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30) 동경 3년 - 청산학원 학생(초년생, 이년생, 졸업반)

청산학원 학생

 

초년생

 

나는 청산학원 학생도 아니면서 여름내 본교생특혜 받는 게 어쩐지 께름했다. 그렇다고 공사감독에게 고백하기도 쑥스럽고 해서 2학기부터라도 진짜 학생이 되야겠다고 맘 먹었다. 그리하면 속도 위반쯤은 용서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교무과의 다까야나기씨에게 2학기에도 입학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입학시기는 아니지만 청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때 신학부장은 베리박사였는데 그도 허락한 모양이었다. 나는 청강생으로 교실 뒷자리에 소리 없이 앉았다. 교실이래야 진재 후 임시 하꼬방이다.

이분, 저분 교수들 강의는 별거 아니었다. 그러나 그 중 히야네란 선생이 맘에 들었다. 류규(오끼나와) 태생으로서 몸집이 크고 소위 화한양(和漢洋) 세 학문에 자유로 드나드는 분이었다. 전공은 비교종교학이었고 세계종교사, 일본종교사등 방대한 저서를 써냈다. 말기에는 기리스단 문학에 대한 저서도 많이 냈다. 동경제대(帝大) 그룹에서는 그 서평에 부피로 한 몫 보려는 잡다한 내용(見掛しの雜駮極まる)이라고 혹평했지만 히야네선생은 그러면서도 그들이 내 책에서 곧 잘 인용하던데…』 하고 고소하는 것이었다. 그가 류구(琉球) 출신이라서 차별대우도 없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학기말 시험이란다. 히야네선생은 학생들에게 일반적인 시험문제를 내 주고 내게는 조선의 제종교와 기독교(朝鮮諸宗敎とキリスト)란 논문을 즉석에서 한 시간 안에 써 내라고 한다.

나는 원시종교, 불교, 유교 등의 한국관계를 약술하고 풍수설 등 참서(讖書) 이야기도 쓰고 결론으로 기독교가 어떻게 한국 종교를 완성시키느냐를 일사천리, 큼직한 시험지 십여 장 썼다. 한문 향기 감도는 일본문장에는 자신도 없잖아 있었던 터여서 그것이 히야네씨의 구미에 맞았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다음 주, 그 시간에 히야네선생은 학생들 앞에서 내가 학생 답안에 백점 줘 본 일이 없는데, 이번 긴상(金氏) 논문에는 백이십 점을 줬다고 했다.

나는 좀 면쾌했지만 자랑도 느끼었다. 학생들은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너절한 옷, 못생긴 얼굴, 못먹어 생기없는 나를 Somebody로 쳐 줬을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티내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일본인은 예절이 발라서 속은 앙큼하면서도 겉으로는 좀처럼 실례를 하지 않는다. 요는 나 자신의 문제다. 내가 좌절감이나 열등감에 자진 걸려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다. 적어도 이번 히야네선생의 평정(評定)이 나의 자기 긍지에 보탬이 됐다는 것만은 사실이라 하겠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히야네선생은 세상 떠날 때까지 한국 학생만 만나면 내 소식을 물었다 한다.

히야네선생은 독특한 문장가였다. 글의 원천(源泉)이 무진장이였고 스타일에 구김새가 없었다. 구수하면서도 날카로워 읽잖을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한 때, 일본 교단신문, 말하자면 일본 교단 기관지 주필인가 할 때, 교계평론에서 춘추직필(春秋直筆)이 너무 날카로워 명사들의 가면이 벗겨지자 반발이 생겨 그만 둔 일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년생

 

푼돈벌이

청산학교 캠퍼스에는 하나오까야마(花崗山)란 잔디밭 언덕 겸 광장이 있고 그 주위에 선교사 주택들이 널려 있었다. 나는 거기서 잔디깎이, 유리창 닦이, 서재 먼지털기, 고깐 정리, 지하실 정돈, 때로는 꽃나무 전지 등등 닥치는 대로 일하여 용처돈[1]을 벌었다. 그런 일 하고 싶은 일본인 학생들도 많았지만 치우 내 차례로 된다. 엘리야에게 빵 부스러기 물어다 준 까마귀를 연상했다. 일용할 양식은 주께서 마련하신다. 기숙사 식당 주인도 장작을 패든, 통나무를 자르든 내게 시키고서 밀린 식비를 탕감해 준다.

 

무얼하나?

2학년 때 하기방학 송창근 형은 귀국하고 나는 혼자 기숙사에 남았다. 이노우에, 후까미등 일본 학생 몇이 있기는 했지만 기숙사는 빈집 같았다. 나는 토요일 우시고메감리교회당, 아오야마 오정목 교회당 등의 소제인으로, 얼마의 삯을 받아 연명하고 있었다. 나머지 날들은 온전히 자유다. 텅 빈 방에 종일 혼자 딩군다. 책만이 친구랄까?

아리지마전집, 도스토예프스키전집 등도 읽었다. 마커스 아우렐리우스[2] 참회록 등 스토아파 서적들에도 친했다. 다니자끼의 순정소설, 이시가와 다꾸복꾸의 시가, 그리고 학교 도서관에서 신학서적들도 더러 갖다 읽었다. 읽으면 쓰고 싶은 충동도 생긴다. 써 놓으면 해산한 부인같이 뭔가 후련해진다. 그러나 내 평생사업은 무엇인가? Life Work이란 것도 나는 모른다. 신학에 들어온 것도 어쩔 수 없이 몰려서 그렇게 된 것이고 목사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교회에 충성할 용의도 없었다.

일제하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어냐? 그래도 교육밖에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게 비교적 자유로우면서도 후진들에게 뭔가 을 넣어줄 접촉점이 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유치원부터 소, 중고, 대학까지의 교육왕국을 세워 본다고 맘먹었다. 강령, 실천요강 생활규범 등도 적어 봤다. 지금부터 동지를 모아야 한다고 이름을 적어 보기도 했다. 떠스케키 인스티튜트같은 것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해놓고 보니 제김에 감격해서 눈물이 난다.

여름해가 서켠[3]에 여울지며[4] 하늘이 유난스레 타올은다. 뭔가 비젼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게 824일이었다. 나는 기원(祈願)의 함을 만들고 거기에 남은 돈을 넣으며 무시로 기도했다. 어떤 때는 금식하고 식대(食代)를 거기 넣기도 했다.

하루에 식빵 두 갈피[5]에 냉수 한 잔, 그리고 스토익처럼 굶어도 봤다.

하루는 이노우에군이 와서 그 동안에 내가 끄적거린 소설(?)이랄까 수필이랄까를 읽고서 아오야마 학우회잡지에 내자고 한다. 나는 웃기지 말라면서 빼뜨려 오시이레(벽장) 속에 팽개쳤다.

 

겨울

스팀도 난로도 없는 다다미깐 기숙사는 춥다. 애기주먹만한 연탄 덩어리에 불을 달아 잿속에 묻은 작은 화로를 고다쯔라고 한다. 그걸 끼고 앉으면 좀 온기는 돌지만 가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밤에 이불 속에 넣어도 좀 덜 추운 대신에 아침부터 골치를 앓아야 한다.

나는 간다(神田) 고물점에 들렸다가 싸디싼 외투 하나를 샀다. 훨씬 도움이 됐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어떤 인연으로 어느 고학생 숙소에 들렸다가 그가 내복도 없이 여름학생복 속에서 떨고 있는 걸 보고 내 외투를 벗어 줬다. 그는 초면인 나를 놀란 낯으로 쳐다보다가 미안하다면서도 받아 입었다. 무사시노거센 바람을 안고 나는 귀로에 올랐다.

발길이 가볍고 춥지도 않다. 기분이 만점이다. 예수님이 축복하시나보다 하며 혼자 기뻐했다.

 

졸업반

 

졸업반이 됐다. 마감인데 좀 헐수도 해봐야 하지 않느냐? 하고 걱정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 때 일학년에 박원혁(朴元爀)[6] 씨라는 삼십 넘은 학생이 있었다. 깔끔한 신사였지만, 내게는 과분한 경의로 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독립운동의 하나였던 연통제[7] 사건으로 육개월 징역을 치르고 회령 스쿨톤 여선교사 어학선생 겸 비서로 일했었다. 일이년 후에 스쿨톤 양의 학비조달로 아오야마신학생이 된 것이다.

스쿨톤[8] 선교사는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으로 대학을 갖 졸업한 이십대 미녀였다. 학생기질이 남아 있고 선교사 냄새가 덜 난다는 것 때문에 젊은이들이 좋아했다.

나는 그녀를 만나본 적이 없지만 박원혁 씨 소개로 그는 나를 알게 됐다. 그는 내게 매달 식비 십육 원씩 보내준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심한 고생을 면했고 교회당 소제로 용돈을 얻는 것이었다. 스쿨톤 양과의 편지왕래는 한 달에 한두 번 늘 있었다.


[각주]

  1. 용처(用處) - 돈이나 물건 따위를 쓸 곳
  2.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3. 서켠 - ‘서쪽의 북한어
  4. 여울지다 천천히 타오르는 불길같이 일어나다
  5. 갈피 - 겹치거나 포갠 물건의 하나하나의 사이, 또는 그 틈
  6. 박원혁(朴元赫, 1893~1943) - 장로교 목사, 교육가, 독립운동가. 18931015일 함남 덕원군 적전면 당중리에서 출생. 관북의 모교회인 원산 창앞예배당(후의 광석동교회)의 초대교인이던 부모를 따라 어려서부터 신자가 되었다. 캐나다 선교부 경영의 원산 보광(保光)학교를 졸업한 뒤 원산 진성여학교, 회령 보흥여학교 교사를 역임하였고 31운동때에는 수차 만세 운동을 진두 지휘하다가 피검되기도 했다. 그해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관하에 조직된 연통제, 즉 국내의 통신연락과 군자금 모집의 주요임무를 띠고 조직된 비밀조직의 활동이 실시되었을 때 그는 윤태선(尹台善), 회령의 김인서(金麟瑞), 종성의 이상호(李相鎬)ㆍ노춘섭(盧春燮)ㆍ송권섭(宋權燮)ㆍ전재일(全在一)ㆍ송두헌(宋斗憲)ㆍ이운혁(李雲赫)ㆍ박관훈(朴寬勳) 등과 함께 함북지연 연통제 조직에 참여하였으나 그 기밀이 탄로되어 그를 비롯한 48인이 1229일 체포되었다. 재판과정에서 그는 일한 양국의 병합한 후 일본의 정책은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고 무리한 동화(同化)를 강제하야 우리의 문화를 박멸하려 하니 엇지 독립을 열망치 아니하겠소”(동아일보 1920.8.22.)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이 사건으로 그는 징역 26개월을 언도받았으나 실제로는 만 4년간 서대문ㆍ청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회령으로 가서 캐나다 선교부 여선교사 스크러튼(E. J. Scruton ; 서부인)의 어학선생 겸 비서로 있다가 그의 추천으로 1926년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여 송창근ㆍ김재준 등 관북 출신 학우들과 교우했다. 29년 졸업후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학교 성경교사로 부임하였으며 356월 목사안수를 받고 교목으로 부임하여 39년 폐결핵으로 퇴임하기까지 만 10년간을 영생여학교에서 봉직하였다. 퇴임후 요양하던 중 43510일 별세하였다.
  7. 연통제(聯通制)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국내와의 연계 활동을 위해 운용한 제도이다. 함경북도에서 가장 먼저 시행되었는데, 192011, 일제에 발각되어 관련자 57명이 모두 재판에 회부되면서 좌절된다. 당시 언론은 이를 연통제 공판또는 연통제 사건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하였다.
  8. 캐나다 선교부 여선교사 스크러튼(E. J. Scruton ; 서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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