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31) 동경 3년 - 스쿨톤 선교사와 순회전도

스쿨톤 선교사와 순회전도

 

졸업반 때, 하기방학이 되자, 나도 한번 귀국한다고 맘먹었다. 삼년 만이다.

서울은 추억의 본고장이다. 창경원, 남산, 장충동, 혜화동 등을 혼자 거닐었다. 묘동교회 전필순[1], 최석주[2] 두 목사가 나에게 강연(?)을 청하기에 얼빠진 민족이란 제목으로 연설했다. 싫은 소리를 뇌까린 셈이다. 내게 세례 베푸신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님을 예방, 그리고 원산엘 갔다. 마침 여름 휴가로 명사십리에 와 있는 회령 스쿨톤 양을 방문하고 함흥에서 서고도(스캍)[3] 목사, 박원혁 씨, 그리고 회령읍에 들렀다.

그 동안에 스쿨톤 선교사는 돌아와 담당 선교 구역을 순회할 일정을 짰다. 나도 그의 일행에 끼어들었다.

 

먼 후일에 서울 새문안교회[4] 목사로 있다가 625때 납북된 김영주[5] 씨가 스쿨톤의 조사였다. 우리 일행은 회령읍에서 시작하여 고령, 상삼봉, 종성, 온성, 경원, 신건원, 신아산, 아오지, 경흥, 웅상, 웅기 등 두만강 유역을 모조리 심방할 예정이었다. 모두 도보 여행이고 스쿨톤 양은 우차에 자기 소지품과 자기 몸을 싣고 간다. 간 데마다 밤에는 특별 전도 집회를 열고 김영주가 설교하고 내가 강연하고 스쿨톤은 여신도들과 여전도사들 하소연을 듣고 목회상담을 하곤 했다.

 

김영주 씨와 나는 곧잘 딴 길로 탈출하여 역사의 유적과 명승지를 순례하기도 했다. 두만강이 바로 절벽을 핥으며 용솟음쳐 달린다. 그 절벽 위에 용당(龍塘)이라는 산성이 있다. 길이 외고 가파러워 오르기 힘들었지만 우리는 단행했다. 성도 남아 있었지만 둘러막은 산봉우리들이 자연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이성계의 할아버지께서 여진과 대결하여 이 요새를 지켰다고 한다. 이성계와 퉁두란(李之蘭)[6]이 이쪽 저쪽 봉우리 위에서 맞서 활을 쏘면 화살이 공중에서 맞부딪쳐 떨어졌다고 지키는 노인이 말했다.

그 밖에도 종성읍의 수항루를 비롯하여 여기저기 비각들 - 효자묘, 열녀당, 유허비, 숭전비 등등을 순방했다. 그러는 동안 스쿨톤 양은 그 지방 순회전도사와 함께 주막집이나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기분이 좋았을 리 없다.

우리가 순방하는 교회래야 미조직 기도처 정도요, 한 두 사람 신자나 가정이 치벽한[7] 산골 외딴 농촌, 길가 주막집 등에 끼어 꺼지는 등불같이 깜박이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빛임에는 틀림없었다. 오십대 순회 전도사 할머니가 수십 리 구역을 혼자 돌며 예배를 인도한다고 했다. 바울의 전도여행도 이와 비슷했을 것 같았다.


[각주]

  1. 전필순(全弼淳, 1897~1977) - 장로교 목사, 총회장. 호는 일우(一愚). 189747일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석천리의 농가에서 출생.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장평리교회 교인 심문택이 설립한 봉양학교를 1912년에 졸업하였고 실업학교에 진학하여 1년간 잠업, 축산 등을 배웠다. 당시 연동교회에서 원세성, 박용희 등이 장평리에 내려와 농촌전도를 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 친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4년 세례를 받았다. 1917년 서울 YMCA소년부 간사로 임명되었고 19191월 원세성의 추천으로 연동교회 조사로 부임하게 되어 목회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31운동 후에 독립운동을 추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5월 석방되었다.
    1922년 일본에 유학, 코오베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해 4월 연동교회 조사로 취임하였다. 그는 그해 9월 연동교회 당회의 결의에 따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1개월간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가 평양에 가 있는 동안연동교회 안에서는 그의 동사목사 부임을 경계하는 당시 당회장 이명혁 목사와 장로들 사이에 의견충돌이 생기게 되자 결국 그는 연동교회가 아닌 묘동교회 조사로 부임하였고, 19276월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묘동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했다. 1927년 일본에서 종교단체 법안을 초안해서 국회에 제출하게 되자국내 교회에도 이의 영향이 클 것임을 감안, 그 대책을 강구하게 되자 그는 총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대표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문부성을 상대로 반대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31년 묘동교회를 최석주 목사에게 인계하고 <기독신보> 기자로 새출발하였고 선교사들이 <기독신보>를 한국측에 양도하게 되자 그는 개인자격으로 이를 양도받아 발행인(사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치호, 정인과, 양주삼, 유억겸, 백낙준, 밀러(閔休) 등과 마찰을 일으켜 예수교서회(현 기독교서회) 건물을 떠나 운영하게 되었고 결국은 재정난으로 1937년에 이르러 폐간되고 말았다. 한편 1935년에는 승동교회에서 분립한 수송교회를 담임하게 되었고 19414월 그의 세 번째 부임지인 연동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종교탄압 속에 일제의 강압에 끌려 1942년 종교지도자의 영ㆍ미타도좌담회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434월에는 감리교측과 손을 잡고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을 조직, 그 통리가 되기도 하였다.
    해방후 연동교회 당회에 사직원을 내었으나 반려되었고 19493월에는 반민법위반혐의로 마포형무소에서 30일간 구금되었다고 불구속으로 풀려났다. 625사변 중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수복후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는 한편 1957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WCCNAE 대립으로 장로회가 분열되었을 때 증경총회장이던 그는 연동교회에서 총회속개준비회를 주재하였고 이로써 WCC중심의 연동측장로회가 탄생했으며 이것이 오늘의 예장 통합측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양측 합동을 위해 합동위원으로 활약하였으나 합동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두 개의 별개교단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19616월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목회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 정식은퇴하게 되었다.
    기독교연합운동에도 크게 활약하였고, 1977214일 서울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1928년 결혼한 부인 차사백(車士伯, 중앙유치원 사범학교 설립자) 권사와의 사이에 외아들 우용(雨用)이 있다.
  2. 최석주(崔錫柱, 1901~1989) - 서울 출생. 1914년 서울 의법학교를 졸업하고 배재학당을 1년 다니다 중퇴한 후 중앙기독교 청년회학관 중학과에 진학했다가 1916년 폐교되면서 학업을 중단하였다. 1921년 일본에 유학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1927년 졸업하였고 돌아와 묘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1931년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33<기독신보> 편집국장에 부임, 2년간 활약한 후 1935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간다(神田) 한인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는 한편 <진생>(眞生), <복음운동>(福音運動) 잡지 편집에 종사하였다. 1942년 귀국하여 수송교회, 동막교회 등지에서 목회하였고 기독교서회 편집 책임을 맡기도 했다. 해방 후 동막교회, 만포교회 등지에서 목회하였고 은퇴하여 미국에 거주하였다.
  3. 윌리엄 스코트(William Scott, 1886~1979) - 캐나다연합장로교 한국선교사. 한국명 서고도. 스코틀랜드에서 출생. 20(1906) 때 캐나다로 이주하였으며 이때부터 캐나다장로교의 선교사가 되기 위한 의지를 굳히며 공부를 시작, 1911년 퀸즈대학교에서 영문학 및 정치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1914년 뱅쿠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그해 12월 한국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그런데 그는 선교사가 되기 이전에 이미 캐나다 서남부의 브리티쉬 컬럼비아에 있는 벌목 캠프의 인디언 부두노동자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는 한편, 안식년을 맞아 대만으로부터 귀국한 선교사 맥라우드와의 만남에서 크게 느낀바 있어 선교열에 불붙기 시작했다. 처음에 인도선교사를 자원하였으나 당시 인도에 아직 해외선교부가 결성되지 않았으므로 같은 아시아권인 한국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어수선한 때(1914.8)에 일본 코오베를 거쳐 11월에 부산항에 도착, 원산 및 함흥에 임시 부임하였다가 곧 함북 성진지방 선교사로 배정되었다. 1922년에는 간도 용정지방 은진중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고 김약연 장로(당시 명동학교 교장) 등과 함께 전도사업에도 힘쓰다가 1925년 다시 함북 함흥지방으로 전임, 이곳 영생학교 교장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봉직중인 1932년에 이 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켰으며 목자로서 또 교육자로서의 겸직된 사명을 훌륭히 수행하여 1935년 한국정부(총독부)로부터 교육공로 표창을 받는 등 그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일제의 박해가 가속화되어 그는 6개월간 자택에 연금당하기도 하였으며 1942년 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1943년 그는 뱅쿠버의 연합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46년 다른 한국선교사들과 함께 다시 내한, 여선교사 샌들과 함께 거제도에 있는 응급병원을 감독하였으며 625사변 전후에는 피난민 구제사업, 성서공회 협동총무, 서울 연합교회 목사 등을 역임하는 한편 한국신학대학에서 구약신학 및 교회사 교수(1946-56)로 전심전력하였다.
    특히 1951년 예장과 기장으로 교단이 분립될 당시에는 제37회 예장 총회에서 김재준 박사와 함께 제명처분당한 바 있으며 1926년부터 그는 이미 함흥에서 열린 성경학교 학생들을 위한 사경회에서 공개적으로 성서비평학을 강의하였다.
    1956년 그는 한국선교사업 40년만에 은퇴하여 귀국, 브랜드포드에서 거주하던 중 19698, 결혼 56년만에 그의 아내를 여의고 그는 1979년에 별세하였다. 그는 한국 해방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여명의 아름다운 땅 코리아
    우리의 사랑하는 땅 한국 만세
    부끄러운 멍에와 채찍을 벗어났으니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산들의 나라, 바다의 나라,
    영광의 희망을 품고 일어났다.
    우리 조상의 땅, 흙덩이마다 귀여워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동산 코리아!
  4. 새문안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서울노회 소속. 한국 최초로 설립된 장로교회. 새문안교회는 그 초창기에 정동(貞洞)교회, 혹은 서대문(西大門)교회라고도 불려졌다. 위치는 광화문 서편 돈의문(敦義門) 곧 새문(新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새문안(新門內)이라 불려지게 된 것이다. 사경회도 한국에서 새문안교회가 처음으로 시도하였다(1890). 190410월 송순명의 장로 장립으로 당회를 조직하면서 한 전환기를 이룩하였다.
    1910921일 서상륜의 실제(實弟) 서경조가 독노회의 파송을 받아 새문안교회 한인 목사로서는 최초의 목회자로 부임하였다. 직책은 전임이 아니라 전도목사 자격이었다. 그가 언더우드와 동사목사로 부임한 것은 19119월의 일이다.
    19118월 당회는 평북 선천에서 남조사 한 사람을 초빙하기로 하고 차재명을 교섭해서 그해 10월에 부임하게 하였다. 하필 평북인사를 지정해서 초청한 까닭은 새문안이 그 이후의 역사에서 입증하였듯이 소재는 서울이지만 항상 신앙적으로는 서북 유형에 연락되고, 또 교회 행정상으로도 서북 계열과 항상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간혹 기호교회들, 특히 시내교회들과의 관계가 불화했던 일이 많았다. 차재명 목사가 이 새문안의 시무 목사로 부임한 것은 192012월의 일이다. 19418월에는 차재명 목사가 외형상으로는 경성노회장의 지시에 의해서 교회를 사면해야 했다. 소위 일제 국가의식의 불철저의 책임때문이었다. 그래서 박화선 목사가 194112월부터 시무하게 되었다. 김영주 목사는 19441월부터 시무하였는데 그는 구약의 모세오경 저작문제로 신신학을 발설하고 조선신학교의 창설에도 간여했던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김영주 목사가 납북된 이후, 교회는 강태국, 최화정 목사들의 목회로 부흥되어 갔으며, 마침내 195512월부터 강신명 목사를 초빙하여 장족의 발전을 기할 수 있었다. 강신명 목사는 19815월에 사임했고 이후 김동익, 이수영 목사를 거쳐 현재 이상학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다.
  5. 김영주(金英珠, 1896~1950) - 일제강점기 서울 남대문교회, 새문안교회에서 목회한 목사. 호는 해암(海巖). 일본의 간사이(關西)학원 신학교를 졸업(1932)하고 남대문교회를 시무하던 중 창세기 저자 문제로 제23회 총회에서 문제가 되어 해명하었다. 1939년 조선신학원 설립기성회에 가담하였으며, 1943년 일제의 어용기구 조선혁신교단을 반대하여 전필순을 사임케 하여 혁신교단을 와해시키는 일에 공을 세웠다. 1944년 새문안교회에 부임한 후 남부대회를 소집하려고 노력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시대에 서울시 행정의 고문격인 참사(參事)로 있다가 1950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6. 퉁두란(이지란, 1331~1402) 여진족 출신이며 고려 말 조선 초의 무관이다. 조선왕조 개창자인 이성계와는 의형제였다고 한다.
  7. 치벽하다 - 외진곳에 치우쳐서 구석지다(북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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