차없이 원자탄을 퍼 붓는다고 공언했습니다.

새로 새로 만들어내는 고성능 원자탄을 약소민족 섬멸에서 테스트해보려는 심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던히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입니다.

듣는 바에 의하면 박정희 정권과 결탁한 미국 국방부는 적어도 720개의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를 Target으로 준비된 것입니까?

미국의 군사적 라이벌소련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소련을 건드리면 너 나 없이 둘다 망하고 전 인류가 사멸할 우려가 짙답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있는 약소국에 공갈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박정희 씨는 일시 흐뭇해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민족의 파수꾼으로 자부하는 한국 기독자로서는 소름끼치는 광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기독자는 이런 위기에서 “NO”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NO”의 발언이 없으면 “YES”에 가산되고 “YES”자의 심판 자리에 같은 죄수로 동참하게 됩니다.

이것이 한국 기독자의 위기입니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 떼가 북에도 남에도 돌격대 같이 날뜁니다. 한국 기독자는 을 위해 목숨 바치는 선한 목자에게 미래 한국의 민족상과 역사를 맡기고 그것을 위하여 선한 목자와 전선의 대열을 같이 하는 십자가 군병이 됩시다. 소수지만 이런 크리스천 그룹이 한국에 있어 증언하고 데모하고 옥에 갇히고 더러는 사형 또는 무기로 감방에서 고난과 죽음을 영광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 민족의 자랑이고 한국 민족의 종교 지향성의 꽃이고 열매입니다.

그 빛이 만방에 새 아침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한국에 찾아와서 그들과 고난을 나누고 있습니다.

 

[1975. 10. 시카고에서]

 

[각주]

  1. 달단(韃靼) - ‘타타르’(Tatar)의 음역어
  2. 소진(蘇秦, ?~?) - 자는 계자. 동주의 뤄양[洛陽]에서 태어나 장의와 함께 제()의 귀곡자에게 웅변술을 배웠다. 처음에는 진()의 혜왕(惠王)에게 유세했으나 기용되지 않았다. 후에 연()의 문후에게 기용되어 동방 6국을 설득하고 합종동맹을 체결해 진에 대항했다. 공을 인정받아 조()의 우안[武安지금의 허베이 성에 있음]에 봉토를 받았으나, 곧 참소를 받아 망명했다. 제에서 암살당했다고 한다.
  3. 장의(張儀, ? ~ BC 309) - 장의(張儀)는 위()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소진과 함께 귀곡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세술(합종술과 연횡술)을 배웠는데, 소진은 스스로 장의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장의(張儀)는 전국시대에 활동한 사상가이며 전국 6국이 진과 화친하여 공존을 꾀한 연횡책을 주장했다. 출생년도는 알려지 있지 않으며 기원전 309년 즉 진()나라 무왕(武王) 2년에 위나라에서 재상이 된지 1년만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4. 남이(南怡, 1441~1468) -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 진압에서 공을 세운 조선 초기의 장군. 세조 3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의 애를 받아 여러 무직을 역임하면서 경력을 쌓던 중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우대장이 돼 구성군 준의 지휘 아래 진압에 참여했다.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됐으나 신숙주, 한명회 등이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세력을 제거할 때 병조판서에서 해직됐다. 예종 즉위 후 유자광에 의해 역모를 꾀한다는 모함을 받고 국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5. 순도(順道) - 본래 천축 사람이라고도 하며, 전진 사람, 위 사람이라고도 한다. 372(소수림왕 2) 6월에 전진의 왕 부견이 순도를 시켜 사신과 함께 불상·경전을 가지고 고구려에 가게 했으며, 이에 고구려 왕이 부견에게 사신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순도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했다. 순도는 자비심이 많고 덕이 있었으며, 교화에 열성을 보였다 한다. 375년 봄에 창건한 성문사에서 거주했다. 성문사는 나중에 흥국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6. 초문사(肖門寺) - 성문사(省門寺). 위치는 미상이다. 372(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라는 승려를 통해서 불상과 경문을 고구려에 보낸 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효시가 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375(소수림왕 5)에 왕은 초문사(肖門寺)라는 절을 짓고 순도를 머물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는 다르게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373(소수림왕 3)에 왕이 성문사(省門寺)를 짓고 순도를 머물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초문사는 해동고승전에 등장하는 성문사의 오식으로 보기도 한다.
  7. 이불란사(伊弗蘭寺) - 소재지는 알 수가 없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374(고구려 소수림왕 4) 아도 스님이 진나라로부터 오자, 이듬해 2월에 초문사를 지어 순도를 머무르게 하고,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를 머무르게 했는데, 이것이 고구려에 불법이 들어온 시초라고 했다.
  8. 이차돈(異次頓, ?~527) - 이차돈은 순교를 통해 신라 법흥왕 때 불교 공인을 이루었다. 그의 이름은 거차돈, 염촉이라고도 하며 심지가 곧고 의로움에 분발하는 용기가 대단했다. 순교 당시 국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사사인의 직책에 있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통해 나라를 발전시키고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했으나 토착신앙을 믿는 귀족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차돈은 왕과 함께 그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강구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불교를 융성시키려고 결심했다. 그는 왕명을 가장하여 천경림에 절을 지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지면서 이차돈은 처형당했다. 그의 목을 베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고 귀족들은 불법을 받들고 귀의할 것을 맹세했다. 그의 순교를 계기로 왕은 529년에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고, 신라 최초의 불교사찰인 흥륜사를 천경림에 짓기 시작해 544(진흥왕 5)에 완성했다
  9. 원효(元曉, 617~686) - 당나라로 유학 가던 길에 해골물 일화를 통해 득도한 신라의 승려. 속성은 설, 아명은 서당, 신당, 이름은 사례이며 원효는 출가한 뒤의 이름으로 의상과 함께 고구려의 고승으로서 보덕에게 <열반경>, <유마경> 등을 배웠다.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위해 당항성으로 가는 중 어느 토굴에서 자다 목이 말라 바가지에 있던 물을 달게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 보니 토굴이 아닌 무덤에서 해골에 고인 물을 마셨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고 깨달은 뒤 유학을 포기했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와 도교, 법가사상 등에도 해박했으며,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후일 대학자가 된 설총을 낳았다. 현재는 원효대교와 원효로 등으로 이름을 기리고 있다.
  10. 묵호자(墨胡子) - 신라 눌지왕 혹은 미추왕 때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일선군에 와서 모례의 집에 굴을 파고 살았다. 이때 양나라 사신이 의복류와 향을 가져왔으나 향의 사용법을 모르자 묵호자가 이를 알려주었고, 또한 큰 병을 앓고 있던 왕녀를 고쳐주었다. 이에 왕이 흥륜사를 지어주고 불법을 펴게 했다. 그뒤 영흥사를 세웠으나 왕이 죽자 그를 해치려는 백성들을 피해 모례의 집에 돌아와서 굴을 파고 문을 봉한 뒤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한다. 삼국사기에는 눌지왕 때의 묵호자로, 삼국유사에는 미추왕 때의 아도로 기록되어 있어 이 둘을 동일 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
  11. 돈황(敦煌) - 주취안 지구에 속하는 현청소재지이며, 간쑤-신장 사막 내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다.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따라 펼쳐진 중국인 거주지의 서쪽 끝에 해당하며, 서양에서 중국 통치영역으로 들어가는 외국상인들이 처음으로 거쳐 가는 교역도시였다. 둔황이 처음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한나라 때인 BC 2세기 말경이었다. 4~5세기에는 연이어 후량·북량·서량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에 둔황은 중앙아시아와의 교역에서 중요한 대상도시이자 상업 중심지였다. 둔황에는 대상교역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소그디아나인과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이 살던 마을이 있다. 1970년대 초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가는 철도와 간선도로가 인근의 안시를 지나가게 되면서 둔황은 교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12. 이황(李滉, 1501~1570) - 조선 중기 주자성리학을 심화, 발전시킨 조선의 유학자. 자는 경호, 호는 퇴계, 퇴도, 도수이며 1548년 단양군수, 풍기군수를 지내다가 이듬해 병을 얻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공부했다. 이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고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독서, 수양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리고 <사잠>, <논어집주>, <주역> 등을 진강했으며 <성학십도>를 저술해 바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13. 이이(李珥, 1536~1584) - 신사임당의 아들로 조선 중기 이황과 더불어 으뜸가는 학자로 추앙받은 학자.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이며 어려서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의 가르침을 받았고, 명종 3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23세 되던 해에 도산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을 방문했다. 선조 1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됐다. 이듬해 4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4. innate - 타고난, 선천적인, 천성의
  15. 철종(哲宗, 1831~1863) - 조선 제 25대 왕으로 이름은 변,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조비인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직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했으며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자 삼정이정청을 설립해 개혁책을 모집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한편 동학이 창시되고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탄압했으며, 철종은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했다.
  16. 예수회(Society of Jesus) - 이 수도회는 이냐시오의 활동에서 생겨나 1539년 수도회 조직에 대한 최초의 윤곽을 잡아서 제출했고, 교황 바오로 3세는 1540년 승인되었다. 1773년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 정부의 압박에 못이겨 예수회를 폐지하는 법령을 공포해 예수회 단체는 러시아에만 남게 되었다. 1814년 재건한 후 예수회는 가장 큰 남자 수도회로 성장했다. 예수회는 종교생활형식에 혁신을 도입했고 기동성을 강조해 세계 곳곳에서 매우 다양한 사역에 참여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고 부흥시키는 반 종교개혁의 중요한 역할을 해내면서 교회를 현대화시키는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
  17. 실학(實學) - 실학 발생 당시의 사회ㆍ경제는 봉건제가 붕괴되면서 근대사회 성립의 역사적 전제가 마련되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발생한 실학사상의 본질은 종래의 정통 성리학의 세계질서관인 화이론적 세계관의 부정이었다. 실학의 기본적인 내용과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화와 이의 구별을 부정하고, 예악의 존재 여부에 의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화이론적 세계관을 동요시켰다. 둘째, 양반의 특권을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셋째, 농업 생산력 발전을 저해하고, 농민의 몰락을 조장하는 지주 전호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넷째, 사농공상관을 부정하고, 상업 활동을 윤리적·가치적으로 정당화했다. 실학은 봉건제 말기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그 동요와 붕괴의 역사행정에 동행하면서 새로운 국가 사회를 전망하고 현실을 개혁해 나가고자 했다.
  18. 주문모(周文謨, 1752~1801) - 중국인 천주교 신부로는 최초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본국으로 돌아가려다가 마음을 바꾸어 자수하고 순교했다.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한 후 신부가 되었다. 1794년 당시 베이징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에 의해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795년 서울 북촌의 최인길의 집에 도착하여 조선 최초로 성사를 집전했으며, 반년간 큰 어려움 없이 선교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과거 천주교도였던 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졌으며, 그의 입국을 도왔던 윤유일·최인길·지황 등이 처형되었다. 피신 생활을 하면서 명도회라는 교리연구회를 조직하여 조직원들로 하여금 교리연구와 선교에 힘쓰도록 했다. 체포의 위험 속에서도 충청도 내포와 전라도 전주 등을 다니며 지방 선교활동을 했다. 1801년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19. 정약용(丁若鏞, 1762~1836) - 조선 후기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 송보, 호는 사암, 여유당이며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신유사옥 후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그는 피폐한 농촌사회의 모순에 관심을 갖고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에 대한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특히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를 통해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산은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에 가까운 인물로,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홍역과 천연두의 치료법에 대한 책을 내기도 했고, 도량형과 화폐의 통일을 제안했으며 건축기술인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20. 정약종(丁若鍾, 1760~1801) -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본관은 나주.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 정약용의 형이다.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여러 차례에 걸친 천주교 탄압으로 형제와 친구들이 배교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1794(정조 18)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자 그를 보호하면서 함께 활동했으며, 1799년에는 명도회의 회장이 되어 교리 연구와 전교에 힘썼다. 1801(순조 1) 2월 체포되어 이승훈ㆍ홍낙민 등과 함께 순교했다. 한자를 모르는 신도를 위해 우리말로 쓴 교리서 주교요지가 있다.
  21. 김대건(金大建, 1821~1846) -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모방 신부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조선에 돌아와 전교 활동과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다가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의 열성적 전교 활동과 경건하고 당당한 신앙자세는 이후 천주교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유네스코는 20191114,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22. 이수정(李樹廷, 1842~1886) - 이수정은 일본에서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세례를 받았으며 최초의 한글성서를 번역하여 펴냈다. 조선 내 기독교 전도를 위해 노력했다. 1882년 수신사 김홍집 일행 사절에 동행한 민영익의 개인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 농업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당시 일본 농업계의 대표적 인물인 쓰다를 찾아갔다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민영익 일행이 귀국한 뒤 도쿄에 남아 1883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이후 <현토한한신약성서>를 번역해 1884년 간행했고, 이어 <한역성경> 을 가지고 <마르코의 복음서>를 번역해 1885년 초에 간행했다. 1885년 장로교에서 언더우드 목사 등을 조선에 파견하자, 언더우드에게 한국말을 가르쳤으며 언더우드는 그의 번역서 <마르코의 복음서>를 얻어 가지고 한국에 부임했다. 1886년 정부의 유학생 소환령에 따라 귀국했다가 도착 즉시 처형되었다.
  23.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 근대 일본의 작가와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치무라는 다카자키 한[高崎藩]의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7년 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學校]에 입학했으며 이 학교에서 1878년 세례를 받았다. 1882년 외국 선교사의 도움을 거절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자적인 교회를 세웠다. 1884~88년 미국에 가서 공부를 계속한 뒤 일본에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1891년 덴노의 교육칙어 봉독식에서 '불경사건'을 일으켜 사직했다. 저서로는 그리스도교도의 위안 基督信徒(1893)·구안록 求安錄(1893)·나는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나 如何にして基督信徒となり(1895) 등이 있다. 그의 자유로운 종교 사상으로 인해 주위에 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鳥],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夫] 등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으며 이들은 1910년 영향력있는 잡지 시라카바 白樺를 창간하여 그들의 휴머니즘 사상을 널리 전파했다.
  24. 이용익(李容翊, 1854~1907) - 대한제국기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왕실재정을 확충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는 등 왕실 위주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중심인물이다. 1882(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민영익과의 사이에 비밀연락을 담당하여 그 공로로 감역을 제수받았다. 초기 관직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으나 광산 경영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1887년 광무국이 설치된 이후 함경남도광무감리로 임명되어 그 지역 광산을 관리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무렵 탁지부대신 겸 육군참장으로서 조선의 국외중립을 주장하며 독립을 유지하려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일본이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자 일본은 그가 조선의 식민지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일본으로 압송, 10개월간 감금했다. 1905년 귀국하면서 600여 권의 서적을 사들여 와 번역하게 했으며 신교육에 의한 인재양성을 위해 보성소학교를 비롯하여 보성중학교 및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세계열강에 널리 알리려고 했다. 프랑스와 러시아 등지를 유랑하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으나 1907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발하기 직전 갑자기 죽었다.
  25. 서상륜(徐相崙, 1848~1926) -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로 1884년 황해도 솔내에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설립했다. 또한 새문안교회 설립자 중의 한 사람으로, 성서의 한글번역과 줄기찬 전도활동을 벌였으며 한국 장로교회의 개척자이다. 31세 때 열병에 걸렸을 때 J. 매킨타이어 목사의 도움으로 서양인이 경영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된 뒤 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배웠다. 1879년 이응찬 등과 함께 J.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882년 로스 목사를 도와 중국의 봉천에서 인쇄소를 차리고, 선양에서 '문광서원'이라는 이름으로 2종의 복음서를 간행했다. 그 뒤로는 성서를 지니고 압록강변부터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꾸준한 전도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는데, 1887년 서울에 새문안교회가 세워질 때 설립자 14명 가운데 13명이 그의 전도로 신자가 된 사람들이었다.
  26.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은 민씨정권의 친청수구정책으로 인해 청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개화파는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변을 계획했다. 개화파는 일본의 후원을 업고 188412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군사권·재정권을 장악한 후 정강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청과의 종속관계 청산·문벌폐지·탐관오리 처벌·경찰제도의 실시 등이었다. 그러나 청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하자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정변 실패 후 일본은 공사관이 불타고 거류민이 희생된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청과의 경쟁에서 불리해진 일본은 청과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은 개화파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외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이다.
  27. 독립협회(獨立協會) - 1896년 설립된 사회정치단체.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하던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들은 1896<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이어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이 당시 독립협회는 사교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먼저 청으로부터의 자주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청의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고쳤다.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어 국민 계몽 운동도 전개했는데, 토론회의 주내용은 국민계몽을 위한 주제뿐 아니라 당시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집권 관료층이 이탈해간 반면, 신지식인 계층이 점차 전면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또한 종로광장에서 만민 공동회를 열어 자주 국권과 민권 등을 요구하는 민의를 담은 내용을 정부에 주장했다. 이후 독립협회는 개혁 내각을 수립하고 의회 개설도 추진했으나 고종의 해산 명령으로 189812월 해산했다.
  28.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 대한 제국기, 1905년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29. 박은식(朴殷植, 1859~1925) - 주자학자로서 출발해 개화자강론자·애국계몽사상가ㆍ학자ㆍ언론인ㆍ독립투사로, 민족이 처한 조건의 변동에 따라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발전시키면서 전생애를 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바쳤다. 1904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황성신문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국민들에게 자주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했다. 이후 원로로서 뒤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지원했다. 한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집필을 시작해 192012월 간행했으며, 1924년 임시정부 의정원의 추대로 이승만에 이어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2511167세를 일기로 죽자, 114일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이 치러졌다.
  30.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 - 일본이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가 105명을 체포한 사건.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이라고도 한다. 1910년경 신민회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일본이 이를 막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여 애국계몽운동가들을 탄압함과 동시에 신민회를 제거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암살미수죄에 해당된다고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이에 따라 윤치호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600여 명을 검거했다. 105인 사건에 대한 재판의 최종 판결에서는 윤치호 등 6명에게 징역 5~6년형이 선고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통해 신민회를 해체시키는 등 비밀항일단체를 제거했으나, 이와 연루되었던 많은 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31. 타산지석(他山之石) - 남의 산에 있는 돌이라도 나의 옥을 다듬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 또는 허물과 실패까지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
  32. 치벽하다 - 외진 곳에 치우쳐서 구석지다
  33. 안심입명(安心立命) - 모든 의혹과 번뇌를 버려 마음이 안정되고,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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