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20) 서울 3년 - 하숙에서 쫓겨나

하숙에서 쫓겨나

 

나는 하숙집 밥값이 밀려 이부자리를 떼우고 그 추운 겨울 거리에 쫓겨났다. 그러나 내 심경은 오히려 드높았다.

그 무렵에 나는 톨스토이 십이강이란 책과 그의 저작집도 더러 읽었다. 부요한 귀족으로 자기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농민들과 노동을 같이 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하여, 어느 낯모르는 동네에 천한 머슴살이로 종신하고 싶어 팔십 노옹으로 몰래 집을 나와 야스나야 폴리아나 시골 작은 정거장 대합실에서 급성 폐렴으로 세상 떠난, 그 영원한 불꽃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나는 아씨시 성 프란시스의 전기를 탐독했다.[1] 그의 출가(出家) 광경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무일푼의 탁발승으로 평생을 걸식 방랑한 ()의 기록, 에 회리바람처럼 몰려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퍼져가는 인간과 자연에의 사랑 이런 것이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하천풍언[2]고베빈민촌 생활을 동경하며 일등원그룹의 무소유 생활도 그려봤다. 그런 데로 가서 그런 그룹에 동참하고 싶었다.

어느 날 중년 거지 한 분이 다 떨어진 홋바지 저고리로 검푸른 살을 와들와들 떨며 내게 뭔가 달라고 했다. 나는 집에서 보내 온 새 솜바지 저고리를 몽땅 그에게 주고서 혼자 좋아 하기도 했다.

하숙에서 쫓겨난 날 밤에는 함박눈이 밤새껏 퍼부었다. 장안은 온통 은세계. 나는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하얀 첫 눈길에 내 발자국을 인치며 하염없이 걸었다. 그때 하숙집은 종로5가 동대문 바로 곁이었기에 나는 종로 네거리, 황금정, 훈련원, 장충동 그리고 수구문[3]에서 지금의 신설동, 동소문까지 걸었다. 걸으면서 다시 생각했다.

돈과 어떻게 대결하느냐?』 ① 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어서 남 못잖게 살자. 우선 돈을 벌어서 좋은 사업에 쓰자. 애당초부터 돈을 멸시하고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청빈(淸貧)을 살자.

그 중에서 나는 제3을 택했다. 그것은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톨스토이, 아씨시 프란시스, 그 밖에도 비슷한 분들의 영향이랄 수 있을 것 같다.

돈과 하나님은 함께 섬기지 못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기뜨릴 곳이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하나님 아들의 무소유 생활이 태양이었고 다른 분들은 그 반사광이었다고 생각된다.

돈아, 네 권세가 어디 있느냐?하고 호통치며 살고 싶었다.

밤새껏 눈길을 거니고서 나는 배고팠다. 배고픈 게 영광이라 느끼면서도 먹기는 먹어야 했다. 나는 그때 동소문 안 지금 혜화동, 앵두밭 주인집에 하숙하고 있는 내 외조카 채관석 군을 찾았다. 그는 학비문제 없이 공부하는 행운아여서 이런 경험에는 생소했다. 마침 그에게 아침상이 들어왔다. 그는 밥 한 그릇 더 청해서 같이 먹었다.


[각주]

  1. 김재준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를 탐독한 후 그의 전기를 동경의 송창근에게 보낸다. 이 시기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재학 중이던 송창근과 편지 왕래가 잦았는데, 김재준의 원고를 받은 송창근은 성 프란체스코의 시 태양의 노래에서 장공(長空을 따와 김재준에게 호로 선사했다. 장공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 장공김재준의 삶과 신학, 한신대학교출판부, 2014, 40.
  2.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 - 일본의 종교가, 사회운동가, 저술가. 코오베(神戶)시에서 출생. 원로원 서기관의 아들. 4세 때 부모를 잃고, 토쿠시마(德島)에 있는 양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토쿠시마 소학교를 마친 후, 11세에 호적을 위조하여 토쿠시마 중학에 입학 재학중(1903) 메이어즈 박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1905년 동교를 졸업했다. 메이지 학원 신학부 예과를 거쳐(05-07), 코오베 쥬오신학교에 입학했으나(07), 그해 폐결핵으로 코오베위생병원 및 아카이시미나도(明石港) 병원에 입원, 체험기 <<사선을 넘어서>>를 쓰기 시작했다. 09년 코오베시 니이가와(新川)의 빈민굴에 이주, 빈민굴 구제사업에 착수하였다. 10년 학교를 마치고, 13년 시바하루꼬(藝春子)와 결혼, 14-16년 도미하여 프린스턴 대학에서 신학ㆍ생물학을 배우고, 귀국하여(17) 니이가와 빈민굴에 살면서 전도에 전력했다. 그는 일본의 빈민 운동을 비롯해 노동운동, 농민운동, 탁아운동, 그리고 그가 가장 열정적으로 정력을 쏟은 소비자 생활협동조합과 의료 생활협동조합을 탄생시킨 사회 운동가였다. 1940년 반전(反戰)사상으로 체포된 바 있으며, 2차 세계대전 후 사회당 결성을 도왔고, ‘신일본건설 그리스도운동을 벌였다.
  3. 광희문(光熙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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