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5) 웅기서 서울로 - 웅기서 서울로

웅기서 서울로

 

때는 31운동 다음해 - 나는 그때 웅기 금융조합에 서기로 있었다. 나이는 스무 살.

웅기서 한 오리 떨어진 해변에 웅상이란 동네가 있다. 일찍부터 기독교촌이었다. 거기 출신인 송창근[1] 씨가 서울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31운동 다음 해에 독립의 노래를 작사하여 퍼뜨렸다는 것 때문에 이라는 청년과 이라는 소년과 함께 잡혀서 육개월 징역을 치루고 고향에 근친하러 왔다. 교회에서는 사흘동안 특별 강연회를 연다고 광고가 나붙었다. 나는 교회 집회에는 냉담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하숙방에 그이가 일부러 찾아왔다.[2] 말끔하게 세련된 서울식 미남자였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위였지만 나 같은 풋내기를 먼저 찾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 이튿날 길에서 그를 만났는데 무척 반기면서 지금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되살아났습니다. 이제부터 새 시대가 옵니다. 김 선생 같은 청년을 요구합니다. 웅기 구석에서 금융조합 서기나 하면 무엇합니까? 서울 올라와 공부하십시요! 서울에는 유명하신 백부님이 계시잖습니까? 하루 속히 단행하십시요……』 했다. 그 언어가 정답고 진실했다. 나는 대답을 못했지만 속으로는 들떴다.

그때 나는 꽤 많은 돈을 갖고 있었다. 남만철도 어느 일본인 간부가 비밀서류인 나진(羅津) 개발 설계도를 입수한 것을 계기로 벼락부자 꿈이 부풀었던 것 같다. 그는 소문없이 나진 땅을 사둘 작전이었다. 그 임무를 함북도청 서기 김희영에게 부탁했다. 김희영은 웅기 있는 나에게 부탁했다. 나진은 웅기서 남쪽 이십 리, 언덕 넘어에 있다. 그러니까 이 일은 내가 맡는 게 편리하다는 결론이었다. 나진은 항구 됨됨이 웅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아직은 항구 구실을 못한다. 질퍽한 벌판이 넓고, 밋밋한 완경사 언덕도 광막[3]하지만 곡식이 안되니 땅값은 갯값이다. 한 평에 이십 전이면 얼마든지 산다. 나는 나진가서 약빠른 거간군을 내세워 대번에 사십만 평인가 사서 이동등기까지 해 보냈다. 덕분에 거간료가 톡톡하게 생겼다. 그 중 얼마를 거간군에게 할양하고 김희영에게도 후하게 사례하고 나머지는 내 이름으로 저금했다.

 

때가 때니만큼 독립투사들이 웅기에 몰려 콩무역 하청인으로 되어 두만강을 넘어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한다. 나도 그들에게서 받은 인상이 컸다. 이만큼 돈이 생겼으니 서울에 공부하러 간다! 이렇게 맘먹고 가슴이 부푼다. 당장 금융조합에 사직서를 내고 아내에게도 알리잖고 부랴부랴 배를 탔다. 그때 아내는 웅기서 팔십 리 떨어진 창꼴집에서 시집살이로 있었다.


[각주]

  1. 송창근(宋昌根, 1898~1950) - 장로교 목사, 신학자, 교육가, 수난자. 호는 만우(晩雨). 1898105일 함북 경흥군 웅기면 웅상동에서 송시택(宋始澤)의 장남으로 출생. 그는 일찍 개화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종숙 송시명(宋始明)은 그의 고장에서 최초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향리에 북일(北一)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송창근은 이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다시 종숙의 권고로 15세의 나이에 간도로 건너가 이동휘가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세운 명동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이 시절 그는 이동휘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귀국하여 목사가 되라는 이동휘의 권고에 따라 귀국하여 1915년 서울의 피어선선경학교에 입학하여 19203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남대문교회 조사로 발탁되어 31 운동으로 투옥된 그 교회 장로 겸 조사인 함태영의 후임자가 되었다. 이때 그는 남대문교회가 뚝섬에 세운 전도서에 나가 전도하고 있었는데 교인들에게 독립운동 노래를 유포시켰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고역을 치렀다. 19208월 휴양할겸 고향에 들른 그는 함북지역 교회들을 돌면서 강연회를 열어 많은 청년들에게 감명을 주었는데 이 무렵 김재준과의 교분이 싹트기 시작했다. 서울로 돌아왔을 땐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나 이 사건의 혐의자로 또 다시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그는 이때 받은 고문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출옥 후 계속 남대문교회 조사일을 보다가 일본 유학을 계획하여 1922년 도일, 처음엔 토오요오(東洋)대학 문화학과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 2학년에 편입하여 1926년 졸업하였다. 졸업후 미국으로 건너 가(이때 여비가 없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이용도 목사가 외투를 팔아 도와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고 그해 9월엔 프린스턴신학교로 옮겼다. 이미 그곳엔 1년 전에 온 한경직이 있었고 1년 후엔 김재준도 건너와 3명의 한국인 학생이 함께 생활하였다. 송창근은 19289월 펜실베니아의 웨스턴신학교로 옮겨 1930년 졸업하였고 1931년 덴버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1년 그는 귀국하여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취임하고 그 이듬해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하였다. 이 교회는 조만식, 김동원 등 장로와 교인들 가운데 유력한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는 원리원칙을 살려 담대하게 목회하였으며 특히 교인들의 신앙과 기강을 엄하게 훈련하였다. 그후 교회 건축문제를 놓고 교회 당회와의 갈등이 생겨, 그는 1936년 봄 산정현교회를 사면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성빈학사를 세웠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가난한 학생을 도왔다. 특히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지도를 하였다. 그는 <성빈>이라는 잡지를 김정준(당시 숭실전문 학생)에게 편집을 맡겨 발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회에서 그가 가르친 성서공부는 부산의 교계에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3710월 그는 흥사단회원들의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서 4년간의 선고를 받고 또 다시 투옥되었다가 1939년 봄에 가석방으로 출옥하였다. 19393, 서울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 대표자들로 구성된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가 조직되도록 추진시킨 사람이 바로 그였다. 평양신학교가 무기 휴교하여 교역자의 양성과 공급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장로회 안에 이전부터 있던 신학교육에 관한 새로운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다. 조선교회가 본토민교회 교역자를 자기 손과 힘으로 양성하자는 신학교육 이상은 외래선교사로부터 신학교육 권리를 이양받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관헌의 방해로 그는 그 일을 김재준ㆍ윤인구들에게 맡기고 김천으로 내려가 815 해방때까지 김천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5년 해방직후 그는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초청되었고, 서울 동자동에 있는 군정으로부터 적산재단(천리교)를 얻어내어서 학교 발전의 터전을 만들었으며 신학교 구내에 바울교회(오늘의 성남교회)를 설립, 목회하였다. 1948년에는 신학교를 한국의 최초 정규대학으로 승격시켰으나 이 신학교 교과내용을 중심으로 한국교계는 보수ㆍ자유 양 진영의 신학논쟁이 와중에 휩싸이게 되었다. 게다가 송창근의 일제말기 행위에 대한 구설수가 끊임없이 나돌아 그는 결국 주위의 권유로 19492월 미국 여행길에 올라 1년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19504월 대구에서 개최된 장로교 총회에서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학교가 신신학파로 정죄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교계인사들을 만나고 신학교 살림을 꾸려나가는 힘든 업무를 계속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와중에 625사변이 발발하였고 그는 주위의 피난 권유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신학교를 지키기 위해 서울에 남아있다가 결국 8월경 공산군에 의해 납치되어 이북으로 끌려 갔다. 이후의 생사에 대해선 분명한 자료가 없으나 다만 1962년 내외문제연구소가 밝힌 남북 종교인사들의 북한 생활기인 죽음의 세월(동아일보 1962.3.29.-6.14 연재)에서 그가 19517월경 대동군 문성리에서 쓸쓸하게 별세하였다고 증언할 따름이다.
  2. 천사무엘은 김재준의 백부(김주병)가 서울에서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서울, 학생계등의 잡지와 여러 계몽도서들을 출판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향인 송창근이 백부와 알고 지내면서 인사 차 김재준을 찾아온 것으로 설명하였다. 천사무엘,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살림, 2003, 37.
  3. 광막하다 - 끊없이 아득하게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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