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44) 미국 3년 - 상륙과 대륙횡단

상륙과 대륙횡단

 

똑딱선은 부두까지 갔다. 이제는 상륙일 것으로 믿어진다. 듣건데 이등 손님도 수용소 감금은 안 당한다는 데 삼등이 란다. 부두 세관에는 백일규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관원이 숫케이스를 뒤적거렸지만 과세할 아무 것도 없었다. 백일규 선생은 버클레 양주원 씨 카피테리아 옆, 제일 싼 여관 지붕방(?)에 내 잘자리를 마련했다. 음식은 양주원 씨네게서 먹으라 한다.

나흘인가 그렇게 지냈다. 양주원 선생은 상항구경도 시켜주셨다. 그동안 백일규 선생은 교포들에게서 오불, 십불씩 거금해서 백불가량 만드셨다. 그는 곧 대륙횡단 급행열차표를 샀다. 양주원 선생은 기차 안에서 먹을 샌드위치, 삶은 계란 등을 한 자루 만들어 주신다. 물 먹을 것도 일전 넣어야 종이컵이 나오는데 그럴 필요 없다면서 알미늄 잔을 자루에 넣으신다.

상항에서 프린스톤까지의 차비는 송창근 형이 여름방학에 벌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백일규 선생이 꾸신 돈은 송 형의 송금으로 얼마 후에 다 갚았다.

대륙횡단 푸륫 엑스프레스는 거의 무정거로 밤낮 나흘을 달린다. 나는 의자에 앉은 대로 가기만 한다. 딴 승객은 거의 없다. 나는 앞뒤 의자를 마주 제처 침대 비슷한 공간을 만들고 피곤하면 다리 뻗고 잔다.

기차는 사막을 달린다. 솔틀레익(Salt Lake)의 호수 허리도 끊어 건넌다.

시카고에서 필라델피아행을 갈아타고 필라델피아에서 꼬마 기차로 트렌트에 다시 프린스톤에 닿았다. 밤이었다. 김성락[1], 한경직[2] 두 분이 역까지 마중나와 반겼다.


[각주]

  1. 김성락(金聖樂, 1904~1989) - 장로교 목사. 교육가. 신학자. 평남 평양에서 김선두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1924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수료(21)했다. 그동안 평양 숭의여자중학교 교원에 재직한 바 있는 그는 1927년 미국에 유학하여 미주리주 파크빌에 있는 파크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8년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신학원을 수료했다. 이어 예일대학에서 수학하고 1930년에 텍사스의 달라스복음신학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 그리고 1931년 켄터키주 루이스빌신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귀국 후 평양신학교 교수, 평양 신암(新岩)교회 목사 그리고 숭실대학 교목과 교수로 봉직했다. 1937년에 다시 도미한 그는 로스앤젤레스교회(예장)에 부임하여 20여년간 담임하였다. 그동안 1944년 사우스 캐롤라이나대학교 강사와 1957년 미국주재 한국인교회연합회장직을 역임했으며 1958년 귀국하여 숭실대학장으로 봉직했다. 1981년과 1982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에게 북한에 교회를 세울 것을 권고하였다. 1980년대 김일성은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김성락 목사와 평양 숭실학교 동문이라는 점에서 그를 자주 초청했었다고 한다.
  2. 한경직(韓景職, 1902-2000) - 장로교 목사, 교육가, 육영사업가. 19021229() 평남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한도풍의 장남으로 출생. 1912년 향리의 자작교회에서 설립한 진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과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는데, 어린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는 6촌간이며 초기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이었던 한병직 목사, 진광학교 교사인 홍기두 선생(평양 대성학교 출신), 교회 전도사 우용진 등이 있었다. 1914년 진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김찬빈(1899-1974)과 결혼하였다. 1917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승훈, 조만식 등에게서 민족주의적 교육을 받았으며 1922년 숭실대학에 진학하여 자연과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숭실대학 재학중 블레어(W. Blair, 邦偉良) 선교사의 비서로 일하면서 공부하였는데 1924년 여름 블레어와 함께 황해도 구미포 해변가에 갔다가 목회자로 헌신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블레어와 윤치호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캔자스주에 있는 엠포리아대학에서 1년간 인문과학을 수학하였다. 1926년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신학교로 진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았는데 그가 프린스턴에 갔을 때 박형룡, 최윤관, 백낙준이 졸업하였고 그는 최윤관, 김성락, 보켈(H. Voelkel), 윤하영, 이규옹, 김재준, 송창근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는 프린스턴 재학중 신학노선의 차이로 신학교가 분열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1929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계속하려 했으나 폐결핵이 발병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뉴멕시코주의 알버커크 요양소에서 2년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그후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다시 6개월간 요양한 후 1932년 귀국했다. 귀국직후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 교사로 부임했으며 숭실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고 이듬해 의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5년 건평 3602층 벽돌건물로 교회당을 건축하였으며 1939년에는 백지엽, 김응락 등의 도움을 얻어 보린원을 개설하여 고아들을 수용하였고 후에는 양로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인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미국에 유학하였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교회에서 추방당하였으며 이후 해방되기가지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았다.
    해방이 되자 그는 윤하영, 이유필 등과 함께 평북지역 치안책임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459월에는 윤하영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월남직후 미군정청 통역으로 있으면서 김재준, 송창근 등이 하는 조선신학교에 나가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서울 영락동에 있던 천리교 경성분소 건물을 접수하여 1945122일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서울 영락교회가 되었다(194611월에 교회명칭을 바꾸었다).
    1954년 숭실대학장에 취임하여 3년간 봉직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KNCC) 회장에 선임되어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였다.
    197312일 그는 박조준 목사를 후임자로 세우고 은퇴하면서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976년에는 고당 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를 조직, 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82년에는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을 지휘하고 있다. 1948년 미국 엠포리아 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를, 1958년 연세대학교에서 역시 명예신학박사를, 1977년 숭전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으며 1970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48년 조선신학교의 김재준에 대한 신학논쟁이 전개되었을 때 그는 총회석상에서 개혁자의 부르짖은 자유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3대 자유인데 나와 해석이 다르다 하여 그를 처단하는 것은 삼가야 할 줄 안다고 하여 김재준에 대한 총회의 처단을 반대하면서도 결국 행동으로는 그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경직 목사의 신앙노선은 김재준은 그것보다 온건하고 중도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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