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7일 화요일

[범용기 제6권] (6) 한국의 민주운동

[범용기 제6] (6) 한국의 민주운동

- 도미 후 와싱톤에서의 첫 보고 강연 -

 

정상적인 근대 한국의 전통은 자유민주 체제로 통일된 민주국가입니다. 38선의 남북 분단은 꿈에도 생각 못한 우리의 비극입니다.

지금 이북이 공산독재가 된 것도 원통한 일인데 자유민주로 출발한 남한마저 일인 독재로 전락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민족 역사에의 역류입니다.

민주란 것은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란 말인데 사실, 미군정 시대에도 국민주권의 원칙 아래서 제헌국회가 있어 민주독립 국가로서의 준비를 해왔고, “국련감시 하에 총선거에서 국민의 깨끗한 한 표, 한 표가 공명정대한 민주국가의 기반을 오염없이 구축한 것이었습니다.

국민에게, 주권을 행사할 민주 역량이 없다는 말은 악질 정치인들이 조작한 악선전일 뿐입니다. 필자도 그때 부산에서 투표장에 나갔었습니다만, 바로 내 앞에 서있는 아주 초라하게 보이는 늙은 할아버지에게 내가 슬쩍 물어보았습니다. “노인장께서는 어느 분께 표를 던지시렵니까?” 그 노인은 정색하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비밀 투표인 줄 모르시오?”

나는 죄송합니다하고 사과했습니다만, 내 마음은 흐뭇했습니다.

국민은 현명했습니다. 다만 협잡 정치인들이 기만과 간계와 술책과 매수 등등으로 국민의 맑은 거울에 먹칠하는 것뿐입니다. 국민이 현명하다면 그것까지도 못하게 해야 할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총칼 든 사람들에게 포위되면 아무리 현명한 국민이라도 포로가 되는 것이 전쟁풍경이 아닙니까?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Watergate 사건[1]이라는 부정선거 실태가 뒤늦게 드러나 체면유지에 조바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악질 정치인이 자유민주 한국을 새치기하려 한다 해도 결국에는 주권자에게 토벌되고 말 것입니다. 승패는 시기 문제일 뿐입니다.

지금 민주 한국은 군인에게 강점되고 국민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군인은 전쟁을 해야 신이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북의 남침이란 가상 적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면서 전쟁 기분을 돋우고 있습니다.

국민을 가상 적으로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비상사태를 선전하여 위기의식을 조장해야 독재의 필요성이 산출되겠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본국 소식을 보고삼아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미 아시는 내용들일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본국에서 직접 당한 사람의 목격담이라는 데서 용납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금년 12월에, 한국은 비상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미국과 중공이 긴장 완화 상태에 들어가고 베트남에 파견됐던 미군이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조건 아래서 철수하게 됐다는 것 때문에, 무언가 다른 지역에서 강대국들의 불장난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려면 한국이 제일차 후보지가 될 것은 틀림없을 것이란 말이었습니다. 그럴듯한 얘기라고 국민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한국은 월남전쟁 때문에 92600만 달러나 벌었다니까 월남 휴전은 한국경제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은 자신의 독재권 확립에 중심을 두고 그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일 년 후인 19721117은 갑자기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을 선언했습니다. ‘유신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항간의 해설이 구구했습니다. 직접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뜬 것인지, 훨씬 더 원초적인 중국의 周雖舊那文王維新주나라가 오랜 나라긴 하지만 문왕 때에 문물이 새로워졌다는 옛 글에서 따온 것인지 출처가 분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전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국민은 왜 계엄령이냐 하고 대체로 납득 안가는 얼굴들이었습니다.

19721121에는 소위 유신헌법이란 것을 통과시켰습니다. 박정희 독재 체제를 으로 합법화한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전주 남문교회 은명기 목사가 계엄령 아래에서의 국민투표란 있을 수 없다고 반대한 것 때문에 19721213일 투표 전날 계엄령은 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해제 바로 전날 밤에 정보부에서 예배당에 난입하여 기도회 집회중인 은명기 목사를 포고령 위반 혐의로 체포해 갔습니다.

19721227씨는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거행했었습니다.

1973629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제일교회 박형규 목사와 그 밖에 14명이 구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석달 전 부활절 연합예배 때에 학생들이 민주부활의 삐라를 뿌렸다는 것 때문에 박 목사를 정부전복을 목적한 국가 반란죄로 몰아 체포한 것이었습니다.

박형규 목사는 한국 교회의 중견 목사로서 부산 동아대학과 일본신학과 미국 유니온 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목회하는 제일급 지성인이며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분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성질과 구조와 그 보편왕국적인 세계성을 알지 못하는 정보부원들은 그까짓 목사 하나쯤이야!” 하고 마구 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 한 달 반쯤 되는 197388에는 일본에 들린 김대중 씨를 역시 정보부에서 납치해 갔습니다. 박형규 목사는 으례 무죄로 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739252년 징역, 3년 집행유예로 판결되었습니다. 후에 보석은 되었습니다만, 요새 또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973102에는 서울 문리대생 수백 명이 정보부의 민간사찰 중지, 경제 대일예속 배격 등을 내걸고 데모를 시작하다가 현장에서 전부 검거되었습니다.

1973115에 사회 각계 인사를 망라한 15인의 연명으로 민주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장소를 얻을 수가 없어서 종로 YMCA 일층 스낵빠에 오전 11시에 모두 차 마시러 모여서 거기서 약 10분 동안에 다 해치웠습니다. 천관우[2] 씨가 사회하고 내가 선언서를 낭독하고 함석헌 선생이 취지연설을 하고 지학순[3] 주교가 종교인 대표로 연설하고 만세 3창 그리고 헤어지는 순서였습니다. 장소를 빌려준 YMCA에서도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정보부 만능 하에 있었기에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 당국에서도 의외로 질린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10분 후인 만세3창 때에는 종로 경찰서 무장 기동대가 트럭 두 대를 끌고 YMCA에 달려와서 선언서를 압수하고 우리 모두를 연행했습니다. 경찰서에서 남산 정보부에까지 갔다가 그날 밤 11시에 놓여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화점이 되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19731110일쯤부터는 한국신학대학생, 연세대생, 이화여대생 등을 위시하여 경향 각지 관, , 사립을 막론하고 두달 동안 거의 매일 학원 민주화와 일본 재침략 반대 등을 구호로 한 데모가 계속되었습니다. 현대적으로 무장한 데모 분쇄 특별 부대가 학교 문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거리에까지 나오지는 못했습니다만, 그 항거는 끈덕진 것이었습니다.

731114에 전주 은명기 목사가 다시 유죄로 판결되었기에 그가 속해있는 전북노회에서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끝까지 은명기 목사 편에서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을 다짐했습니다.

19731117 날짜로 N.Y.지구 한인유지 교직자 일동이 민주수호 성명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일본 교포들의 지지성명도 속속 알려졌습니다.

19731120에는 가톨릭교회 청년 연합 예배 후에 5명이 연행되고 그 다음날에 또 4명이 잡혀 갔습니다. 25일간 구류되었다가 나왔습니다. 구속되었던 수십 명 서울 대학생들과 다른 대학생 몇 명도 25일간 구류 후에 나왔습니다.

19731122에 가톨릭 청년 일동이 정보부의 교회 사찰 중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19731125에 독일에 있는 한국기독자 유지 일동이 15인 민주선언 지지성명을 냈다는 것을 후에 알고 격려되었습니다.

19731128에는 이대생 3천명이 방과 후에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같이 꾸미고 시청 앞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가 약속한 시간에 갑자기 거리에 나서 대열을 이루어 데모한 일이 있습니다.

19731128에는 KSCF “기독학생연합회연합기도회가 새문안교회에서 모였는데 김찬국 교수의 구약 예언자 강의를 듣고 헤어질 때, 38명이 횃불 데모로 광화문까지 나오다가 경찰에 저지되고 18명이 연행되었습니다.

같은 날에 KSCF의 기도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이튿날인 19731129일에는 감리교 신학교 학생들이 찬송행진을 하다가 제지되었습니다.

19731130에는 중앙일보 기자 주동으로 민주언론 자유를 위한 기자들의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문학인들의 자유민주 선언도 발표되었습니다.

1973123에는 감리교 도시 산업선교 성직자들의, 근로자 생활태 현상 보고와 근로자 권익보호를 위한 주장과 그들의 행동강령 및 결의문이 발표되었습니다.

1973125에는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알선으로 정계, 학계, 교계 등 각계의 원로 회의가 YWCA 알로하실에서 열렸습니다.

출석자는 백낙준, 윤보선[4], 이인[5], 김홍일[6], 유진오[7], 함석헌, 이희승[8], 김정기, 김수환 추기경, 이병린[9] 변호사, 한경직[10] 등이었습니다. 한경직은 도중에 나가고, 좌장은 백낙준[11]이 호청되었습니다. 이 원로들은 시국간담회에서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고치라는 건의서를 내고 씨와의 면담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건의서 작성위원으로는 천관우, 유진오, 김재준 3인이 위촉되었고 면담위원으로는 백낙준, 김수한, 유진오, 함석헌, 이인의 5인이 선정되었습니다. 건의서 제출이 가결되기까지 여러 가지 의견이 토의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헌법 자체를 무시하고 드는 무법자인데 민주헌법이니 뭐니하고 건의할 따위가 있느냐? 그 사람 자체가 처치되는 것만이 유일한 대책일 것이다하는 얘기도 나와서 다들 사실은 그렇다고 동감을 표시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의 정당성에서 사는 민주질서를 밟아야 한다는 것으로 낙착되었습니다.

19731210에 우리는 원로 회의에서 합의된 대로 건의문을 작성하여 신중 검토하고 면담 신청서와 함께 대통령 비서실장을 통하여 직접 대통령에게 전달했습니다.

확실히 비서실장에게 접수되고 신문에 기사로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7418에 갑작스레 소위 긴급조치령이 선포되어 민주 활동은 전적으로 매몰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화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아마도 우리 건의에 대한 대답인 것 같다 하고 쓴 웃음을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19731216에 열린 가톨릭ㆍ프로테스탄트 연합예배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자유민주의 회복을 역설했습니다. 예배에 출석했던 가톨릭 학생 200명이 가두 데모에 나섰다가 연행되었습니다.

19731216-22까지 프로테스탄트 젊은 성직자 28인이 한 고장에 모여 단식 기도회를 계속했습니다.

6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안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1216일 단식을 시작하는 날에 제1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정부의 비민주적 강압정책을 중지할 것과 일본에의 경제예속, 공해산업 수입, 한일각료회의 중지 등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19711216일 이전 체제로 환원할 것과 한국 부유층의 서민생활화, 국민생활의 검소, 내핍, 절제 등을 호소했습니다.

2선언에서는 자신들의 참회를 고백하면서 악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를 바랐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고백했습니다.

3선언에서는 그들의 민주 확신과 결의를 표명했습니다.

22일 폐회하는 날 정오에 발표한 제4선언에서는 인간 존엄과 민주건설에서 십자가를 질 결의를 말하고 다가오는 성탄을 승리와 용기, 수난과 위로로 맞이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 이틀 후인 19731224에 장준하 씨 주도 아래서 100만인 개헌 청원 서명운동이 시작되어 요원의 불과 같이 퍼졌습니다. 그대로 나간다면 한 달 안에 100만을 훨씬 넘을 것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화당의 원로요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정구영[12] 옹이 공화당을 탈당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전국적인 항쟁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폭발이 눈앞에 다가온 것 같은 정세였습니다. 박 정권도 그런 것을 느낀 것 같았습니다.

19731226에 김종필 국무총리는 90분간에 걸친 T.V.연설을 방송했습니다. 개헌서명 운동은 체제변혁 운동이기 때문에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것과 그 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민주운동 인사들은 일소에 부쳤습니다. 모든 국가악과 사회악이 현 체제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현 체제를 건드리지 않고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 정부 수반 자신의 권력구조를 절대화하고 국민은 복종만 하라는 것이 시종일관된 고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진영에서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31229에 한국기독교 학생회 총연맹(KSCF) 총회에서 기독학생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선언에서 자유민주제 건설, 반일구국, 서민권리 옹호, 언론 학원 종교의 자유, 마침내 197418긴급조치령이라는 것이 선포되어 전적인 탄압정책이 실시되었습니다.

197419부터 학생들은 연금되고 민주적 저명 인사들은 대부분 자택에 감금되었습니다.

1974110에는 KSCF 사무실이 수사되어 문서류와 자료가 압수되었습니다. N.C.C. 김관석[13] 총무와 제일교회 박형규[14] 목사, 그리고 오충일, 조승혁, 김상근, 김정렬[15] 등 젊은 교직자들이 24시간 감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1974115에 장준하 씨와 백기완 씨가 검거되어 15년과 10년 징역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10인의 젊은 목사들이 N.C.C. 사무실에서 하느님의 뜻과 한국의 현실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의 신앙고백을 발표했습니다.

개헌 자유 토의와 민주질서 회복은 한국의 현실에서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신앙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일 후인 1974121에 이 젊은 목사들은 정보부에 연행되었습니다.

197425에는 문인들 중에서 5명이 구속되었는데 이호철[16] 등 작가 2명과 이헌구 등 평론가 3명이었습니다. 그들을 반공법에 걸어 스파이 혐의로 다루려 했었다고 들었습니다.

1974266명의 목사가 모여 긴급조치령 철회를 공적으로 요구했는데 그 중 김경낙 등 2인은 10년 징역, 4인은 석방되었습니다.

이들이 군사재판을 받을 때 그 추운 바깥에서 80명의 기독교인이 옥외연좌를 했습니다.

수일 전에 들은 대로는 내가 본국을 떠나던 312일은 옛날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방위사령부 군인들로 서울거리는 살벌 그것이고 물가는 양등하고 민심은 극한을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그래도 국민의 뜻이라면……하고 맨발로 청와대를 나오는 극적인 결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 그에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습니다만, 사실 보고 만으로 벌써 시간은 훨씬 넘었습니다. 한국에서 학생과 교계 인사들이 어떻게 자유 한국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좀더 여실하게 전달해 드릴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흔히 듣는 말로서는 국내에서 일어나야 국외에서도 힘을 낼 것이 아니냐? 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린 것만으로도 국내가 게으르고 무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 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박정희 씨는 걸핏하면 15년 징역을 선고하는데 15년이란 숫자가 어떻게 산출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씨가 50대를 넘은 나이니까 15년이면 65세에서 70세에 가까운 연령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평생 대통령으로 정착할 심산일지 모르겠습니다.

10년이고 15년이고 간에 독재정권이 계속되는 한, 자유민주 운동은 계속할 것입니다. 15년이고 30년이고 자유가 올 때까지 자유의 깃발은 내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우리가 당장 해외에서 할 일은

[1] 사신(Message) 교류(Communication)

[2] 격려(Encouragement)

[3] 지지(Support 지지성명 발표)

[4] 협동(Cooperation)

[5] 동참(Participation)입니다.

 

197458() 와싱톤 강연

Catholic 대학 간호학교 강당에서

 

[각주]

  1. 19726월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닉슨 대통령의 측근이 닉슨의 재선을 위하여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 장치를 하려 했던 사건. 이 사건으로 197488일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2. 천관우(千寬宇, 1925~1991) - 호는 후석(後石). 충북 제천 출생. 1937년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며, 1944년 경성제대 예와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학부에 진입하면서 한국사를 전공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 1951년 대한통신 기자로 일하면서 언론계에 투신하였다. 1952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대학 신문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54년부터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을 거쳐 1968신동아필화사건으로 그만두기까지 언론계의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 뒤 3선개헌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가 가시화됨에 따라 반독재ㆍ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 유신체제 속에서는 감시와 탄압이 심해서 칩거하며 한국사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관직을 맡게 되면서 변절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3. 지학순(池學淳, 1921~1993) - 세례명은 다니엘(Daniel). 평안남도 중화 출생. 1934년 중화공립보통학교 재학중에 중화본당 신부 콜먼(Coleman)에게서 영세하였고, 이듬해 동성상업학교 을조(乙組, 小神學校)에 입학하였다. 1940년 병으로 중퇴한 뒤, 1943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로 편입하였다. 1949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덕원신학교가 폐쇄되자 월남을 시도했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그해 말 동료 윤공희(尹恭熙)와 함께 월남에 성공, 다시 성신대학으로 편입하였다. 625 전쟁 때 자원 입대하였다가 부상으로 제대하였고, 1952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56년 로마 프로파간다 대학에 유학, 교회법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9년 귀국하였다. 1962년 부산 초장동본당 주임을 거쳐 1965년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고, 6월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1972년 교구 내에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설치하여 재해민 구제에 힘쓰는 한편, 한국의 사회ㆍ정의ㆍ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하여 1974년 내란선동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5,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가 이듬해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교회 안팎으로 큰 영향을 주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 사제단이 결성되는 데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9859월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에서 휴전 후 최초로 공식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였다.
  4. 윤보선(尹潽善, 1897~1990) - 호는 해위((海葦). 충남 아산에서 윤치소(안동교회 장로)와 이범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촌형으로는 윤치호가 있다. 191518세 때 민영환의 6촌이었던 민영철의 달과 결혼하였고, 1917년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을 만난다(신규식이 윤보선에게 바다갈대라는 의미의 해위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미래 지도자의 양성 차원에서 신규식, 신익희 등의 권유로 1921년 영국으로 건너가 우드부룩 칼리지, 옥스퍼드대학, 에든버러 대학 등에서 공부하였다. 해방 이후 한민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민중일보를 인수해 사장이 되었고, 이승만을 적극 도왔다. 정부 수립 이후에 제2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었을 때, 여성신학자 공덕귀와 재혼하였다. 1952부산정치파동때 이승만과 결별하여 야당으로 활동하게 된다. 1960419 혁명 이후에 민주당의 구파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던 윤보선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신파인 장면을 총리로 지명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와 대결한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15만여표 차이로 패배하였고, 그 이후 본격적인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1967, 6대 재통령 선거에서 다시 박정희와 맞붙었지만 115만여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1980서울의 봄때 윤보선은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의 단일화를 주선하였으나 실패하고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1980년 이후 제5공화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고, 1987년에 노태우 후보를 지지해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5. 이인(李仁, 1896~1979) - 호는 애산(愛山). 일제강점기 의열단 사건, 광주학생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안창호 사건 등을 맡은 법조인. 초대 법무장관이 되었으나 이승만과 뜻이 맞지 않자 물러났다.
  6. 김홍일(金弘壹, 1898~1980) - 본관은 김해(金海). 초명은 홍일(弘日), 호는 일서(逸曙). 별명은 최세평(崔世平), 중국식 이름은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부고(王復高). 평안북도 용천 출신. 중국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를 졸업한 이후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고, 중국군의 요직을 거치기도 했다. 김구의 요청으로 송식표(宋式驫)와 함께 1932년 이봉창(李奉昌)18 일왕저격 및 윤봉길(尹奉吉)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하였다. 19456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중국 동북보안사령장관부(東北保安司令長官部) 고급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에 취임하여 광복 당시 만주 일대에 거류하는 한국인 동포의 보호와 본국송환에 진력하였고, 1946년 말에는 미중앙정보단(CIG)의 비밀 업무를 지원하기도 했다. 19475월 중국 국방부ㆍ정치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8월 귀국하였다. 해방 후 귀국해서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맡아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정치가로도 활동했다. 1961516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고문과 군정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1965년 한일협정을 적극 반대, 박정희(朴正熙)와 결별하고, 1967년 정계에 투신하여 제7대 국회의원이 된 뒤,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의장을 거쳐, 1971년 유진산(柳珍山)이 한때 물러난 뒤에 당수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 해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고, 당내로는 김대중(金大中)과 제휴하여 1971년 신민당 당수가 되었으나, 당내 양파가 각각 전당대회를 열어 12당수의 내분을 겪은 뒤, 19729월 당수직을 사임하였다. 박정희의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만년에는 광복회 회장을 맡았다. 1980년에 82세로 사망하였다.
  7. 유진오(兪鎭午, 1906~1987) - 호는 현민(玄民).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 1926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3년부터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 1937년에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 친일활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문인의 길을 접고, 교육자, 법학자,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으로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1953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 1966년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는데, 19671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에서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으며, 7대 국회의원에 종로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8. 이희승(李熙昇, 1896~1989) - 해방 이후 국어학개설 , 새고등문법, 국어대사전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국문학자.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일석(一石). 경기도 광주 출생. 1903년부터 5년간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908년 이정옥(李貞玉)과 혼인한 다음 곧 상경하여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에 입학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로 이 학교가 폐교되어 3년만에 졸업하였다.이어 19119월까지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고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1914년 사립 신풍학교(新豊學校) 교원으로 취임하고, 한편으로 1915년 사립 중동학교 야간부에 다녔으며, 이어 1918년 사립 중앙학교 4년을 졸업하였다. 1919년부터 4년 반 동안 경성방직주식회사에 근무하다가 1923년 전문학교 입학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192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졸업하고 이어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한 다음,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및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조선어학회에 입회하여 간사(이사)와 간사장(대표간사) 등을 역임하면서 이 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 완성)표준어사정(標準語査定)’(1937년 완성)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1930년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직에 취임하여 국어학 및 국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10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1945817일까지 3년 동안 복역하였다. 광복 후 194512월 새로 개교한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에 취임하고, 19461022일의 학제개편으로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어 국어학연구의 선구자로서 후진 국어학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2년 서울대학교대학원 부원장,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 등을 역임하고, 1960425315 부정선거 규탄 대학교수단 데모에서는 앞장을 섰다. 1961930일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함과 동시에 서울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3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에 피선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에 피임되었으며, 19638월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2년 동안 군사정권 아래에서의 언론창달에 진력하였다. 19659월 대구대학 대학원장에 피임되어 학계에 복귀한 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71년부터 1981년까지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국학 및 동양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7년 학술원공로상, 1960년 서울특별시교육공로상,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1978년 인촌문화상, 198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9. 이병린(李丙璘, 1911~1986) - 호는 심당(心堂). 경기도 양평 출생.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서울매동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재직하다가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190년에 경찰조직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315 부정선거 후에 일어난 마산소요사태의 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정희 정권 때 3선개헌 반대, 유신헌법철폐를 위해 활동하였다. 1970년 군사정권을 비판한 당시 <오적> 필화사건의 시인 김지하와 윤보선 전 대통령과 강신옥 변호사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등에서 변론을 맡았다.
  10. 한경직(韓景職, 1902-2000) - 장로교 목사, 교육가, 육영사업가. 19021229() 평남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한도풍의 장남으로 출생. 1912년 향리의 자작교회에서 설립한 진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과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는데, 어린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는 6촌간이며 초기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이었던 한병직 목사, 진광학교 교사인 홍기두 선생(평양 대성학교 출신), 교회 전도사 우용진 등이 있었다. 1914년 진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김찬빈(1899-1974)과 결혼하였다. 1917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승훈, 조만식 등에게서 민족주의적 교육을 받았으며 1922년 숭실대학에 진학하여 자연과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숭실대학 재학중 블레어(W. Blair, 邦偉良) 선교사의 비서로 일하면서 공부하였는데 1924년 여름 블레어와 함께 황해도 구미포 해변가에 갔다가 목회자로 헌신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블레어와 윤치호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캔자스주에 있는 엠포리아대학에서 1년간 인문과학을 수학하였다. 1926년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신학교로 진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았는데 그가 프린스턴에 갔을 때 박형룡, 최윤관, 백낙준이 졸업하였고 그는 최윤관, 김성락, 보켈(H. Voelkel), 윤하영, 이규옹, 김재준, 송창근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는 프린스턴 재학중 신학노선의 차이로 신학교가 분열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1929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계속하려 했으나 폐결핵이 발병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뉴멕시코주의 알버커크 요양소에서 2년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그후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다시 6개월간 요양한 후 1932년 귀국했다. 귀국직후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 교사로 부임했으며 숭실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고 이듬해 의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5년 건평 3602층 벽돌건물로 교회당을 건축하였으며 1939년에는 백지엽, 김응락 등의 도움을 얻어 보린원을 개설하여 고아들을 수용하였고 후에는 양로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인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미국에 유학하였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교회에서 추방당하였으며 이후 해방되기가지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았다. 해방이 되자 그는 윤하영, 이유필 등과 함께 평북지역 치안책임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459월에는 윤하영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월남직후 미군정청 통역으로 있으면서 김재준, 송창근 등이 하는 조선신학교에 나가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서울 영락동에 있던 천리교 경성분소 건물을 접수하여 1945122일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서울 영락교회가 되었다(194611월에 교회명칭을 바꾸었다). 1954년 숭실대학장에 취임하여 3년간 봉직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KNCC) 회장에 선임되어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였다. 197312일 그는 박조준 목사를 후임자로 세우고 은퇴하면서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976년에는 고당 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를 조직, 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82년에는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을 지휘하고 있다. 1948년 미국 엠포리아 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를, 1958년 연세대학교에서 역시 명예신학박사를, 1977년 숭전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으며 1970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48년 조선신학교의 김재준에 대한 신학논쟁이 전개되었을 때 그는 총회석상에서 개혁자의 부르짖은 자유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3대 자유인데 나와 해석이 다르다 하여 그를 처단하는 것은 삼가야 할 줄 안다고 하여 김재준에 대한 총회의 처단을 반대하면서도 결국 행동으로는 그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경직 목사의 신앙노선은 김재준은 그것보다 온건하고 중도적이었기 때문이다.
  11. 백낙준(白樂濬, 1895~1985) - 1985년 평북 정주군 관주면 출생으로, 장로교 목사이며 역사학자로 호는 용재(庸齋)이다. 1913년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신성학교 교장인 매큔(G. S. McCune)의 도움으로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19169). 매큔의 모교인 미주리 주 파아크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하고(19226),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에 들어가 19259월 졸업하였다. 바로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대학원에 입학해 종교사학을 전공하여 1927조선개신교사로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 교장, 연희대 총장, 연세대 총장,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문교부장관에 취임 후 교육행정가로 활동하였다. 1960419 의거 이후 참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8월 초대 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69월 민중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고사하였고,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 양당의 합당추진을 지지하면서도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19802월 국정자문회의 위원, 19832월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5113일 사망하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2. 정구영(鄭求瑛, 1899~1978) - 호은 청남(淸嵐). 충북 옥천 출신.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 1911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상과, 1919년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판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한 후 검사를 거쳐 1925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자유당 정권에서 반정부적인 재야법조인으로 활동하였는데, 이승만 정부의 보복이 두려워 변론을 기피하던 서민호 사건을 맡아 변호하기도 하였다. 1960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신 시민에 대한 경찰의 발포에 대해서 대통령 하야와 재선거촉구성명을 발표하였다. 1961516 쿠데타 이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박정희가 3선개헌을 추진하자 반대하였고 유신헌법까지 등장하자 1974년 민주공화당을 탈당하였다. 월남파병도 소신껏 반대했다고 한다.
  13. 김관석(金觀錫, 1922~2002) - 함경남도 함흥 출생. 함흥제이보통학교를 거쳐 능인학원이라는 불교 사찰의 부속 학원에서 불교의 교리와 염불 암송하는 법을 배웠다. 이후 캐나다 선교부가 운영하는 함흥영생중학교(교장 김관식 목사)에서 수학하였다. 세례를 받고 신학 공부를 결심하고 김형숙 목사의 추천으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중앙신학교에 응시하였으나, 목회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낙방하였고 1년 후 도쿄에 있는 일본신학교에 진학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해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해방 후에 귀국하였다. 함흥남부교회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 월남하였다. 1947년 조선신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한 후 송창근 박사의 권유로 조선신학교 여자신학부를 맡아 육성하였다. 1948년 승동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동경에서 함께 공부하던 유관우, 장하구,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지동식, 전경연, 전택부, 박봉랑, 한철하 등과 함께 복음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김재준, 박봉랑, 김정준, 정대위 목사와 함께 조선신학교 재건에 힘썼다. 그때 기독교서회 총무인 김춘배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서회에서 일했으며 미국 시라큐스 대학,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1966). 196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1968~1980)로 선출되면서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기독교방송 사장(1980~1989), 새누리신문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4. 박형규(朴炯圭, 1923~2016) - 경남 창원시 마산 출생. 1950년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중퇴하고 1950~58년 미 육군에서 근무했다. 그후 목사가 되기로 결심해 1959년 일본 도쿄(東京)신학대학원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1963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이후 공덕교회와 초동교회에서 목회 사역했다. 1967년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지냈으며, 1968년 기독교서회 발행 <기독교사상> 주간, 1970년 기독교방송 상무이사를 지냈다. 1972년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19928월까지 20년간 시무했다. 1981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66회 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실천하여 1973년 반유신체제 시위인 남산부활절사건’, 1974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기독교장로회 청년 전주시위사건등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등 평생 여섯 차례 옥고를 치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2002~2005)과 남북평화재단 이사장(2007~2011)을 역임하였다.
  15. 김정렬(金貞烈, 1917~1992) - 서울 출생. 1935년 경성공립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 항공과를 졸업(1941)하고 태평양 전쟁에 참가하였다. 해방 이후 초대 공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7년 국방부장관이 되었다가 419 혁명으로 물러났다(419 당시에 미국과 이승만 대통령의 협상을 중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1963년 민주공화당 초대의 장이 되었고, 주미대사로 임명되어 월남파병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국무총리도 역임하였다.
  16. 이호철(李浩哲, 1932~2016) - 원산시 출신의 소설가. 분단 문학의 거장이며, 본인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남과 북, 전쟁과 분단에 대한 소설을 주로 썼다. 박정희 정권 때 민주화 운동에도 투신하여 고은 시인과 자유실천문인협회를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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