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3) 회령에서 3년 - 장가가던 이야기

장가가던 이야기

 

나이 열일곱 정도 밖에 안되는 소년인데도 서기(주사) 어른들이 놀러나갈 때면 나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회령읍에서도 제일 찬란한 거리가 일인들이 경영하는 공창가였다. 군청 어른들은 나를 데리고 간다. 기가 약한 나는 같이 간다. 거기에는 어른들의 정부랄까, 서로 정붙인 계집이 하나씩 있었다. 그 애 방에서 술이며 요리를 청해다 먹으며 애무하다가 잔다. 그런 경우에 나도 같은 방에서 같이 먹게 한다. 그러다가 자리 펼 무렵쯤이면 어떤 애기 여인이 들어와 자기방에 유인한다. 그녀는 자기 방에 가자고 나를 계획적으로 조른다. 나도 성(Sex)에 무심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내키질 않아서 기어코 뛰쳐나오고 만다. 어쨌든 결혼 때까지 나는 숫총각이었다. 뭐 자랑삼아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이 십칠 팔세 되면 아무리 수집어도[1] 속으로는 춘정이 움직이기 마련이다. 사춘기란 것은 인생의 봄철이어서 계절에서 봄 오듯 낙자없이[2] 오는 것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 처녀른[3] 보면 괸이[4] 가슴이 간지러워 도둑눈을 판다.

그때 나는 집에서 백십 리 떨어진 회령군청 간접세과에 고원[5]으로 있은 지 만 3, 나이는 18세였다.

 

형님의 편지가 왔다. 웬일인가 했더니 우리 집에서 한 15리 떨어져 있는 회암동 장석연 씨 맏따님과 혼약이 되어 음력 829일에 성례(결혼식)를 하겠으니 곧 오라는 사연이었다.

날짜가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아버님과 형님 분부를 어겨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하라는 대로 할 밖에 없었다. 나는 군수에게 사연을 말하고 휴가를 얻었다. 전 직원이 축금을 걷워 장지에 정성스레 쓴 축장과 함께 쟁반에 담아준다. 나는 한 분 한 분 돌아가며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그것이 바로 결혼날짜 나흘 전이었다. 첫날은 40리를 걸어 행영읍 성 밖 여인숙에서 자고 다음날 80리를 걸어 갈 작정이었다. 종성과 경원 지경에 뻐친 송진산 줄거리[6]도 넘어야 했다. 그것이 무시무시한 30리 무인지경 호랑이 넘나든다는 강팔령이다. 내게는 떠날 때부터 거기가 문제꺼리였다. 바로 고개 밑 5리쯤에서 소낙비가 퍼붓는다. 어느 길가 농가에서 비 멎기를 기다렸지만 산비라 구름이 겹쳐 빗줄기가 바닷물결처럼 파상(波狀)으로 밀려온다. 할 수 없이 우비도 집어 치우고 빗속을 마구 달렸다. 강팔령에는 오솔길과 새로 난 국도 두 길이 있다. 옛 길은 거리가 가깝지만 가파롭고 국도는 완경사지만 멀게 돌았다. 나는 국도를 택했다. 오솔길에서 호랑이 만났다는 이야기가 하두[7] 자주 들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산에 접어들자 비는 더 거세다. 나는 단 혼자서 겁결에[8] 숨 가뿐줄도 모르고 달렸다. 산 넘어도 인가 없는 십리길이다. 우리 집 앞 언덕 향두막앞에 왔을 때는 아주 캄캄한 밤이었다. 형님은 안절부절 앞길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물에 빠진 생쥐꼴로 들어오는 나를 끌어안고 눈물이 글썽했다. 온 집안이 떠들썩 야단이다. 내 없는 동안에 우리 가문에 시집온 첨보는 새댁네까지도 뛰어나와 반긴다. 형님이 그렇게까지 초조해 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학교 나오고 출세하기 시작한 신식 젊은이에게 눈치도 귓땜도 없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아가씨를 이게 네 아내니 평생 같이 살아라고 떠맡긴다는 어른들의 처사가 스스로도 불안했던 것이다. 그 애가 항명(抗命)이라도 하면 어쩌나! 집안 망신은 어떻게 당하나!

이만저만한 조바심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결국 내가 왔다는데서 모든 걱정환호로 바뀐 것이다.

 

이튿날, 나는 아버님이 부르시는 대로 장지에 납채문을 썼다. 준비된 사모각대에 탕건과 갓까지 쓰고 동네 어른들을 예방했다. 그것이 가관식이라 했.

 

혼인 날짜가 왔다. 식은 신부집에서 치룬단다. 나는 우리 집안 어느 애마가(愛馬家)가 자랑스레 기르는 흰데 푸른점 박힌 청총마를 타고 난생 처음 처갓집에로 갔다. 회암동 무연한[9] 언덕 중턱에 맨드럼히 붙어 있는 낡은 기와집이었다. 장석연이란 문패가 붙어 있다. 우리 형님 또래 나이로서 글은 모르고 평생 농사꾼으로 자란 순진한 분이었다. 그가 내 장인이란다.

후에 장() 씨네 족보를 잠깐 드려다 보았지만, 이조 중엽에 중국 산동성에서 이민하여 충북 아산(牙山)에 상륙했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중국이 세도하는 대국이었기에 장 씨 일족을 임군이 입궐시켜 환영하고 반열(양반계열)에 들이고 아산이란 본(本貫)을 주셨다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상민이란 천대는 면했지만, 순 중국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는 성격이 무던히 대륙적이고 좀처럼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아무리 어려워도 말없이 오래 참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결혼식이다. 색씨와 부인네들은 집안에 있고 남자들은 밖앝 뜰악에 멍석, 돗자리 등속을 깔고 앉았다. 젊은이들은 울타리 안팎에서 서성댄다.

프로전안[10]이다. 기러기를 드린다는 뜻이다. 그때 색시는 사잇방에 있고 창문은 열렸지만 주렴이 드리워 있다. 나는 색시방 문앞 섬돌 밑에 꿀어 앉아 상 위에 놓인 나무 기러기를 부채로 세 번 색시 쪽으로 민다. 그것이 전안이다. 기러기가 자기 짝을 찾아 접근하는 말하자면 Wooing[11]거다.

다음은 초례(醮禮). 남자의 우잉(구혼?)을 받아들인 색시는 사잇방에서 윗방으로 옮겨 주렴을 걷고 밖앝 뜨락으로 나온다. 큰 머리에 대례복, 그만하면 민상불 성장이었다. 나는 밖앝 초례장 신랑자리에 앉아 있다. 뒤에 병풍, 그리고 보료 깐 자리 앞에 빈 상 하나 놓여 있다. 맞은편에 준비된 신부 자리도 마찬가지다. 에스콭하는 젊은 아낙네들이 신부의 면사포를 들어 앞이 보이게 한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신부의 생김새를 봤다. 키가 헌칠하고[12] 낯이 갸름하고 콧날이 서고 그런 색시였다. 내가 꿈꾸던 타입과는 종류가 달랐다. 나는 맘에 꼭 든다거나 싫어 못견디겠다거나 할 것도 없는 - 그런 색시였구나! 하고 남의 일 같이 담담했다!

신부는 내 맞은 편 병풍 안 자리에 앉았다. 에스콭하는 부인들이 옆에 앉아 시중을 든다. 신부는 나를 거뜰떠 보지도 않는다. 보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신부란 시종 눈을 내리 깔고 있어야 한다니까.

초례가 시작된다. 사식은 김향장이라는 우리 집안 어른이 맡았다. 청의 동자 둘이 하나는 푸른 실, 하나는 붉은 실, 어깨에서 느리며[13] 신부와 신랑 사이를 오간다. 청의 동자가 신랑이 신부에게 부어드리는 술 한 잔 쟁반에 받혀들고 신부에게 간다. 걸음걸음 어깨 넘어로 늘여지는 푸른 실이 푸른 선을 그린다. 신랑의 잔을 받은 신부는 그 잔에 입을 댓다가 상에 놓고 자기가 준비한 쟁반에 술 한 잔 손수 부어 홍실 느린 동자에게 준다. 붉은 실 느리며 동자는 신랑에게 전한다. 이렇게 세 번 반복한다. 말하자면 청실홍실누리며 삼배주천지인삼재(三才)에 맹세하는 것이었다.

 

이 예식은 아주 정중하고 씸볼릭해서 결혼상대자가 맘에 들든 안들든 이 맹약을 깨뜨릴 수는 없다고 느끼었다. 나는 그때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도 믿지 않았지만, 믿은 다음에도 이 맹약은 어쩔 수 없는 구속력을 갖고 있었다. 의리가 중하기 때문이다.

식이 끝나자 신랑은 윗방에 좌정한다. 동네 청년들이 신랑을 졸른다. 그리하여 신랑을 아끼는 장모가 안절부절 톡톡한[14] 상을 차려온다는 것이다. 신랑을 조르기도 전에 술상 돼지다리, 과실 등등이 푸짐하게 들어왔다. 그 이상 달라할 염치도 없게 됐달까? 그들은 젊잖게 내 시국담을 듣는 것으로 끝났다.

 

이제는 신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행사의 날자만이 아니라 시간도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가마를 타고 나는 예의 청종마를 타고 떠났다. 신부의 옷장과 그 속에 배꾹 찬 옷감, 옷종류, 시집어른들과 친척들께 드릴 예물 등속이 따로 수레에 실렸다. 나는 신나게 말을 달렸다. 천생 처음타는 말이지만, 네굽 안겨 신장로를 달리는 기분은 나쁘지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때, 젊은 아낙네들이 놀려댄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허전하고 싱거워졌다. 여인들은 신부 앞에 놓을 큰상 차리기에 바뻤다. 산떼미처럼 쌓아 올린다. 먹으라는 게 아니고 보라는 거다.

 

얼마 후에 신부 일행이 들어온다. 갑자기 활기가 넘친다. 사둔 대접, 동네어른 대접, 술과 돼지갈비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고 석양의 고요가 깃들인다. 가까운 집안 젊은 아낙네들만이 남는다.

신방에 든다. 신랑더러 신부의 큰 머리를 벗기란다. 하라는 대로 했다. 젊은 여인들은 신부의 예복을 통상복으로 갈아 입혔다. 차려온 천들을 구경했다. 그게 빈약하면 멸시 받는다고 들었다.

초야가 문제다. 신랑이 신부의 옷고름을 풀고 자리에 같이 눕는 거란다. 짓궂은 젊은 여인들은 침으로 창호지를 뚫고 엿보며 깔깔댄다. 신랑이 촛불을 끄면 다들 헤어진다. 첫 밤에는 신랑이 신부 옆에 눕는다는 특권밖에 없다. 옷도 꽁꽁 입은 대로다. 첫날밤 첫말이 중요하단다. 나는 무슨 말 해야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뭐라고 하긴 해야 한다기에 어껼에 나는 이제부터 공부도 해야겠고 나돌다 다니기만 할 것 같은데 당신은 집에서 어른들 모시고 식구들과 의좋게 몇해구 기다릴 수 있겠소?

그래야 할 것 같은데!』 …… 얼껼에 나온 말이지만 오랜날 지난 오늘에는 무슨 예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신부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내야 이제 이 댁 사람이고 당신 사람인데 그런 걸 왜 물으시오?한다.

사흘 후, 신부는 침실에 든다. 결국 피동적이지만 애무도 받고 몸도 맡긴다. 그래서 진짜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된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남편으로서의 의리가 전부였던 것 같이 생각된다.


장공 김재준 / 19세 때 사진

[각주]

  1. 수집다 - ‘수줍다의 북한어
  2. 낙자없다 - ‘영락없다의 방언
  3. 처녀를의 오기인 듯
  4. 괸이 - ‘괜히의 방언
  5. 고원 - 관청에서 사무를 돕기 위하여 두는 임시 직원
  6. 줄거리 - ‘줄기의 방언
  7. 하두 - ‘하도의 방언
  8. 겁결 - 겁이 나서 당황한 겨를이나 순간을 이르는 말
  9. 무연한 - 아득하게 너르다
  10. 전안(奠雁) - 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의 집으로 가서 상 위에 올려놓고 절하던 예
  11. Wooing 구애, 구혼, 설득
  12. 헌칠하다 - 썩 보기 좋을 정도로 적당히 크다
  13. 느리다 - ‘내리다의 방언
  14. 톡톡하다 - 실속 있고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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