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06) 조선신학원 발족 - 하용 결혼하고

하용 결혼하고

 

하용 조카가 도농서 결혼식을 올렸다. 위에서 잠시 말했듯이 전농동 우리 집 길 건너 모새기 송 씨 댁 아가씨 정옥과 사귀고 있었는데 송 양도 여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면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조선역사를 주일학교생에게 이야기했다는 혐의로 한때 연행되었다. 우리가 뚝섬 살 때, 정옥은 아직도 갇혀 있어 앞길을 예측할 수 없었다. 2년이 될지 3년이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하용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2년이고 3년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용은 학업도 우수했고 성적으로나 생활로나 아가씨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간호원들 이화학생들이 눈독 들이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가 가마구라(鎌倉) 보육원 주일학교를 책임졌을 때 주일학교 선생은 처치 곤란할 정도로 과잉이었다.

간호원, 이대생 등이 자원했기 때문이다. 구혼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의사를 떠본 것이다.

그는 확고했다.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옥은 육 개월 만에 나왔다.

그때 하르빈의 형님(在衡)이 회갑이었다. 그래서 하용은 약혼자 정옥을 데리고 하르빈으로 갔다. 나는 못갔지만 창꼴집에서 자란 식구들은 거의 다 재연합했었다 한다. 하용은 정옥을 친척들에게 선도 보일 겸 데리고 간 것이었다.

하르빈서 돌아오자 도농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르빈의 형님과 형수님도 오셨다. 우리 집에서 새며누리[1] 큰절 받고 대추 던져주고 즐거우셨다.


[각주]

  1. 며누리 - ‘며느리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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