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9) 서울 3년 - 장도빈 선생과의 인연

장도빈 선생과의 인연

 

31 독립운동에서의 의 댓가로 위선[1] 제등총독문화정치가 선언되었다. 그것이 사탕발림의 회유정책이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사회에서는 민족주의가 어였하게 외쳐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한국말 일간신문이 발간되고 개벽잡지가 나오고 공개강연, 학생토론회 같은 것도 비교적 자유롭게 열리게 되었다.

그때 백부님은 할빈에서 서울에 돌아와 한성도서주식회사를 경영하시면서 각종 도서 출판과 아울러 서울, 학생계두 월간지도 내셨다. 서울은 장도빈 선생이 주간으로 계셨다.

장도빈 선생은 한말 지사로서 국사전공이시고 한말의 언론인으로 저명하신 분이었으나 현실과 꿈이 맞지 않았으며 맞게 할 만큼 사무적인 분도 아니었다.

서울이 재정난과 당국의 간섭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장 선생은 조선지광(조선의 빛)이라는 단독잡지를 창간하였다.

그는 나더러 심부름을 하라 하셨다. 한 달에 20원씩 주마하신다. 그때 하숙비가 16원이었으니 밥은 굶잖을 것 같아서 그러기로 했다.

조선지광[2]은 꽤 부피있는 월간 잡지로써 글솜씨가 아무리 좋아도 혼자서 다 메꾸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장 선생은 여기저기 글 부탁을 하신다. 장 선생의 청탁 편지와 함께 내가 뛰기 마련이다. 덕분에 허헌[3] 씨 댁에도 몇 번 갔었다. 몇 자 안되는 원고였지만 약속기일에 되는 일은 없었다.

장 선생 댁에 몇 번 찾아가 봤지만 추위가 한창인데 방 안에 불기는 체온 이하라, 밖앝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장 선생님은 재만 소복한 놋화로에 콩알만한 불씨를 심어놓고 언 손을 비비고 계셨다. 간혹 바늘 같은 윗수염에 손이 가기도 했다. 원고지도 없어서 소학교에 다니는 따님의 도화지 뒷등에 연필로 쓰다가 신문지 귀등[4]에 적기도 하셨다. 그야말로 서발 장대를 마구 휘둘러도 거칠데 없는[5] 선비집이었다. 그러니 내게 약속한 이십 원 월급이 나올 까닭은 없겠고 따라서 매달 십륙 원씩의 하숙집 밥값도 밀릴때로 밀린다.

 

내복도 외투도 없는 단벌 학생복에 눈길 눈보라와 맞서 도보로 아현고개를 넘고, 애기능 언덕을 오르내려 연희전문에 간다. 백낙준[6] 박사의 약속한 원고를 가지러 가는 것이다.

그때 백 박사는 미국서 갓 돌아온 이글이글 타는 청춘이었다. 연전 문과에서 강의하시는 모양인데 원고기일 같은 것은 기억에도 없으신 모양이었다. 나는 세 번 네 번 허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원고수집, 편집, 인쇄에 넘기는 것, 교정(마감교정은 장 선생님이 손수 보셨지만), 서점배본, 월말 수금등등 모두 나 혼자서의 독무대였다.

결국 페지수를 줄이면서 3호까진가 내다 말았다.[7] 한 달에 20원씩 주신다던 것도 그럭저럭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각주]

  1. 위선 - 다른 것에 앞서서
  2. 조선지광- 1922년 조선지광사에서 장도빈이 신문지법에 의하여 창간한 사회주의 성향의 잡지. 통권 100호로 193011월 종간되었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처음 장도빈(張道斌)이었다가 뒤에는 김동혁(金東爀)으로 바뀌었다.
  3. 허헌(許憲, 1884~1951) - 일제강점기 노동자, 빈민층을 위한 재판에 변호사로 활동한 법조인. 1945년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여 부위원장이 되어 여운형과 활동함. 1947년경 월북하여 김일성 대학 총장을 거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의원회 의장이 된다. 북한에서 여성정치가로 활약한 허정숙(許貞淑)이 그의 딸이다.
  4. 귀등 - ‘귓등의 북한어
  5. 서발 장대(막대) 거칠 것 없다” - 서발이나 되는 긴 막대를 휘둘러도 아무것도 거치거나 걸릴 것이 없다는 뜻, 가난한 집안이라 세간이 아무 것도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6. 백낙준(白樂濬, 1895~1985) - 1985년 평북 정주군 관주면 출생으로, 장로교 목사이며 역사학자로 호는 용재(庸齋)이다. 1913년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신성학교 교장인 매큔(G. S. McCune)의 도움으로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19169). 매큔의 모교인 미주리 주 파아크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하고(19226),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에 들어가 19259월 졸업하였다. 바로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대학원에 입학해 종교사학을 전공하여 1927조선개신교사로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 교장, 연희대 총장, 연세대 총장,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문교부장관에 취임 후 교육행정가로 활동하였다. 1960419 의거 이후 참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8월 초대 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69월 민중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고사하였고,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 양당의 합당추진을 지지하면서도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19802월 국정자문회의 위원, 19832월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5113일 사망하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7. 장도빈이 시작한 <조선지광>19245월 이후에 김동혁이 발행인이 되어 통권 100호로 193011월에 종간되었다. 김재준 목사가 언급한 ‘3호까지가 장도빈 선생이 발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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