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40) 미국 3년 - 미국행 여권 나오고

미국행 여권 나오고

 

송창근 형은 미국가 있었다. 그는 나더러 졸업하거든 곧장 미국 오라고 했다. 그때 그는 프린스턴에 있으면서 내게 입학허가증과 일년 200불 스칼라쉽 허락서를 보내왔다. 이것으로 여권수속을 진행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수속을 위해 동경을 떠나 서울로 갔다.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님 사택 객실에 유숙했다.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에게 서류를 보이고 여권절차를 물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서류의 미비된 부분을 고치고 다시 쓰고 했다. 그리고 여비와 학비 보증인 두 분의 보증서와 그들의 납세증명서를 첨부하라 했다.

납세액은 재산 정도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승동교회 김대현[1] 장로님과 이재향[2] 목사님의 재정보증서와 여타 수속을 갖추어 제출했다. 그래서 여권신청은 무난히 접수됐다.

 

이제 신분조사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서울만이 아니라 본적지 경찰의 신분조서가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종로경찰서 조선인 형사가 와서 죄인심문 하듯이 별걸 다 물었다. 권위과시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 달쯤 지났다. 그때 나는 승동교회 목사관에서 피어선 성경학교[3] 기숙사로 숙소를 옮긴 무렵이었다. 어느 날 밤, 그 형사가 내 방에 찾아왔다. 다짜고짜로 당신 미국은 다 갔소. 주소를 옮기고서 보고도 안하는 무성의한 사람이 미국엘 가요?하며 투덜댄다. 그러다가 어쨌든, 내일 들어오시오!하고 나갔다.

이튿날 나는 고등계에 갔다. 일본인 주임이 무척 반갑게 맞이한다. 그 형사도 저쪽 아랫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임은 그 형사에게 조서를 잘 써 오라!고 명령조로 부탁한다. 본적지 경찰에서 조서가 왔다면서 보여준다. 겉으로는 온순한 척 하면서 속은 다소 음험하다……』고 쓰여 있었다. 그 녀석이 보긴 잘 봤다고 생각했다. 고등계 주임은 곧 여권이 나올테니 통지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통털어 두 달 만에 여권이 나왔다. 일본 총리대신 겸 외무대신 다나까(田中義一卽) 이름으로 발급된 것이었다.


[각주]

  1. 김대현(金大鉉, 1873~1940) - 장로. 교육자. 187357일 경북 영일군 흥해(興海)면에서 출생. 유교가정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흥해 지역의 교육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후에 서울로 이주하여 동대문구의 창신교회에 출석하다가 승동교회에 적을 두게 되었으며 1923년 장로로 장립되었다. 그후 19393, 조선신학교설립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거액의 재산을 기부하기로 약속하여, 그 일을 가능케 했다. 그는 부동산 소개업을 통하여 얻은 수입의 십일조를 별도로 저축하고, 그 통장의 저축인 이름을 김필헌(金必獻)이라고 명명했다. 그 이유는 그 저금통장의 돈은 반드시 하나님께 바친다는 약속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전에도 이미 여러 개척교회들의 전도비를 헌금으로 보조하기도 했는데 그가 조선신학교 설립재단과 운영비를 위하여 바친 액수는 그 당시 일화로 30만엔(미화 25만불)이었다. 당시 교회 내적으로는 조선신학원 설립이 외래 선교사들에 대한 반역이며, 심지어는 신앙적 배교행위라고까지 생각하는 목사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조선신학원 폐쇄를 희망한 일부 교계지도자들의 요청을 들어 일본관헌은 김대현 장로에게 강요하여 조선신학원 경영에서 손을 떼도록 압력을 가했고, 해마다 갱신해야 하는 경기도지사의 인가를 받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억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그가 숙환으로 1940915일 별세할 때까지 신학원을 지켰다. 바로 이 무렵 서울시 일대에 걸쳐 교계인사들을 일경이 연행해 가던 때였는데 김대현 장로 사택에 일경이 수색하러 왔다가 그가 별세한 것을 알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함태영ㆍ송창근ㆍ김재준 등의 신학교육사업의 이상에 적극 호응하여 그의 재산을 희사하고 그리고 친히 신학원을 경영하였다. 그의 이러한 의지와 행동은 비록 평신도였지만 한국교회 신학교육의 새로운 발전에 대한 강한 신념의 표현이었다.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선산에 모셨으나, 한신대학교 측이 서울캠퍼스 교정에 모시겠다고 요청하여 2003429일 서울캠퍼스 교정으로 이장하고 추모예배를 드렸다.
  2. 김재준 목사는 이재향이라고 언급했지만, ‘이재형이 맞다.
    이재형(李載馨, 1871~1949) - 장로교 목사. 초명은 재남(再南). 18711216일 출생. 생부(生父)는 이필웅(李必雄)이었으나 14세 때 경평군(慶平君) 이세보(李世輔)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선조(宣祖)3남 의안군의 9대손인 경평군은 벼슬이 정1품 현록대부에 이르렀고 안동김씨 세도에 밀려 전라도 신지도에서 3(1960-63)동안 유배 생활을 겪은 학자이자 시조시인이었다. 이같이 왕가를 배경으로 출생하여 궁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26세 때에는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의 관직은 세마직과 풍기군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을사보호조약(1905) 이후 일정한 직업없이 방황하던 중에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다. 1907년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이해는 평양대부흥이 일어난 해이고 서울에서는 이상재, 이원긍, 박승봉, 김정식, 유성준, 윤치호 등 소위 양반계층이 일거 기독교에 입신하던 그 무렵이었다. 이들 양반들의 기독교 입신이 그의 기독교 입신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로써 승동교회 교인이 되었고 1914년에는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14년에는 조사가 되어 경기도 지방 교역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11) 하였다. 졸업한 후에 경충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양평읍, 고읍, 상심리, 묘곡 등 4처교회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그해 12월 경충노회 노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장로들과의 관계가 원활치 못해 고심하던 중 1921년 사임하고 말았다. 1922년 하교교회에 부임하였고 1924년에는 승동교회에 부임하여 김영구 목사와 동사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러나 김영구 목사가 1928년 별세하고 후임으로 박용희 목사가 동사목사로 부임하여 시무하면서부터 이재형 목사와의 사이가 껄끄러워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노회와 총회 정치문제로까지 비화하여 193311월 경성노회는 이재형, 박용희 양인을 성경에 위반됨과 덕을 세움에 부족함으로 1년간 목사 시무정지를 명하였다. 이로써 이재형은 일선 목회를 떠나 인사동 집에 칩거하였다. 그러나 194989일 별세하기 직전 박용희 목사를 불러 화해를 청하고 자신의 장례식 주례를 부탁하였다.
    비록 목회자로는 성공하지 목했으나 왕손으로 기독교 목사가 되어 사회의 주목을 받았으며 평생을 무보수로 목회하였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학생들을 후원하는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덕흥 목사가 그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하였고 김재준 목사도 미국 유학할 때 재정보증인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快莫快於與人 憫莫憫於乞人”(남에게 주면서 사는 것처럼 통쾌한 일이 어디 있으며 남에게 받으며 사는 것처럼 불쌍한 일이 어디 있으랴?)의 정신으로 평생을 살았다.
  3. 피어선신학교(皮漁善神學校, The Pierson Theological College) - 19121015일 서울에서 개교하여 설립된 초교파 신학교육기관. 학생 모집은 19119월부터 시작되었으나 정식 학교로서의 개교는 1912년에 이루어졌다. 이 학교가 설립되기에는 미국의 저명한 신앙운동가 2명의 공이 컸다. 한 사람은 학교 명칭의 근원이 된 피어슨(A. T. Pierson)이며 다른 한 사람은 학교 설립의 계획과 실무를 전담한 화이트(W. W. White)이다. 피어슨은 191012월 중국을 거쳐 내한하여 선교상황을 돌아보았으며 이듬해 일본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그해(1911) 63일 사망하였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재산을 한국의 성서학원 설립에 기증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유족은 그의 재산을 처분하여 교사 대지 및 건축기금으로 보냈으며 이에 따라 1913년부터 그의 이름을 따서 피어선기념성경학원(Pierson Memorial Bible School)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피어슨 유족들은 학교 발전에 관심을 두고 수차에 걸쳐 헌금을 보내왔다.
    19121015일 정식 개교될 때엔 3개 과정에 240명이 등록되었다. 1913년 정식으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으로 명칭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연합성경학원(Union Bible Institute 혹은 Bible Teacher’s Training School)으로 불렸다.

댓글 1개:

  1. ㅅ이덕흥 목사님의 맹아학교와 승동교회 활동 정보있으면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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