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11) 조선신학원 발족 - 해방 직후의 날들

해방 직후의 날들

 

해방 직후의 날

 

이삼일 후에 나는 우선 혼자서 서울에 들어왔다. 서울은 환희에 미쳤다. 교통질서도 아무 것도 없었다. 전차고 기차고 지붕에까지 사람 무더기고, 달리는 전차 뒤에 매달렸다가 떨어져 죽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그걸 문제 삼는 사람도 없었다.

거리는 만세도가니였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만나는 대로 손잡고 축하한다.

 

미군 진주

 

이북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는데, 이남에는 미군이 오지 않는다. 일본군이 질서를 유지한다고 총에 칼을 꼽아 갖고 중요한 모새기를 지킨다. 그러나 이미 항복한 군대라 맥쌀이 없었다.[1] 저금을 모두 찾아가라고 한다. 조선은행에서는 지폐를 마구 찍어서 저금을 청산한다. 그동안에 총독부에서 강제 저금 시켰던 것을 부지런히들 찾아간다.

우리는 날마다 경성역 앞, 세브란스 옆에 나가 미군이나 소련군 오기를 기다렸다. 4대국이 똑같이 조선독립의 산파요, 사심 없는 친구인줄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평양쪽으로 간 기차가 예외 없이 함흥차사.

이북에서 피난민이 내리닥친다. 소련군의 다와이(물건강요), 가정 침입, 난행, 행패에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일성 공산정권 수립, 조만식 선생 납치와 감금, 조선민주당[2] 및 교회탄압 등등으로 기독교 지도자, 교인 사회유지들의 월남이 부쩍 늘었다.

단신 또는 식구 대동으로 빈손 들고 무작정 넘어오는 것이다.

이남에는 자유가 있다는 것 때문이라고 한다.

이북 월남민이 수만인데다가 일본, 만주, 북지, 상해 등지에서도 독립국에 간다고 떼지어 돌아온다.

작은 물웅덩이 정도밖에 안되는 서울 바닥은 인간소용돌이였다. 사람이 천하고 물건이 귀하다.


[각주]

  1. 맥살없다 - ‘맥없다의 방언
  2. 조선민주당 1945년 조만식이 북한 지역 대표들과 함께 평양에서 창당한 민족주의 계열의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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