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42) 미국 3년 - 태평양 열 나흘

태평양 열 나흘

 

태평양 건널 여비가 됐으니 다음은 또 그 때 볼 셈치고 곧 떠나 동경서 Y의 최승만[1] 총무를 만나고 요꼬하마에서 미국 딸라기선회사』 『프레지던트 맥킨레호를 탔다. 요꼬하마부두에는 최승만 한 분이 나오셨다. 악대가 울리고 배가 움직인다. 가는 손, 보내는 손에 쥐었던 인연의 오색 테프가 끊어지고 낯들도 아물아물[2] 보이지 않는다. 아까 하직한 언덕은 바다 저켠에 숨는다. 인생일막극이다. 죽어 떠나는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과의 영결 같기도 했다. 푸른 바다 - 대야의 물같이 동그란 바다 - 열흘 동안 그 밖에 볼 것 없는 단조의 원색, 제비 떼같이 날다가 떨어지는 비어(飛魚)의 집단 그러나 대양의 한 점 육지()에서도 인간 비극은 끈덕지다. 집단 징집(?) 돼 가는 필리핀 노동자들께 전염성 뇌염이 퍼졌다. 하루에도 몇 사람씩 미지의 세계로』 『이민간다. 배 고동이 울리고 엔진이 멈춰지고 서장과 신부가 갑판 뒷꽁무니에 나섰다. 인부가 거적대기로 덮은 시체를 가져온다. 신부의 간단한 주문, 그리고 시체는 바다에 던져진다. 배 고동이 울리고 배는 간다. 그 시간이 길어야 3(?) 무던히 짧은 장례식이다. 아마도 이 수장(水葬)은 순식간에 어복장(魚腹葬)으로 될 것이다.

 

열흘 만에 하와이에 닿았다. 태평양은 진짜 태평의 바다였다. 열흘이 하루같이 조용만 했다. 한국 사람은 나 하나뿐. 선실 책임자는 한 사람을 위해 코레앤캐빈을 따로 낼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면 어쩌라는 거냐고 물었더니 필리피노실, 차이니스실, 째패니스실 셋 중에 하나 골라 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서 다시, 참고로 말한다면서, 필리피노는 떠들고 차이니스는 마짱노름 때문에 잘 수가 없으니 아마도 째패니스실이 나을 것 같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일본인은 약 50명 있었다. 선창 밑바닥에 짐처럼 실려 있다. 모두 일시 귀국했다가 재입국하는 노동자였다. 내가 프린스톤 가는 학생이라니까 모두 놀라는 모양, 에라이 데스나!(훌륭하십니다), 이분은 장차 프로페서 될 분이시다!하기도 한다. 말이 통하니 심심찮았다. 모두 전엣 직장에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직장 주인에게 영어로 부탁편지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프로페서별명까지 얻어 놓고서 그만한 편지도 못 쓴달 수 없고 그래서 엉터리 영어편지를 부탁대로 다 써주었다. 그들은 하와이에서 모두 일시 상륙이 허락됐다. 그러나 나는 상륙 못한다는 것이다. Y총무라고 들은 민○○ 씨에게 미리 연락했었는데 딴 분이 배에 찾아왔다. 한국 학생을 찾기에 만났다. 왜 연락을 안했느냐?고 나무람 쪼다. ○○ 씨에게 연락했다니까 갑자기 불쾌한 안색, 그런 사람에게 연락했으니 될게 뭐냐?는 것이었다. 나는 하하 무슨 파벌 싱갱이[3]구나!생각하여 더 말하지 않았다. 그도 선장을 찾아 나의 일시 상륙을 교섭했지만 잘 안된다고 했다. 얼마 이야기하다 내려갔다. 상항[4]에 있는 백일규[5] 씨에게 연락했다.

일시 상륙했던 일본 노동자들이 시간맞춰 다시 배에 올랐다. 혼자 내려서 미안하다면서 바나나, 망고, 파인에플 등등을 제각기 사들고 와서 나를 위로한다.

하와이를 떠나 나흘 만에 상항에 닿았다. 백일규 선생이 배에 올라 기다리고 계셨다. 프린스톤까지 갈 여비를 갖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50불정도 남았습니다고 했다. 무모한 일을 했군!하시고서 그 돈을 내게 주고 이민관이 묻거든 얼백에게 내줬다고만 하시오한다. 그리했다. 나는 상륙하는 줄 알았었는데 똑딱선에 태워 천사도라는 고도에 실어간다.


[각주]

  1. 최승만(崔承萬, 1897~1984) - 기독교인 민족운동가, 청년운동가, 교육가. 호는 극웅(極熊). 1897116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에서 최문현의 장남으로 출생.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12년 서울 장훈학교, 1915년 보성중학교, 1916년 중앙 YMCA 영어과를 각각 졸업하였으며 1917년 일본 토오쿄오 관립외국어학교(노어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등 토오쿄오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학우회에 참여하여 19185월부터는 최팔용을 도와 학우회 기관잡지인 <학지광>의 편집위원이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역시 유학생 문예잡지인 <창조>(創造)의 동인이 되어 민족 및 문학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 유학생 단체는 점차 민족독립운동에로 방향을 잡아갔으며 그는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19191월 학교를 중퇴하고 28독립선언에 적극 가담하였다. 28일 토오쿄오 한국 YMCA회관에서 1차 독립선언서 낭독 및 만세시위가 있은 후 1차로 주모자 최팔용, 김도연, 백광수 등 9명이 체포된 후 제2차 운동의 책임을 맡게 된 그는 YMCA 2층 자신의 방에서 4-5일 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전 유학생대회를 열고 항일연설회를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즉석에서 변희용, 장인환, 강완섭, 최재형 등과 함께 반일선언문에 서명하고 준비하던 중 이 사실을 밀고되어 그를 비롯한 서명자들이 체포되었다. 40일만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일경의 삼엄한 감시에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고국에서 들려오는 만세시위 소식을 상해 및 미국에 전달하는 임무를 은밀히 수행하였다. 19225월 토오쿄요 조선기독교청년회 기관지인 <현대>(現代)의 편집 주간이 되면서 문필활동을 재개하였고 1923년 토오데이(東洋)대학 인도논리철학과를 졸업하였다. 그해 토오쿄오 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로 피선되어 1934년까지 봉직했다. 그동안 193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대학을 졸업하였고 그해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기관지인 <청년>(靑年)의 편집 주간이 되었다. 1934년 귀국하여 동아일보사 잡지부장에 임명되어 <신동아>(新東亞) 편집주간으로 봉직하다가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해방전까지는 만주 봉천에 있는 삼창교피공창 및 경성중앙상공주식회사, 경성방직주식회사에서 근무하였다.
    해방후 미군정청 문교부 교화국장을 역임하였고 19489월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 1952년까지 봉직하였다. 625사변 중 제주도에 피난하여 사회부 제주도분실장에 취임하여 피난민구제사업을 지휘하였고 19518월에 제주도 지사가 되었으며 19528월 제주대학 초대학장이 되었다. 1953년 제주도지사 및 제주대학 학장직을 사임하고 서울에 올라와 19542월 이화학당 이사장이 되었으며 그해 4월 연희대학교 강사, 10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겸 부총장에 취임하였다. 1956년 인하공과대학 학장에 취임하여 1961516혁명이 일어나기까지 봉직했다. 1962년 대한소년단 부총재, 중앙여자중ㆍ고등학교 이사, 1963년 성균관대학교 감사를 역임하였고 1966-67년 재일본 한국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2. 아물아물 - 작은 것이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자꾸 조금씩 움직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3. 싱갱이 - ‘승강이’(서로 자기주장을 고집하여 옥신각신하며 다툼)의 북한어
  4. 상항(桑港) - ‘샌프란시스코의 음역어
  5. 백일규(白一圭, 1880~1962) -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언론인. 호는 약산. 1905년 하와이로 이민 그 다음해 미국 본토로 가서 공부하였다. 1908년 전명운ㆍ장인환 의사의 후원회장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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