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41) 미국 3년 - 여비는?

여비는?

 

이제 남은 문제는 여비다. 우선 집에 가 본다고 함경선을 탔다. 아오지까지 직행이다. 아버지와 형님과 여권을 보여드리고 여비 마련을 의논했다. 형님은 미루밭을 팔아 보태자고 했다. 아버님은 반대였다. 형님은 그 밭을 저당하고 아오지 금융조합에서 오십 원을 꺼내왔다. 교회 측에서는 냉담했다. 선교사 추천생도 아니고 정식 장학생도 아닌 개인행동인데 교회에서 알게 뭐냐는 쪼였다.

장마철이라 간 데마다 홍수였다. 나는 가는 길에 주을 온천에 들렸다. 함북노회 수양회가 거기 모여 있었다. 김준성[1] 씨가 강사였다. 나는 온천 욕탕에서 피로를 풀고 여관 구석방에서 잤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같이 떠났다. 떠날 때 잘가라는 인사도 받은 기억이 없다.

함흥 김동명 씨 집에 들러 며칠 유숙했다. 수백 평 넓은 정원에 나무와 꽃이 에덴같이 꾸며져 있었다. 시인의 미학(美學)이 생동한다. 나는 그의 큼직한 숫케이스를 빼뜨리다시피 얻어갔고 떠났다.

서울에 왔다. 윤치호[2] 선생을 찾아갔다. 그 분이 미국 유학생에게 태평양을 건네주신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특권은 과학연구와 신학연구에 국한돼 있었다. 나는 신학이라 신청권은 있다고 믿었다. 나는 사연을 여쭙고 면회를 청했다. 견지동 고가(古家)에 계셨다.

좁은 사닥다리를 올라 사람 셋이 앉으면 배꾹 찰 정도의 작은 공간에 안내되었다. 조금 후에 윤 선생이 나오셨다. 그는 언제나 한복이었고 성긴 턱수염이 길게 나부끼는 청초한 풍모였다. 태도가 소탈하고 평민적이었다.

무슨 공부할 건가?

신학입니다.

어느 신학교?

프린스톤에 입학돼 있습니다.

그럼 가서 공부 잘하게!

감사합니다. 무슨 일러주실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잠시 후에 그는 말씀하셨다.

미국 한인사회란 좀 복잡하고 갈래도 많은데 서로 자기편에 끌려고 할 걸세. 내 생각으로는 아무 그룹에도 들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으네!하셨다.

잘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일어서며 같이 나가자고 하신다. 따라 나섰다. 그는 한일은행이던가, 하여튼 은행에 친히 가셔서 돈을 찾아 백 원을 내 손에 넘겨주셨다. 태평양 건널 여비다.[3]


[각주]

  1. 김준성(金俊星, 1898~1978) - 장로교ㆍ목사ㆍ교육가ㆍ사회운동가. 함남 단천에서 출생. 10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대학에 재학중 1926년 재일한국 YMCA 부총무로 활약했다. 귀국 후 28년 원산 YMCA 총무로 임명되는 동시에 3년제 남자중학교를 설립했다. 이것이 곧 원산기독교청년회학관인데 가난한 기독교가정 청소년들과 그리고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을 모아 교육을 했으며, 덴마크식 협동조합도 설치하여 농민들의 권익향상에도 힘썼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원산에서는 기독교청년회학관 학생들이 선두지휘를 했으며, 1931년 함흥 영생중학교의 교사겸 학생감으로 부임하여 학생운동을 크게 전개시켰다. 그후 북간도의 용정 은진(恩眞)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했으나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어서 1935년 캐나다로 출국, 거기서 신학을 전공했다. 그뒤 목사안수를 받고 John Star Kim이란 이름으로 미국 뉴욕 등지에서 문서선교에 힘쓰다가 귀국하지 못한 채 1978928일 뉴욕에서 별세하였다.
  2. 윤치호(尹致昊, 1866~1945) -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5촌 당숙이다.
  3. 김재준이 도미할 당시 신한민보(1928104)에 기사로 실렸다. 고지수, 김재준과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기원, 도서출판선인, 2016,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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