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01) 조선신학원 발족 - 조선신학원 발족

조선신학원 발족

 

수일 지내고 곧 서울에 돌아온 나는 개강준비에 분주했다. 원장으로는 김대현 장로님을 모시기로 했다.

교수진을 짜야 할텐데 해외유학까지 한 분은 통틀어 한두 사람 밖에 없었다. 동래의 윤인구[1]가 일본신학을 나오고 호주에 유학하고 프린스톤, 에딘버러 등에서 잠시 청강하고 돌아와 호주선교부 경영의 복음농민학교를 맡고 있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조희염[2] 씨가 조선신학 기성회 때부터 열심당이었지만 그 동안에 원산에 자리잡고 말았다. 송창근은 흥사단 사건에 걸려 아직도 보석 중이다. 한경직은 일제(日帝)의 설교 금지로 신의주 제2교회에서 퇴진하여 고아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사상불온이란 이유로 못하게 되어 실업상태에 있었다. 우리는 그를 초빙했다. 그가 서울까지 오기는 했으나 한사코 교수 초빙은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윤인구 밖에 없었다. 나는 그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는 응락하고 상경했다. 그래서 함께 학칙, 커리큘럼, 강사물색, 개강식 날짜와 절차, 김대현 장로님 찬하회 준비 등등 일체를 대강 의논했다. 그리고서 그는 잔무정리와 가족 이사를 위해 일시 귀향했다.

그 동안에 나는 서울서 할 일들을 진행시켰다.

 

학원 장소로는 승동예배당 하층을 쓰기로 했다. 학칙을 기초했고 커리큘럼도 어느 신학교 못지않게 충실을 기했다.

책상 의자 등도 사 들였다. 제일 큰 책상에 회전의자를 붙여 윤인구 자리를 만들고 내 앞에는 작은 책상에 보통 의자를 놓았다. 그리고 시간 강사들을 위한 긴 책상과 의자들도 준비했다.

설립자겸 원장은 김대현 장로님이고, 이사장에는 함태영[3] 목사님, 그리고 모모한 분들이 이사였다.

교수로는 윤인구, 김재준. 강사로는 신약에 전필순, 이정로[4], 그리고 음악에 현제명[5], 웅변(speech expression)에는 웅변술로 이름난 김창제[6], 종교철학에 갈홍기[7] 박사, 일본어와 일본사상에 당시 약초정 일본교회 목사 야마구찌(山口) 씨 등등이었다.

 

개원식

 

개강식과 김대현 장로 원장 취임식, 그리고 그에 대한 찬하회 등등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경기 노회원들과 타교파 명사들이 승동교회당에 운집(雲集)했다.

김 장로님의 취임사는 간단했다. 나는 처음부터 크게 당당하게 시작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실, 지금까지 내 하는 일은 다 그러하였다. 조선신학교도 어렵고 작고 눌린 데서 탄생한 것이 오히려 자랑이다. 이소성대(以小成大)가 내 평생의 좌우명이다. 나는 지금의 미미한 조선신학원이 꾸준하게 자라서 전세계에서 가장 제일 훌륭하고 유명한 신학교가 될 것을 확신한다. …』 하셨다. 일종의 예언이었다고 나는 지금 회상한다.

 

진영과 학생

 

윤인구가 원장 실무를 보았고 그 밖의 일은 내가 모두 맡았다. 학감일, 교무주임 일에서부터 서무, 재무, 회계, 소사 - 만사도감이다. 그리고 교수 시간도 제일 많았다. 구약은 물론이고 교수 시간도 신약, 교회사, 실천신학, 닥치는 대로 메꾸어갔다.

학생들은 열심이었고 모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졸업연한은 3

교수 용어는 조선어

대략 이런 내용과 진용이었다.

 

모여온 학생들은 백 명 이상이었다. 평양이나 다른 신학교에서 이삼년 공부한 사람은 3학년에 그 나머지는 모두 2학년에 넣었다. 학생의 대부분은 장년들이었고 사오십대, 이십대 청년들도 얼마 있었고, 사오십대 장로님인 충북의 김영주, 이창재 등도 충실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칠십대도 한 분 계셨다. 시인 임인수(林仁洙)[8]도 끼어 있었다. 그는 그때 벌써 동아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시로 당선되어 있었고 신학생으로는 최연소자였다.

일제(日帝)의 의용군 모집에 반대하여 몰래 전국을 유세하다가 잡혀 6개월 징역하고 나온 경기도 파주군의 박학수(朴學洙)[9] 군과 그의 친구 이춘우[10] 군도 학생으로 등록했다.

승동교회 담장밑, 회랑(回廊)[11]을 기숙사로 썼다.


[각주]

  1. 윤인구(尹仁駒, 1903~1986) - 해방 이후 부산사범학교 초대 교장, 부산대학교 초대 총장, 연세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종교인. 1926년 메이지학원 신학부를 거쳐 1931년 영국 에딘버러 대학원 수료. 1941년 조선신학원 개설하교 교장이 되었으나 일제 탄압으로 사임. 해방 이후 미군정하 경상남도 내무국 학무과장으로 부임, 부산대학을 개교시키고 1953년 부산대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초대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1961년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 조희염(曺喜炎, 1885~1950) - 장로교 목사, 신학자, 순교자. 1885220일 함남 함흥에서 출생.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20대에 캐나다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울의 경신중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14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고 이후 캐나다의 할리팍스신학교 및 토론토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캐나다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으며 미국 유학시절에는 한국 유학생 총회장 및 동양 유학생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시카고 대학 내에 동양 출신 유학생을 위한 복지시설인 인터내셔날하우스를 설립하기도 했다. 1930년 귀국하는 길에 유럽 및 러시아를 시찰하였고 귀국하여 <동아일보>노농노국별견기북구별건기로 연재하기도 했다. 귀국 즉기 함흥 YMCA 총무로 선임되어 농촌 및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수차에 걸친 기독교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캐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에서 교수하였으며 일제말기 선교사 추방과 함께 학교가 폐쇄되면서 일본 헌병대에 구속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송창근, 김재준 등이 서울에서 설립한 조선신학원 이사로도 한때 참여하였으며 간접적으로 교회를 돕고 있었다. 해방후 원산시장으로 추대되었다가 공산당 치하에서 일할 수 없어 사임하고 원산 남부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하는 한편 평양의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에 소속되어 민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625사변이 일어나고 그해 10월초 유엔군이 원산에 진주하던 109일 공산군에게 끌려가 원산형무소에서 총살당하였다. 이때 같이 체포되어 총살현장에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준명 목사가 그의 순교 사실을 전하였다.
  3. 함태영(咸台永, 1873~1964) -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법조인, 정치인. 호는 송암(松岩). 19731211일 함북 무산에서 함우택의 아들로 출생.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고 11세 때 서울로 이주하였으며 1895년 한국 법관양성소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가 판사로 있을 때 독립협회사건이 일어났고 그는 사형이 언도된 이승만의 형량을 7년으로 감등시켰으며 이상재를 엄벌하라는 법무대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죄석방시키기도 하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동기는 그의 부친이 먼저 교인이 되어 연동교회에 열심히 출석한 데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1908년 복부내종으로 사경을 헤매던 중에 기도로 치료를 받고 그도 철저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듬해 부친은 연동교회 당회장 게일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이원긍, 오경선 등 양반교인들이 따로 묘동교회로 분립하여 나갈 때(1909) 함께 나갔다. 그러나 함태영은 계속 연동교회에 남아 집사가 되었고 1911년에는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1915년 경충노회 추천을 받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8년 조사로 임명되어 남대문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는데 당시 남대문교회 교인이던 이용설, 이갑성 등과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는 이들과 이듬해 31운동 기독교측의 추진세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언급되는데, 사실상 31운동에 있어서 그의 활약이 없이는 기독교 각교파간의 연합 및 기독교, 천도교, 불교와의 제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9209월 경성복심법원은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이인환, 한용운 등과 함께 관련자들 중 최고형인 징역 3년형을 언도했다. 19211222일 최린,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김창준, 한용운 등과 함께 가석방되어 풀려났다. 이후 신학을 계속하여 1922년 졸업하였고 그해 12월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3년 장로회 총회장에 피선되었고 1926년 충청노회장을 역임했다. 1926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박승명 목사 사건으로 분규가 일어나 총회에까지 문제가 상정되어 그는 조사위원의 한사람으로 마산에 내려가 분규사건을 수습하였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2712월 문창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경남노회장을 역임했으며 문창교회 문제를 수습한 후 192910월 연동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연동교회 역시 노년층과 청년층 교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교회 분규에 휩싸이던 터에 그가 부임하여 내분을 종식시키며 교회를 발전시켰다. 1929년 경기노회장, 1932년 경성노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에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34년 박용희, 권영식, 전필순, 최석주 등 중부지역 기독교지도자들과 함께 YMCA 신흥우가 주도한 적극신앙단에 가입, 이를 통한 민족운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서북계 교회지도자들과의 마찰을 일으켰고 이에 선교사 및 서북계인사들에 의해 지휘받고 있는 총회와 경성노회에 반발하여 경중노회를 따로 분립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결국 1937년 양측의 화해로 경중노회는 자진 해산되었지만 그 사이에 경성노회에서 파송한 강병주 목사가 연동교회 당회장으로 부임하고 교회 교인들의 의견이 나뉘는 등 적잖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같은그의 반선교사적 주체의식은 19393월 김대현, 김영주, 송창근, 채필근 등과 손을 잡아 조선신학원(후의 한국신학대학) 설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1940년 조선신학원이 개교되었고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여 순수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신학교 운영의 책임을 맡게되었다. 1941년 그는 전필순을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선정하고 자신은 일선에서 은퇴,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전쟁말기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피해 경기도 광주군에 내려가 은둔하며 둔전교회를 돌봤다.
    해방후 다시 교계에 복귀하여 1946년 조선기독교남부대회 부회장에 피선되었고 1947년 남부총회 부총회장이 되었으며 조선신학교 이사장, 기독교흥국형제단 총재, 기독공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밖에 일반 사회활동으로는 민의원을 거쳐 1949년 제2대 심계원(현 감사원의 전신) 원장에 취임하여 건국 초기 사회기강을 잡는데 헌신하였다. 625사변 중인 1951년 부산에서 피난중인 조선신학교 5대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8월 정ㆍ부통령선거에서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부통령으로 재임하는 기간 중 한국신학대학(1951년에 개명) 학장직은 계속 보유하고 있었으며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교수의 신학적 입장이 총회에 문제가 되어 결국 1954년 장로교 분열에까지 발전하였는데 한국신학대학 교수와 이들을 지지하는 교회는 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를 형성하게 되었다. 부통령 임기가 끝나는 1956년 그는 이 대한기독교장로회(후의 한국기독교장로회) 41회 총회장에 피선되었으며 그해 캐나다연합교회의 초청을 받아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에 참석한 후 구미 각국을 순방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공로국민장을 받았고, 1963년에는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4. 이정로(李鼎魯, 1884~1962) - 장로교 목사, 교육가. 충남 홍성에서 출생. 1808년 보성전문학교 법률과에 입학하여 1922년 졸업하였고 1917년 일본 토오쿄오신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양평읍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으며 1923년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8년 피어선성경학교 원감이 되었다. 1938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이듬해 3월 서울에서 채필근, 김영주, 차재명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한국인에 의한 신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는데 그해 4월 정식 개교될 때 이정로는 교수로 참여하게 되었다. 1940년 왕십리 교회로 임지를 옮겼으며 1953년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949년 장로회신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이외에 세브란스병원 원목, 경성노회 노회장, 경기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621231일 별세하였으며 부인(채광덕)과의 사이에 21녀가 있다.
  5. 현제명(玄濟明, 1903~1960) - 기독교인 은막가, 교육가, 호는 현석(玄石). 1902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거쳐 1920년 계성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24년 숭실대학교를 졸업(15)하였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숭실에 재학하는 동안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숭실교수로 부임한 박윤근에게서 체계적인 음악지도를 받았는데 이때 동창들로는 박태준, 김세형, 김형준, 박경호, 차재일, 위혜진 등 훗날 한국 음악계를 이끌어갈 인재들이 많았다.
    숭실대학을 졸업한 그해 전주의 신흥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으며 1926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 양신선과 결혼하였다. 1927년 미국인 실업가 히버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의 길이 열려 도미, 무디성경학원을 거쳐 시카고의 건(Gunn) 음악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9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받아 귀국하였고 연희전문 음악부장에 취임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외에 1929년 서울 YMCA 안에 혼성합창단을 창설하여 지도하였으며 박경호와 함께 중앙향우회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직접 연주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해방후 경성음악학원을 서울음악학원으로 개칭하고 그 교장으로 봉직하였는데 이것이 1946년 경성음악전문학교가 되었고 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흡수되었다. 194510월에 한국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였다. 19601016일 별세하였고 1965년 대통령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있다.
  6. 김창제(金昶濟, 1877~1947) - 기독교인 교육가, 청년지도자. 충남보령의 선비 가문에서 출생. 신학문에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황성기독교청년회 초창기 회원으로서 기독교에 입교했다. 1909년 서울 안동장로교회가 창설될 때 그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그뒤 그는 기독교 청년회 학관의 국어ㆍ역사 교사로 재직했고, 1910년부터 해마다 기독학생 하령회(夏令會; summer conference)가 열릴 때에는 언제나 강연과 기도회를 주관했다. 1915년경, 관북 최초의 신교육기관인 함북 경성 함일(咸一)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재직했다. 1917년 함남 함흥 영생중학교의 학감으로 부임하였고, 1918325일 함흥 YMCA를 조직했다. 이로써 그는 서울 YMCA를 제외한 최초의 지방 YMCA의 창설자가 되었다. 191931운동 이후 그는 1922년경 상경하여 이화여자중학교의 국어ㆍ역사 교사, 1926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국어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주로 그는 YMCA 운동에 헌신하여, 매주일 열리는 일요 강좌의 강사, 학생하령회 강사, 특별 강연회의 연사, 그리고 서울 YMCA와 연합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당대의 웅변가요 사상가였다. 본래 강직한 선비이고 학식과 웅변을 겸비한 교육가였으므로 그가 연설할 때는 언제나 초만원을 이루었다. 815 해방 후 그는 서울대학교의 명예교수로 추대되어 윤리 및 국사를 맡아 강의하다가 1947년 별세했다.
  7. 갈홍기(葛弘基, 1906~1989) -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 1925년 배재고등학교, 192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4년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교수직을 상실했으나 전향 성명서를 내고 복직된다. 1939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연회에 준회원으로 허입되어 인천지방 화도, 영흥 구역의 부담임으로 목회를 시작하여 41년 목사안수를 받고 감리교 신학교와 장로교 조선신학원에서 강의하였다. 1945년 일본기독교 조선교교단의 종교교육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해방 후 초대 공보실장, 외무부차관(1952), 동명학원 이사장(1957), 말레이시아 대사 등을 지냈으며 미국에서 만년을 보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있다.
  8. 임인수(林仁洙, 1919~1967) - 해방 이후 땅에 쓴 글씨를 저술한 시인, 아동문학가. 호는 현석(玄石) 또는 구촌(九村).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1944년 조선신학교를 졸업. 해방 이후 동시, 동화, 아동소설 등 아동문학작품 외에 시도 발표하면서 주로 잡지의 편집일을 보았다.
  9. 박학수(朴學洙, 1917~1950) - 일제 말기 지원병 제도에 반대하여 동료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0. 조선신학교 3회 졸업.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란학교를 세워 학교 위기 극복에 공헌(송탄중부교회 원로장로)
  11. 회랑(回廊) - 종교 건축이나 궁전 건축 따위에서 건물의 중요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달린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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