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14) 조선신학원 발족 - 식구들 서울에

식구들 서울에

 

우리 식구래야 아내와 딸 셋, 아들 둘이다. 애들 이름은 아버님께서 옛날 지은 작명법을 따라 글자 획수를 헤면서 오행(五行)에 맞춰 지은 것이다.

맏딸은 선계(仙桂)라 했고 둘째 딸은 단계(丹桂)라 했다. 맏아들 은용(恩鏞)만은 내가 간도 가는 길에 창꼴집에서 났는데 그애 이름은 나더러 지으라 해서 나는 은혜로 주신 애기라는 뜻과 은진”(恩眞)가는 길에 큰 집에서 났다는 뜻도 품겨서 은용이라고 했다. “선계단계는 기생 이름 같아서 후에 내가 고쳤다. 맏딸은 정자”(正子)라 하고 둘째 딸은 신자”(信子)라 했다. 맏딸에는 정의감이 강하고 어느 정도 남성적인데다가 기()가 승()해서 남에게 지기를 무던히 싫어했기 때문에 바를 정()자를 붙였고, 둘째 딸은 좀 얌전하고 진실해 보이기 때문에 믿을 신()자로 부른 것이었다.

그때는 일제말기라 일본식으로 여자에게 아들 자()짜를 쓰는 사람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 풍속에서도 여자애에게 아들자짜 이름을 붙이면 다음에는 아들이 난다는 얘기도 있어서 두루두루 그리된 것이었다. 해방 후에 본인들이 일본식이 싫다고 자를 자로 고쳐 쓰고 있다.

혜원은 내가 미국에서 돌아와 얻은 첫 아이니만큼 이름도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본 것이었다.

사실 정자와 신자는 애기 시절에 아버지사랑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자랐을 것이다.

정자는 내가 신아산 소학교 교사로 있을 때 잉태되어 만삭된 달에 나는 일본 유학을 떠났고 아내는 큰집에 돌아가자 곧 첫아이가 난 것이다. 내가 청산신학교 졸업반 때 하기방학에 귀국에서 처음 내 첫 애기를 면대했다. 그것이 정자가 4살 때였을 것이다. 그것도 잠깐이고 곧 순회전도니 뭐니 하고 돌아다녔고, 잠깐 후에는 귀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자는 내가 미국가기 바로 전에 여비 등 문제 등등으로 창꼴집에 들렀을 때 임신되었는데 미국 유학 4년을 마치고 귀국해서 처음 보았으니 아마 신자가 다섯 살 때였을 것이다.

귀국해서 내가 평양에 직장을 갖게 되자 온 식구가 처음으로 한데 모여 Home라고 갖게 된 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다.

용정에서도 식구들이 모여 살았다. 제 집 갖고 살았다는 것이 발전일지 모르겠다. 내가 서울 가면서 가족들은 또 창골집대가족보자기 속에 품겼다가 추후해서 서울에 모인 것이다.

그러고보니, 우리 식구들 중에서, 나서 네 살까지 자라면서 아버지 그림자도 못 본 딸은 신자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애는 아버지가 그리웠을 것이고 아버지 사랑을 동경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외톨이 학생 기분이었고 다섯 가족의 아버지란 의식은 뿌리박혀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노릇을 제대로 못한 셈이다. 했을 리가 없다.

부모를 떠나 남편과 연합하여 한 몸 되는 결혼이나 잘되어 축복받기를 기원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녀들 결혼에 간섭하지 않았다. 여섯 자녀가 예외없이 자유 결혼이다. 자기들끼리서 결정해 놓고서야 아버지께 문의한다. 아버지는 사돈될 분이 좋게 여기느냐? 너희가 서로 사랑하느냐?” 등등의 몇 가지를 묻고서는 좋다”, “축복한다로 끝낸다.

아버지는 그런 점에서 너무 비정서적이랄까. 신자가 어린 시절에 남달리 그리워한 사랑이 결혼 후에도 심층 어느 한구석에 응결돼 있지나 않을까 싶어 아버지는 미안한 것 뿐, 이제 와서 속량할 길은 막연하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교회나 사회나 국가에는 어느 정도 발언할 권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가정과 가족들, 자녀들에게는 나 자신으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그만큼 부모를 위해주고 자기들 생활에도 큰 재난을 탈선 없이 사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은혜라고 감사한다.

막내아들 관용은 이정희(李貞姬)와 역시 자유 결혼하여 지금 수유리에서 산다. 아버지가 1939년부터 줄곧 독재반대에 나섰고 해외에 나와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막내는 일종의 인질(人質)로 거기를 뜨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에게도 미안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엉뚱한 대망이 없다. 교회 생활에 충실하고 직장에서 한 점 부정도 없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시련이 닥치지 않는다.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지금 그 학교 자재과장으로 있다.

늙은 아내는 그 애까지 여기 왔으면 얼마나 좋겠소!” 하며 입버릇처럼 뇐다.[1]

작은 교직자요, 동지요, 나의 상담자인 이상철 박사는 내 사위로서 아들 직책도 분담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나는 자녀에게 물질적으로 남겨줄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자녀들 효양[2]은 남 못잖게 받고 있는 셈이다. 구태여 말한다면 그리스도가 내 유산이랄까? 예수도, 성프랜시스도, 로욜라도, 내게 세례 베푸신 김영구 목사님도 그러했으니 내가 외로울 것은 없겠다.


[각주]

  1. 뇌다 지나간 일이나 한 번 한 말을 여러 번 거듭 말하다.
  2. 효양(孝養) - 어버이를 효성으로 봉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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