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4) 웅기서 서울로 - 외투리 풋내기도

외투리 풋내기도

 

결혼하자마자 나는 회령군청에서 웅기금융조합으로 전직했다. 그 때 웅기에는 은행이 없었기에 금융조합에서 은행업무도 얼마 맡아 상인들 편리를 봐주곤 했다. 그것이 31운동 다음 해였지만 웅기에는 교회가 너무 약했고 경찰이 너무 극성이었기 때문에 운동자체에서는 탈락되어 있었다. 그러나 웅기는 만주나 시베리아에 망명하는 애국지사들이 통과하는 관문이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배로 웅기까지 와서 장사군으로 변장하고 두만강을 건너는 것이다. 그때 김기련이라는 30대 청년이 웅기서 무역상 겸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상점 이름은 대성상회였다고 기억된다. , , 흰콩 등속은 수출품이었는데 김기련은 일본인 수출업자의 하청을 받아 주로 두만강 건너의 산품[1]을 실어다 바치는 것이었다. 콩 사들인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은 쉽사리 두만강을 넘나들 수 있었다. 독립투사들도 대성상회에 들려 콩장사로 강을 건넌다. 나는 대성상회에서 그런 분들을 만나 이야기도 듣고 몰래 갖고온 상해 독립신문 같은 걸 읽기도 했다. 피가 피를 부른다는 말대로 내게도 가냘픈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진짜 애숭이어서 사회적으로는 있으나마나였다.

 

내가 금융기관에 있다는 것 때문에 제절로[2] 장사치들, 사회청년들과 어울리게 됐다. 세속사회의 교제란 술과 계집을 필수품으로 한다. 친구를 만나면 의례 색주가나 요정에 끌고 간다. 술에 강하고 계집 다루기에 능숙하면 인물로서의 점수가 오른다. 인물은 주색 밖에서 구한다고 한다. 주색은 인물평에 관계없다는 뜻이다. 화류가 그대로 풍류였다. 이건 물론 풍류의 타락이다.

어쨌든, 나도 그런 데로 끌려다녔다. 아내도 없고 외투리 하숙인이기에 가정적으로 문제삼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적극적이 아니었다. 마냥 수집었다[3]. 여자들은 그게 좋다고 아양을 떤다. 그러나 매춘에는 매력이 없었다.

 

그럭저럭 삼년이 됐는데, 지나가는 애국지사들 모습은 갈수록 돋보이게 되고 일인들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자기 모습은 초라하기만 했다. 견디다 못해 김기련은 식구를 귀낙동 본집에 보내고 자기는 상점을 팔고 시베리아로 뛰었다. 나도 물론 들떴다. 김기련은 해삼위[4]서 독립군에 가담했다고 공산혁명 때 희생됐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아무도 확증은 못 얻고 있다.

또 하나 웅기서의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북만주 할빈에서 아편장사로 첫 밑천을 만들어 호텔도 경영하고 하는 부자청풍 김 모가 내게 초청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일본말을 잘한다니 사업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따분한 촌 항구에서 이름난 대도시로 간다는 호기심에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속으로는 가기로 작정하고 아버님께 상의하는 편지를 올렸다. 그때 아버님은 적지[5] 늪 근처 홍의동에서 서당훈장을 하고 계셨다. 편지회답이 없기에 가서 뵜다.

그런 일은 너희 어머니, , 집안 식구들과 잘 상의한 다음에 결정해야 한다하시면서 나를 데리고 창꼴집으로 떠나시는 것이었다. 적지늪을 지나 강가 유명한 버드나무 숲속을 걸으셨다. 적지늪 뒤에는 꽤 높은 봉우리가 홀로 바다의 섬처럼 서 있다. 그 저쪽이 두만강이다. 전에는 두만강이 불으면 그 봉우리 안으로 들이 흘러 우리 땅이 그만큼 줄어들었단다. 그런데 어느 유명한 성주가 그 봉우리 뒤와 옆으로 30리 모래밭에 버드나무 수백만 그루를 심어 밀림을 이루자 강은 봉우리 저쪽으로만 흘러 그만큼 국경선이 저쪽으로 물러갔다는 것이다. 지금 그 밀림은 무시무시할 만큼 무성해 있다. 이리 떼의 서식처이기도 하단다. 아버님은 그 숲을 지나시면서 즉흥시() 한 절 읊으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할빈이란 데는 험한 고장이다. 더군다나 아편장사 소굴에 너 같은 풋내기가 어쩌자고 들어가려는 거냐? 그 사람들이 돈을 벌었다마는 불의한 돈은 뜬 구름 같은 거다. 아예 갈 생각말고 웅기 있으면서 펴이는 대로 앞길을 찾아봐라!

대기는 만성이란다!하셨다. 나는 내가 큰 그릇이라고 생각해 본 일은 없지만 아버님 말씀에 깊이가 있다고 느끼어 할빈행은 단념했다.

훨씬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가 여덟 살 때였었던 것 같다. 북간도 명동학교[6]에 공부하러 간다는 20대 젊은이가 우리 집에 와서 한 달 이상 머문 일이 있다. 그는 아버님 몰래 나를 명동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걸 눈치 챈 아버님은 어느 날 나를 서재방으로 부르셨다.

서울 너희 백부님이 내년에는 너를 데려다 공부시킨다고 하셨다. 서울 가야 제대로 공부될 것 아니냐? 딴생각 말고 기다려라!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있고 그 사람 혼자 떠났다. 그 후에는 감감소식이다. 백부님도 그런 약속을 하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 후에 나는 역시 아버님 말씀대로 서울에 갔다.


[각주]

  1. 산품 - 일정한 곳에서 산출되는 물품
  2. 제절로 - ‘저절로의 방언
  3. 수집다 - ‘수줍다의 북한어
  4. 해삼위(海蔘威) : ‘블라디보스토크의 한문 이름. ‘블라디는 러시아어로 지배하다는 뜻이고, ‘보스토크동쪽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해삼이 많이 나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5. 적지 -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면에 있는 못. 면적은 1,664
  6. 명동학교 : 명동학교는 본래 김약연이 자녀교육에 힘쓰기 위해 만든 규암재(奎巖齋)였다. 또한 이상설이 1906년 간도 용정으로 망명을 와서 서전의숙이란 현대식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는데,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김약연이 서전의숙을 인수하고 규암재를 발전적으로 해산, 명동서숙이란 새로운 신식교육기관으로 출발시켰다(1908427). 명동서숙은 1909427일 제1회 창립기념일을 기하여 교명을 명동학교로 다시 개명하는 동시에 김약연이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때 교감으로 취임한 사람이 정재면이었는데, 그는 평양숭실학교, 서울상동교회 청년학원, 서울 종로 황성기독교청년회 등 기독교회 출신 청년으로서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교감직을 수락했던 것이다. 정재면 교감은 19103월을 기하여 명동학교를 중등교육과정에까지 크게 확장하는 동시에, 국내에서 국사 담당교사로서 황의돈, 국어교사로서 장지영, 성경 윤리교사로서 박태환 등 3명의 교사를 초빙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울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부터 동지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으며, 다시 법률 담당에 김철(金喆, 혹은 金永耈) 체육과 수학 담당에 김홍일(金弘一, 당시는 崔世平이란 가명 사용) 등이 교사진에 가담하게 되었다.
    1917년부터는 독립정신 고취를 위하여 <자유의 종>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했으며, 1918년부터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충렬대, 맹호대, 결사대, 단지동맹, 애국부인회 등이 조직되었으며, 1920년에는 졸업생 중심의 독립운동 자금을 위한 조선은행 15만원 탈취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19201020일 일본군은 이 학교를 급습, 모든 기물과 학교건물을 불사르게 되었다. 1) 이 학교는 지리를 가르칠 때에 조선을 일본 영토에서 제외된 지도를 사용한다는 것, 2)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사용한다는 것, 3) 철저한 항일교육을 실시한다는 것, 4) 입학시험을 칠 때 독립정신, 민족정신이 투철하지 못한 학생은 낙제를 시킨다는 것 등의 이유로 김약연은 체포되어 2년간 투옥되었으며, 드디어 1925년을 기하여 완전히 폐교되었는데, 그때까지 1,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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