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02) 조선신학원 발족 - 설립자의 고충(苦衷)

설립자의 고충(苦衷)

 

설립자 부대끼다

 

해방 바로 일년 전부터였다고 기억된다. 형사들이 설립자 김영철 장로에게 은근히 공갈하곤 했다.

당신이 정신이 있소?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런데 돈 내시오? 좋지 않을 거요.

그래서 그는 몹시 불안해졌다. 그는 어느 날 내게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나 이젠 조선신학원과의 관계를 끊겠소. 돈도 낼 수 없소. 김 목사도 아예 그만 두는 게 좋겠소. ……』

나는 그건 내게 말할게 아니라, 이사회에 말씀하시지요. 내가 이사장에게 말씀드려 이사회를 소집하도록 할테니까요.

 

며칠 후에 이사회가 모였다.

설립자의 말에 이사들은 분개했다. 설립자면 학원과 운명을 같이해야 할 것이지 그게 무슨 소리냐는 것이었다.

내가 설립자라면 학원문 닫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그는 항변했다. 문을 닫고서 설립자도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이사회에서는 다소 흥분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님 필생의 사업을 계승하셨다는 분이 아버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있소?하고 힐난[1] 비슷하게 말하는 분도 있었다.

아버님도 이렇게 될 줄 알으셨으면 시작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시작했더라도 손 떼셨을 것입니다하고 그는 대답한다.

 

나는 이사들에게 변명했다. 나는 김 장로님의 고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경찰에서 묻거든 신학교에서 손을 뗐으니 모른다고만 하시고 돈도 내지 마세요. 더 자세히 따지거든 원장에게 물어보라고만 하세요. 우리도 김 장로님께서는 이 학원과의 관계를 끊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니 설립자 명의는 그대로 갖고 계셔야 합니다. 그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니만큼 맘대로 떼고 붙이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실제 행정에 관여하는 직책도 아니니 말입니다. 무슨 어려운 일이 있거든 학원 당국에 밀어버리세요했다.

 

그래서 그 정도로 낙착됐다. 이사회에서는 그를 격려하고 위해 기도하고 좋게 헤어졌다.

 

이제부터 경상비가 문제다. 나는 최저 예산서를 만들고 취지서도 써서 졸업생들에게 보냈다. 각기 담임한 교회에서 특별헌금을 보낼 것을 호소한 것이었다. 졸업생의 반응은 좋았다. 각처에서 연보가 들어와서 거의 예산대로 되어갔다. 총회에도 삼천 원 보조를 요청했다. 재정부장이었던가 하는 이승길[2] 목사는 못마땅하고 심술궂은 표정이었지만 청원한 대로 제의 가결됐다.

 

이것은 해방된 해 봄쯤의 일이다.

그후 김영철 장로도 별말 없이 지냈다.


[각주]

  1. 힐난 트집을 잡아 지나치게 많이 따지고 듦
  2. 이승길(李承吉, 1887~1965) - 장로교 목사. 1887713일 황해도 황주군 서성면 서정리에서 출생. 1894년부터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896년 리(G. Lee ; 李吉咸)에 의해 구성면에 기독교가 전파되자 이후 부모와 함께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헌트(W. Hunt)로부터 190115세에 세례를 받았고 같은 해 3년제 소학교인 황주 양성학교 및 190519세의 청년으로 숭실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곧 사리원 광성교회 부속 광성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교육구국의 일념으로 후진양성에 매진하면서도 한편 서울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를 중심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08년 김구, 최광옥, 도인권, 김홍량 등과 함께 해서(海西)교육총회를 설립하였고 이 기관을 통해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 여파로 이승길, 김구 등은 이른바 안명근 사건(1910)에 연루되어 15년의 실형을 언도받았으며 수감 중 7년으로 감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1921년에 사리원 광성리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으며 그해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23년 이를 돌업(17)한 뒤 그해 12월 제25회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6년 황해노회장에 피선되었고 1930년부터 10년간 장연읍교회에서 시무하였는데 이 기간 중인 1935년 평양노회장, 1936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5회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37년 평양노회장에 재선되었으며 이때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으나 일본의 회유책에 의하여 신앙적 변절을 가져왔으며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결의됨으로써 평양신학교가 자진 폐교한 후 이승길은 설립자 대표로 신학교 복구운동에 앞장섰다.
    1940년 겸이포 중앙교회를 담임, 1948년까지 근속하면서 1941-42년 황동노회장으로 활약하였고 1944년에는 정방산 사건으로 피검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과 함께 출감하였다. 1948년 월남, 도마스목사기념전도회를 조직하여 옹진, 연백 등지에 개척전도를 실시하였으며 1949년 황남노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에 피선되었다. 19519월 인천제2교회를 개척하여 작고시까지 시무하였으며 1952년 기독교봉사회 한국지부중앙위원, 1953년 세브란스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마르다 모자원을 설립하였다. 1954년 황남노회장에 재선되었고 1957111일 인천제2교회에서 성역 41주년기념식을 가졌으며 1962922일 제50회 예장총회에서 증경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65218일 별세하였다. 19771213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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